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수의 미래하천 프로젝트 '미호천 탐사'

미호천은 총 연장 89.20km로 지방하천은 50.07km(지방1. 39.07km 백곡천 합류점, 지방2. 11km 보강천 합류점)이고 국가하천은 39.13km이다. 발원지부터 시작하면 약 90km이다. 백두대간의 삼파수(三波水)인 속리산 천왕봉에서 발원한 한남금북정맥과 금북정맥의 물을 모아 세종시 합강리에서 금강과 합류한다, 54개의 지천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4개 광역시 8개 자치단체의 유역권을 가지고 있다. 하폭과 유량을 기준할 때 4대강 다음을 차지하는 우리나라 5대 하천이다. 국내 최대의 모래하천이며 아름답고 풍부한 자연생태계와 드넓은 평화를 가지고 있다. 사람의 삶의 공간을 따라 흐르는 미호천은 세계 최고(最古)의 소로리 볍씨를 비롯해 구석기 유적부터 현대까지의 다양한 역사 및 문화벨트를 형성하고 있다. 그 중심에 정북토성이 있다. 정북토성은 청주의 역사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1999년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국가사적 415호로 지정되었다.

폭염이 정정에 이른 8월 중순 ‘미래하천 미호천탐사대’는 청원구 외화동 팔결교 삼거리 양버즘나무 그늘아래 모였다. 어른 세 명이 둘러싸야 안길만큼 덩치 큰 양버즘나무는 뜨거운 태양볕에서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 신작로에서 미루나무를 제치고 가로수의 주인공이 된 양버즘나무도 세월의 무게 앞에 서서히 다른 작목으로 대체되고 있다. 양버즘나무 가로수로 유명한곳이 경부고속도로에서 진입하여 청주로 들어오는 가로수길이다. 그래서 더 친숙한 플라터나스 그늘 속을 벗어나 미호천 둑길에 몸을 맡긴다. 중부고속국도 다리 아래로 내려가니 누군가 아예 이불을 가져다 놨다. 집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신에 이상이 생겨 자리를 차고 있는 사람이 사용한 듯하다. 풍류와 생활의 중심이었던 하천은 고기를 잡아도 못 먹을 만큼 오염이 되고, 공동체가 파괴 된 세상은 삭막해지고, 승자독식의 세상에서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끝없이 추락한 사람들을 많이 본다. 미호천 본류를 탐사하다 오갑리에서 만난 한 중년 남자도 시대를 부정하며 자기 체면에 걸린 듯 했다. 미호천이 사람과 함께 상생하는 날! 그런 고통도 도도한 물줄에 쓸려 가리라.

플라타너스

김현승(1913~1975 서정시인)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窓)이 열린 길이다

둑에서 바라본 미호천! 작전보로인해 호수가 생겼다.

둑길을 걷다보니 많은 벚나무 가로수가 벌레에 잎을 내어주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미호천 지킴이 전숙자씨는 “벌레를 퇴치하려 농약을 뿌리면 그 약 때문에 어린 새들이 죽는다. 자연이 스스로 극복 할 수 있게 기다려 주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라고 설명한다. 자연이 스스로 정화 할 수 있게 조력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얼마 전 소나무 에이즈로 알려진 소나무재선충의 매개체인 솔수염하늘소의 천적인 ‘가시고치벌’을 찾아냈다고 국립수목원이 발표를 했다. 가시고치벌의 애벌레들은 솔수염하늘소의 애벌레에 달라붙어 체액을 빨아먹는다. 솔수염하늘소는 성충으로 성장하기 전에 고사하여 소나무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자연 스스로에게 있다고 증명되었다. 자연은 스스로 치유 할 수 있는 힘이 있고 그 것을 우리 사람들이 도와주면 되는 것이다.

정북토성에 도착했다. 황백로떼가 무리를 지어 비상을 한다. 토성위의 소나무 사이로 흰색과 녹색의 조화를 이루고 우리를 힐끝 바라본다. 머리에 씌어 진 왕관에서 황금빛이 난다. 사람이 떠나간 자리 황백로가 지키는 정북토성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고교시절 친구와 함께 정북토성을 온 기억이 희미하게 되살아 남다. 작은 골목 돌담 안에 우사를 지나 집으로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여느 시골마을이 다 그렇지만 ‘참 가난한 동네다’라고 느꼈다. 집 앞엔 논과 밭이 있었고 20여 호가 되는 마을 전체를 태실(胎室)이 감싸고 있는 모습 있었다. 흙으로 만들어진 성벽! 참 의아하다 생각했다. 저건 뭘까? 그리고 잊혀 진 정북토성이 역사적 유적이었다는 것을 안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 후 마을이 없어지고 벌건 흙만 남은 토성에 왔던 기억과 그 뒤로 넓은 토성안에 잔디를 깔고 정비된 토성을 온 기억이 전부다.

정북토성과 비상하는 황백로.

정북토성은 미호천변의 평야에 만들어진 토성으로 네모난 평면에 성 둘레는 675m이고 높이는 3.5m이며 내부면적은 3만5483㎡이다. 성문은 양쪽 성벽이 서로 어긋나게 되어 있어 방어에 대단히 유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성이다. 성 둘레에는 외부와 단절시키기 위해 해자를 설치했으며 전쟁용이라기보다 지방 호족들의 거소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축조시기에 대해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성정용교수는 “통일신라시대 축조설이 유력했으나 2015년 충북대 박물관 발굴조사 시 해자를 메운 흙 위에서 놀랍게도 고구려 토기가 출토 되었다. 고구려 토기가 청주에서 출토될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은 475년 고구려가 한성을 함락한 후 금강이북지역까지 진출했던 시기의 유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성은 이 지역에 있던 마한세력이 만들었거나 백제 한성기 지방 지배를 위한 거점으로 축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실증적 고증을 바탕으로 한 청주의 역사는 1,500년을 훌쩍 뛰어 넘는다. 미호천 유역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세력의 존재가 부각되는 시기는 삼국이 아닌 원삼국시대 또는 그 이전으로 보여 진다. 1744년(영조 20년) 상당산성 승장(僧將)인 영휴(靈休)가 작성한 ‘상당산성고금사적기(上黨山城古今事蹟記)’에는 견훤이 궁예의 상당산성을 탈취하고 작강(鵲江)에 토성을 쌓고 창고를 지었다는 기록도 있다. 궁예는 미호천 본류를 따라 올라가 미호천 발원지인 망이산성에서 재기의 기회를 놀이다가 경기도 지방으로 패퇴하였다.

최근 오송 봉산리에서는 2~5세기에 만들어진 대규모 무덤군들이 확인 됐으며 오창 송대리와 청주 송절동 등 미호천 남북에서 대규모의 무덤들이 발견됐다. 성교수는 “청주는 삼한 중 마한지역으로 마한은 3세기에 최소 54개의 나라가 있었다고 하는데 유적 규모로 보아 미호천 일대에 가장 큰 규모의 소국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 마한 단계부터 토성 주위의 저지대를 개발하여 점차 농경지로 활용하면서 생산력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한성기 백제중앙에서는 이 지역의 생산력과 교통로에 주목하면서 중요 지방 세력으로 재편됐을 가능성이 있다. 성교수는 “정북토성과 이어지는 미호천에 나루터가 존재했을 것이다. 이를 고증해 보는 것도 중요하다” 설명한다. 대동여지도에는 미호천을 넘는 곳에 오근진(梧根津)이란 지명이 나온다. 청주에서 진천으로 갈 때 사용하던 나루터로 추정된다.

동그라미로 표시한 곳이 오근진이다. 미호천을 따라 작천, 진목탄, 망천, 동진이 보인다.

- 작천(鵲川) - 현 까치네로 무심천과 합수하는 부근을 말한다.
- 진목탄(眞木灘) - 병천천이 합류하는 부근
- 망천(輞川) -  청주 복대동을 지나 옥산교 앞에서 미호천과 만나는 현재의 석남천
- 미곶(獼串) - 미호천이 미곶강으로 불리었다고도 한다.(형 세종시, 조치원)
- 동진(東津) - 금강과 합류하는 지점. 합강리 부근

무심천 합수부에 이른다. 테크노폴리스 산업현장이 보인다. 2015년 산업단지 부지 내에서 4세기 무렵 주거지 등 600여기의 주거지가 발견됐다. 역사를 바로 만들어 가는 것은 우리 몫이다. 개발의 편리성을 취하기 위해 역사의 흔적을 파괴하거나, 덮거나, 복원하는 모든 것이 지금 이시기에 살고 있는 우리 정신세계의 반증이다. 우리의 미래세대에게 부끄럽지 않는 세대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볼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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