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하며>

독일과 한국의 차이

 

-휴전이 된 지 63주년,
계속되는 전쟁 아닌 전쟁.
독일의 성숙한 민족의식과
남과 북의 대결정책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북한의 쏜 미사일을 공중에서 폭파시킨다는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드(THAAD) 도입문제를 놓고 국무총리가 주민들에게 봉변을 당하지 않나, 그러잖아도 바람 잘 날이 없는 나라가 또 한 번 뒤숭숭합니다. “민중은 개, 돼지이니 먹을 것 만 주면 된다”는 어느 철부지 공무원의 고약한 망언도 들리고 간도 크게 남의 돈으로 100억을 해먹고 구속된 현직 검사장 소식에 ‘화장실 전문’ 성폭행 연예인 등등등등…세상 돌아가는 꼴이 요지경(瑤池鏡)입니다. 검찰청은 아주 친절하게 ‘포토라인’까지 그어 놓고 날마다 불려오는 피의자들을 맞느라 바쁘니 그러잖아도 불쾌지수가 높은 장마철이 더욱 무덥기만 합니다.

각설(却說)하고.
1989년 11월 9일 독일분단의 상징인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양쪽 장벽위에는 수 천 명의 젊은이들이 망치와 도끼를 들고 올라가 동서를 갈라놓은 시멘트장벽을 마구 깨부수는 역사적인 장면을 연출합니다.

광장을 메운 수 만 명의 시민들은 “뷔어 진트 아인 폴크!”(Wir sind ein Volk. 우리는 한 민족이다)를 외치며 거대한 함성으로 환호하는 가운데 이 감동적인 드라마는 텔레비전을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되면서 세계인들은 게르만민족의 재결합에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그것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지는 20세기 독일 국민의 위대한 퍼포먼스였습니다.

베를린은 원래 독일을 상징하는 수도였습니다. 그러나 1945년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승전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서방진영과 공산진영인 소련에 의해 동서로 나뉘어져 1949년 동베를린은 소련이, 서베를린은 서방이 관할하는 두 개의 도시로 분할돼 40년 동안 ‘냉전(冷戰)의 상징’으로 지속돼 왔습니다.

분단과 함께 베를린시는 동독 안에 위치한 섬이나 다름없는 도시가 됐습니다. 서독에서 베를린을 가자면 동독 땅을 거쳐 가야 하기 때문에 서베를린 시민들은 미군기를 통해서만 공수작전으로 생활필수품을 공급받을 수밖에 없는  불편을 겪습니다.

서독은 빌리 브란트가 수상이 되기까지 동독과 철저한 적대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서독은 서독만이 독일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며 동독을 인정하지 않았고 동독을 승인하거나 수교하는 국가와는 관계를 맺지 않는 소위 ‘할슈타인 독트린’에 따라 20년간 대 동독 강경노선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서독은 1970년 서베를린 시장으로 명성을 얻은 브란트가 수상에 취임하면서 ‘동방정책’을 선언, 동독을 인정하고 공산권국가들과의 화해정책을 폅니다. 브란트는 독일 ‘경제부흥의 아버지’ 아데나워수상의 ‘라인강의 기적’으로 국력이 크게 신장된 서독에 대해 주변국들의 경계의 눈초리가 일자 서독은 절대 대립의 의지가 없음을 세계에 알리며 점차로 통일의 기반을 다져나갑니다.

그러나 공산권의 맹주인 소련과 냉전의 선봉에 서있던 미국이 동방정책을 견제했고 국내 보수 세력들의 반대 역시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브란트는 굽히지 않고 반대세력을 설득해가며 화해정책을 밀고 나갑니다. 브란트는 분단으로 인한 동•서독 국민들의 문화적 이질감 극복을 위해 먼저 방송개방을 추진합니다. 서독국민이 아무런 제재 없이 동독 텔레비전을 볼 수 있게 했고 동독도 뒤따라 서독 텔레비전을 개방함으로써 양독 국민의 동질성 회복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합니다.

동서를 갈라놓은 브란덴부르크 장벽에 올라가 “독일은 하나다”를 외치며 환호하는 독일 국민들(위). “오늘도 이상 없나,” 휴전선 철조망을 순찰하는 국군장병들(아래). /Newsis

또한 양쪽 국민들의 통행이 자유화되어 동독국민이 서독을, 서독국민이 동독을 자유롭게 오고가는 조치가 이루어집니다. 당연히 서신 교환은 필수적으로 시행됐습니다. 동독국민이 서독을 방문할 때는 서독 정부가 여비 일체를 부담해주었고 서독 국민이 동독을 방문할 때도 마찬가지로 경비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독정부는 베를린으로 연결되는 수 백Km에 달하는 동독 내 고속도로를 건설해 주었습니다.

당시 동독은 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 중에서는 경제가 가장 발전해 집집마다 자동차가 있을 정도로 기본적인 부는 누리고 있었지만 서독의 그것과 비교할 바는 아니었습니다.

브란트는 동독의 경제가 발전해 양독(兩獨)이 균형을 이룰 때 통일이 가능하다는 확신에 따라 각 분야에서 동독을 도왔습니다. 서독의 도시 건설공사를 동독업자에게 맡기는가 하면 심지어 서독 군인들의 군복과 같은 군수품 제조마저 동독 업체에 주는 통 큰 모습마저 보였습니다.

독일의 통일은 어느 날 우연히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동서독 국민들의 수준 높은 민족의식이 원동력이 되었고 빌리 브란트라는 불세출(不世出)의 인물이 과감히 앞에서 끌고 동서독 국민들이 손을 잡고 함께 뒤를 따랐기에 가능했습니다. 분단 40년, 동방정책 20년이 거둔 빛나는 결과였습니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이룬 것은 676년입니다. 그 이후 우리 한민족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침략은 당했을지 언 정 1300년 동안 분단 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일제치하 35년을 거쳐 1945년 나라를 되찾고 71년, 국토는 둘로 분단되고 민족은 갈라진 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평양에 가보면 그곳 사람들은 “우리 통일합시다”를 입에 달고 삽니다. 남쪽에선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가르치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상대를 비난하는 거친 악담과 험담만이 남과 북을 오고 갈 뿐입니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되기 전 한때 서독에서 몇 개월 머문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변호사인 남편과 고등학교 역사교사인 아내 부부를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한국과 독일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고 말을 건넸습니다.

그때만 해도 한국사람은 독일사람을 만나면 ‘한국과 독일은 같은 분단국’임을 은근히 강조함으로써 동병상련(同病相憐)을 확인해 친밀감을 더 하려는 버릇 아닌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독일 아내는 빤히 쳐다보면서 “우리는 민족끼리 전쟁을 하지는 않았어요. 한국은 서로 수백만 명이 죽는 전쟁을 했지 않나요”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요. 같은 분단국이지요”라는 대답을 기대했던 필자는 순간, 당혹감을 감추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운 생각으로 얼굴이 뜨거워 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녀의 말이 옳았습니다. 독일이나 우리나 외세에 의해 분단 된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들은 민족끼리 싸우지 않았고 우리는 민족끼리 전쟁을 했습니다. 그게 다릅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로 통일을 이루었고 우리는 지금도 ‘전쟁 아닌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핵무기를 만들어 위협을 하고 있고 우리 또한 미국을 믿고 “해 볼 테면 해보자”고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남북이 주고받는 험악한 말들을 듣노라면 금방이라도 전쟁이 터질 것 만 같은 두려움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도대체 언제 우리는 남북을 갈라놓은 저 155마일, 휴전선의 철조망을 걷어 낼 수 있을지, 독일과 우리가 다른 점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달 27일은 1953년 판문점에서 6•25전쟁의 휴전협정을 맺은 지 63주년 되는 날입니다.

저작권자 © 충청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