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하며>

둥근 달의 메시지

 

-모두가 즐거워야 할 추석,
그러나 명절이 더 외로운 이들

보름달에 가득한 토끼설화처럼
'원만한 세상'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낮으로는 노염(老炎)이 따끈따끈하지만 바야흐로 시절은 중추가절(仲秋佳節), 문자 그대로 좋은 철이 되었습니다. 절기상으로는 백로(白露)를 지났으니 아닌 게 아니라 가을이 분명합니다.

올 여름은 참으로 무더웠습니다. 몇 십 년만의 폭염이라고 하듯 날이 지독하게 더웠으니 사람이나 짐승, 또 풀과 나무들까지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모두 예외 없이 고통스러운 여름을 보내야 했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 한들 인간이 대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다시 추석(秋夕)을 맞이합니다. 추석은 새해 설과 더불어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입니다. 멀리 신라시대부터 전해오는 추석은 민족 고유의 명절로 2천년 가까운 기나긴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추석은 한가위, 또는 중추절(仲秋節), 가배일(嘉俳日)로 부르기도 하는데 한가위의 ‘한’이란 크다는 뜻이고 ‘가위’란 가운데를 나타내는데 길쌈을 ‘가배(嘉俳)’라 부르던 것이 ‘가위’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가위는 8월의 한 가운데 있는 ‘큰 날’이라는 뜻입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 3대 왕인 유리왕(瑠璃王) 때 추석 한 달 전 여자들을 궁중에 모아 두 편으로 나누어 공주 두 사람이 각각 한쪽씩을 맡아 길쌈 짜기 경쟁을 벌이고 팔월 보름 날 승패를 가려 진편이 이긴 편에 음식과 춤과 노래로 사례하는 잔치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이때 진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며 “회소! 회소!”하고 탄식을 하곤 하였는데 그 소리가 너무나 구슬프고 아름다워 후대사람들이 ‘회소곡(會蘇曲)’이라 이름 짓고 노래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추석에 오늘 날과 같이 차례(茶禮)를 지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조상에 대한 제사풍습은 한참 뒤인 고려 말 이후 조선조에 중국에서 들어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농경사회였던 지난 시절 우리 선조들은 오로지 땅에 씨를 뿌려 양식을 조달했었기에 해마다 이 무렵이 가장 인심이 넉넉하고 훈훈했습니다. 온 여름 내 땀 흘려 가꾼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먹을 것이 풍성해져 걱정이 없어진데서 온 여유로움이었습니다.

추수를 하면 광에 쌀더미와 잡곡이 쌓이고 명절 술도 빚곤 했으니 추석이 즐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집마다 달빛아래 온 가족들이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송편을 만드는 정겨운 모습은 팔도 어느지방, 어느곳에서건 볼 수 있었던 아름다운 추석풍속도였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은 하늘만 쳐다보고 살던 지난 날 이 땅의 가난한 민초(民草)들이 고된 삶속에 얼마나 배를 주리고 살아왔는가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눈물겨운 희망가’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추석 날밤에 떠오르는 쟁반 같은 둥근 달. 달 속의 토끼 설화처럼 모두가 행복한 ‘원만한 세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Newsis

추석이면 부모 형제, 일가친척, 혈육들이 한집에 모여 조상을 기리고, 음식을 같이 나누어 먹고, 선영(先塋)에 함께 절하는 것이 고유한 미풍이요, 전통이었습니다. 그러한 공동체의식을 통해 혈육 간의 유대와 이웃 간의 상부상조하는 협동심이 모여져 사회를 지탱했고 국가라는 큰 공동체가 유지되어 왔던 것이 우리의 역사입니다.

추석에는 마을마다 여러 가지 행사와 민속놀이가 벌어졌습니다. 마을, 마을에서는 농악을 울리며 안녕을 기원하는 한바탕 풍물놀이가 흥을 돋웠고 지역에 따라서는 닭싸움, 소싸움, 길쌈놀이, 달맞이 등으로 모두 함께 하루를 즐겼습니다.

전라남도 서해안지방에서는 달빛 아래 부녀자들이 둥글게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빙빙 도는 강강술래를 펼쳤는데 이는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습니다.

“뽕나무 밭이 변해 푸른 바다가 되었다”듯 상전벽해(桑田碧海)로 세상이 바뀌었으니 과거와 같은 전통적인 추석풍속도 많이 달라져 옛 모습은 볼 수가 없습니다.

대신 ‘민족의 대이동’이라는 집단귀성이 범국민적 행사가 되다시피 됐으니 세월 따라 바뀐 세상의 모습이 마치 꿈과 같음을 느끼게 됩니다. 더 낳은 삶을 위해 도시로 나간 자식들이 동물의 회귀본능처럼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현대사회에서 볼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추석에도 전 국민의 70%, 3천500여 만 명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이동을 하는 장관을 연출할 터이니 전국의 모든 도로는 또 한 번 심한 몸살을 앓을 것입니다.

온종일 하늘을 나던 새들도 해가 지면 둥지로 날아들고 산야를 헤매던 짐승들도 제 굴을 찾아 듭니다. 여우는 생을 다해 마지막 숨을 거둘 때면 제가 낳고 자란 고향 쪽으로 머리를 두고 숨을 거둔다 하여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합니다. 그런 회귀본능은 인간이나 짐승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모두가 즐거워야 할 추석명절이 오히려 더 외로운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선 고향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는 북한이산가족들입니다.

나라가 둘로 갈린 지 71년, 이미 노쇠해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은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먼 북쪽 하늘만 바라보면서 올해도 긴 한숨만 내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념이 무엇인지, 정치가 무엇인지 그들은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또 회사경영이 어려워 임금을 받지 못해 고향에 가지 못하는 노동자들, 그들 또한 명절이 즐거울 수 없습니다. 뉴스에는 기업체의 임금체불이 1조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생활비 얼마를 벌기위해 피땀 흘리며 일한 노동자들이 제때에 월급조차 받지 못해 고향에도 가지 못한다면 그건 사회 전체의 불행입니다.

그 밖에도 명절이 더 외롭고 힘든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의지할 곳없는 독거노인들, 부모 없는 보육원의 어린이들, 또 생활 보호대상자들, 그들이야 말로 명절은 오히려 더 슬픈 사람들입니다.

한가위 보름달은 크게 보이긴 하지만 일 년 중 가강 큰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달이 크게 보이려면 지구에서 달이 가장 가까울 때 인데 천문학적으로 늘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월 대보름 역시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그것이 어떠하건 쟁반 같은 보름달을 보면 사람은 누구나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푸근하고 여유로워 짐을 느낍니다. 어느 한 부분, 한 곳도 비뚤어짐이 없는 동그란 원을 보면 ‘원만(圓滿)’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모나지 않고 어떤 각(角)도 없이 동그라미 안에 가득한 ‘원만’함이야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바라건대 남과 북은 물론 우리 사회 곳곳 서로 각을 세우지 말고 둥근 달 속의 방아 찧는 토끼처럼 온기 가득한 모나지 않은 ‘원만한 사회’가 되었으면 오죽이나 좋을까, 오늘 그것을 생각합니다.

저작권자 © 충청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