인간을 ‘근심’하고, 다른 삶을 ‘상상’하다

‘욕하면서도 본다’는, 강력한 흡입력과 중독성을 가진 막장 드라마가 한국 텔레비전의 전유물이기만 할까.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할리우드 톱클래스에서도 막장드라마를 만든다. 얽히고설킨 우연, 극단적 상황의 반복으로 보는 이를 짜증나게 하는 막장드라마도 지극히 합리적이고 품격 있는 여느 영화들만큼 쓰임새가 있음을 일깨운다는 차이가 있을 뿐. 1930년대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한 우디 앨런의 <카페 소사이어티>(2016)와,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두루 받은 레베카 밀러의 <매기스 플랜>(2015)은 막장드라마가 삶을 사유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방식의 흥미로운 성과를 보여준다.

사자들에게는 더없이 절실하고 애절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지지받지 못하거나 고통을 주는 로맨스’, 즉 ‘불륜’이라는 이름의 사건은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대체로 기본값에 해당된다. 사랑의 열병은 가족 내부의 관계든 오랜 시간 다져온 우정의 관계든 상관없이 무작위로, 마구잡이로, 예측불허로 침투한다. 여든 한 살의 나이에 만든 그의 47번째 영화 <카페 소사이어티>에서도 남녀 간의 인연은 꼬이고 꼬여 막장드라마를 만든다.

한창 잘나가고 있는 에이전시 대표인 삼촌 필(스티브 카렐)을 찾아 할리우드로 온 뉴욕 청년 바비(제시 아이젠버그)는 필의 비서 보니(크리스틴 스튜어트)에게 반한다. 남자친구가 있다는 말에도 마음을 접지 못하던 그는 남자친구와 헤어져 슬픔에 빠진 보니를 위로하는 지극정성으로 드디어 보니와 연인관계가 된다. 하지만 허황된 할리우드 생활을 정리하고 뉴욕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려던 둘의 설레는 계획은 박살난다. 얄궂게도, 뒤늦게 아내와의 이혼을 결심한 보니의 전 남자친구 필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삼촌이랑 결혼할 거예요? 나랑 할 거예요?” 풍요로운 현재와 화려한 미래를 보장하는 필과, 순수한 열정을 나누었던 바비 사이에서 결정 장애를 보이는 보니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던지는 바비의 질문은 <카페 소사이어티>의 막장 드라마적 품격(?)을 과시한다. 필을 선택한 보니를 뒤로 한 채 뉴욕으로 돌아간 바비는 갱스터 형 벤(코리 스톨)과 함께 클럽 ‘카페 소사이어티’를 뉴욕 최고로 만들며 베로니카(블레이크 라이블리)와 가족을 이룬다. 하지만 삼촌의 새 아내, 즉 외숙모인 보니와 뉴욕에서 재회하자 뜨거웠던 옛 감정에 휘둘린다.

우디 앨런이 만드는 막장 드라마는 언제나 한결같은 지점에서 출발한다. 미아 패로가 주연한 그의 1990년도 영화 <앨리스>(한국 비디오 제목은 <중년의 위기>)에서 중국인 치료사(인지 마술사인지 모호하다)는 말한다. “사랑이야말로 복잡한 감정이죠. 인간은 예측할 수 없는 존재고 감정은 비논리적이죠. 비논리적이니 비이성적이고, 비이성적이니 로맨스는 대개 험난하기 마련이죠.” 그러니 <카페 소사이어티>에서 불륜으로 ‘험난하게’ 엮인 필과 보니, 보니와 바비는 못되고 고약한, 용서받을 수 없는 악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인간이었을 뿐이다. 25년을 헌신한 ‘좋은 아내’를 배신하고 싶진 않지만 반짝이는 젊음의 보니를 취하고 싶고, 바비의 진심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지만 필과 함께 할 화려한 미래 또한 포기하긴 아쉽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인 줄 알지만 여전히 서로를 향해 뜨겁게 뛰는 심장을 나 몰라라 할 수만도 없으니, 그들 모두 그저 인간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우디 앨런의 막장 드라마는 인간의 취약성과 허약함, 믿을 수 없음과 미래를 장담할 수 없음에 관한 가슴 시린 우화가 된다. 그렇게 고약한 운명에 휘둘려 하릴없이 치부를 노출하는 무기력한 패자의 자리로 인물들은 안쓰럽게 돌아간다.

 

욕 한 대학의 예술비즈니스 강사인 매기(그레타 거윅)는 현실을 직시하기로 했다. 사랑하는 남자를 찾을 확률도 없을뿐더러 6개월 넘게 자신을 사랑해줄 남자도 없을 테니, 오로지 자신의 의지만으로 엄마가 되기로. 수학에 천재적 재능을 보였던 전직 스케이트 선수인 피클 사업가 동창 가일(트래비스 핌멜)의 정자를 받기로 하고 거사 일까지 정한다. 그리고 우연한 일로 만난 같은 대학 인류학 강사 존(에단 호크)의 소설 초고 읽어주기를 자처한 뒤 모든 게 틀어진다.

레베카 밀러의 <매기스 플랜>은 매기의 플랜이 어떻게 하나하나 어긋나는지를 보여주며 막장드라마의 새로운 경지를 펼친다. 뛰어나고 잘 나가는 콜럼비아대 종신교수 아내 조젯(줄리안 무어)에 주눅 들어 징징대는 존을 위로했던 그 밤은 마침 가일의 정자를 인공수정한 날이었다. 그리고 예쁜 딸 릴리의 부모로 존과 새로운 삶을 시작한지 2년쯤 지나 매기는 다시 현실을 직시한다. 늘 바쁜 존의 전 아내 조젯을 대신해 그들의 두 자녀 저스틴과 폴을 거두고, 모든 걸 자신에게 맡기고 진척 없는 소설 쓰기에만 매달리는 존까지 ‘돌보며’ 자신이 한정 없이 소모되고 있음을.

“사랑은 원래 너저분한 거야! 비논리적이고 소모적이고 너저분한 거라고!” 절친인 펠리시아(마야 루돌프)의 남편이기도 한 매기의 절친 토니(빌 헤이더)의 말은 옳았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던 조젯의 눈에서 피눈물 뽑아가면서 존과 결혼했지만, 이제는 어떻게든 이 난국을 수습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래서 조젯에게 도움을 청한다. 아이들이며 출판 일이며 존의 소설에 관해서까지 여전히 하루에 3통씩 전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이 제발 남은 사랑의 불씨를 다시 살릴 수는 없겠냐고.

드디어, 이번에는 매기의 플랜이 제대로 작동된다. 함께 참석한 세미나장에서 눈 속에 고립됐던 존과 조젯은 서로를 영혼의 짝으로 다시 발견하고 뜨거웠던 과거의 열정을 되찾는다. 자신의 기획대로 진행된 남편의 ‘불륜’을 명분으로 매기는 존과의 결혼 상태에서 벗어난다, 감사하게도!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로맨스’와 ‘불륜’을 자유로이 오갔던 매기와 존, 조젯은 마치 한 가족처럼 저스틴과 폴, 릴리와 함께 한겨울 뉴욕 도심의 스케이팅을 즐긴다.

하지만 거기서 다시 한 번 매기의 플랜이 어긋났음을 보여주는 힌트가 등장한다. 벌써부터 수학적 재능을 보여 주변을 감탄시켰던 어린 릴리는 어쩜 스케이트조차 잘 타는지. 때마침 스케이트장에 나타난 가일과 어린 릴리를 빠른 눈길로 훑던 매기의 당혹해하는 듯 반가워하는 듯 모호한 얼굴 클로즈업으로 끝나며 <매기스 플랜>은 말한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만들어지는 막장드라마는, 예측 불가능한 운명 앞에 내던져진 존재의 취약성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카페 소사이어티>의 끝은 씁쓸하고, 쓸쓸하다. 그가 꿈꾸었던 모든 것이 있는 신년 파티장에서 바비의 눈은 텅 빈 채 지금 이 곳에 없는 어떤 곳을 향한다. 그 시간이 꿈이었던가, 지금 이것이 꿈인가. 남편 필의 축하 키스를 받으면서도 다른 이와의 ‘단꿈’에 잠긴 듯한 보니의 젊고 아름다운 두 눈에도 회한이 가득하다. 바비의 말처럼 ‘가학적인 작가가 쓴 대본’과도 같은 인생 코미디에 대한 <카페 소사이어티>의 탐구는 우디 앨런 고유의 시니컬하고 허무주의적인 정서에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노인의 한탄과 근심을 더한다.

지식인 뉴요커 남녀를 다룬 코미디적 호흡의 <매기스 플랜>에서 보이는 우디 앨런과의 유사성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주목된다. 줄리안 무어, 그레타 거윅, 에단 호크라는 걸출한 연기자들의 환상적인 호흡과 뉴욕에 대한 일상적 스케치는 ‘달콤한 사랑을 위한 어른 아이들의 뉴욕 스타일 로맨스’라는 카피처럼 로맨틱 코미디 혹은 로맨스물의 외양을 부여한다. 하지만 <매기스 플랜> 또한 사랑의 숭고함, 사랑의 영원성에 관한 신화 등을 과감하게 해체하는 신랄하고 냉혹한 시선을 바탕으로 인간들의 불성실과 위선, 속물근성 등을 낱낱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과연 우디 앨런의 뒤를 이을 만하다 하겠다.

그럼에도 해피엔딩으로 마감되는 <매기스 플랜>은 레베카 밀러를 단지 우디 앨런과의 유사성으로만 가두는 우를 범하지 말 것을 제안한다. 결혼이라는 제도적 장치가 원활히 작동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인식이 냉소와 허무의 사이클에서 순환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미래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레타 거윅이 인상적으로 연기한 매기는 실수를 직시하고 이를 수습하는 데 있어 남편의 전 아내 조젯과의 연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궁극적인 평화를 도모한다. 이처럼 가족제도를 떠받드는 혈연 중심성을 회의하고 ‘또 다른 가족’을 구상하며, 가부장제가 허락한 정상 경계의 바깥에서 펼쳐질 새로운 미래를 낙관하는 <매기스 플랜>의 전복적 상상력, 그리고 <카페 소사이어티>가 보여주는 통찰력은 할리우드 막장드라마의 남다른 쓰임새를 지지하게 만든다.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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