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하며>

4월은 '잔인한 달'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피 묻은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 되살아나리라-

 

‘4월은 잔인한 달’- 누구나 한번쯤 들어 봤음직한 이 유명한 시구(詩句)는 영국의 시인 T·S엘리어트(1888~1965)가 1922년에 발표한 '황무지'(The Waste Land)의 1부 ‘죽은 자의 매장’ 가운데 첫 구절입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지요 /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 마른 뿌리로 약간의 목숨을 남겨주었습니다-

434줄의 이 긴 시는 20세기 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시중의 하나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물경 1000만명이라는 엄청난 사람들이 사망한 1차세계대전. 전쟁은 끝났으나 도시와 산과 들은 모두 폐허가 되었고 정신적 공황(恐慌)에 빠진 사람들은 절망을 헤어나지 못한 가운데 ‘오히려 겨울이 따뜻했다’는 역설적인 시구를 읽으며 위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가 한국의 독자들에게 애송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 4․19혁명 뒤부터입니다. 3월15일 정·부통령 선거부정에서 촉발된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겪은 뒤라서 ‘잔인한 4월’이라는 몇 글자만으로도 상처받은 국민들의 가슴에 자연스럽게 안겨졌습니다. 꽃들이 만개하는 좋은 계절 4월을 ‘잔인한 4월’이라니, 그러고 보면 엘리어트는 38 년 뒤의 한국을 예견이라고 한 것일까, 설마.

그해 4월도 날씨는 내내 청명했습니다. 새들은 무심히 하늘을 날고 시냇물은 쉼없이 흘러갔습니다. 척박한 대지, 그 땅 산수간에는 어김없이 봄이 무르익었고 꽃은 다투어 사방에 만발했습니다. 보릿고개가 시작될 무렵이었지만 피어린 함성과 총성만 없었던들 세상은 예나 다름없이 태평해 보였습니다.

‘4월혁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48년 집권 이래 숱한 파동을 일으키며 영구집권을 획책하던 자유당정권이 정부통령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의 당선이 어려워지자 관권을 총 동원해 전국적인 부정선거를 감행한 것이 직접적인 발단입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서울에서 지방으로 확산된 가운데 마산에서 시위 중 실종되었던 고교생 김주열 군의 시체가 팔뚝만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부두에서 물위로 떠오르자 경찰의 만행에 대한 전 국민적 분노는 순식간에 폭발하고 맙니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19일 하루 동안 총탄에 죽은 사람이 서울에서만 100여명이 넘었고 몇 일 동안 전국에서 186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부상을 당한 사람도 6026명이나 됐습니다. 수많은 목숨이 희생된 시위는 26일 이승만대통령이 하야(下野)를 선언할 때까지 전국에서 들불처럼 타올랐습니다.

1960년 노도처럼 일어 난 ‘젊은 사자들.’ 그것은 민족사적 비극이었던 동시에 기념비적인 ‘쾌거’였다. /1960년 동아일보가 펴낸 ‘민주혁명의 기록’사진 중에서.

결국 관제국부(官制國父)로 떠받들어져 종신집권을 꿈꾸던 이승만대통령은 이 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민의 힘에 의해 권좌에서 끌어 내려지고 맙니다.

평소 아무 힘도 없어 보이던 국민들이었지만 한번 일어서면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가 되는가를 보여준 쾌거였습니다. 그것은 학생혁명, 민중혁명, 국민혁명이었습니다. 하지만 ‘4월혁명’은 불행하게도 꿈을 펴기도 전에 이내 권력에 눈이 먼 정치군인들의 5․16쿠데타로 군홧발에 짓밟히고 맙니다.

그리하여 ‘4월혁명’은 30년이 넘도록 그 이름조차 찾지 못한 채 ‘4․19의거,’ ‘4․19학생의거,’ ‘4․19,’ ‘4․19혁명’등으로 그때마다 제 각기 불려 오면서 군사정권의 의도적인 홀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박정희, 전두환 등 정통성 없는 군사독재자들은 하나같이 국민에 의한 독재타도라는 사실 자체를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4월혁명’이 제 이름을 찾은 것은 1993년 4월19일 김영삼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서울 수유리의 4․19묘지를 참배하면서부터 입니다. 4․19가 제대로 역사의 평가를 얻기까지는 33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세월은 흘러 당시 교문을 박차고 나와 거리를 질주하던 젊은이들은 이제 70, 80대가 되었고 그 해 세상에 태어난 4․19동이들도 60을 앞두고 있습니다. 나라는 그런대로 민주화되고 경제는 좋아 졌지만 사회는 여전히 시끄럽고 어수선합니다.

국론은 갈리고 정쟁(政爭)은 계속되고 힘을 가진 자들의 부정과 부패는 예나 다름이 없으며 지역 간, 세대 간, 계층간, 빈부간의 갈등은 날로 더 해만 갑니다. 남북관계는 전쟁일보전의 험악한 분위기로 치닫고 있는 형국입니다.

4․19혁명의 숭고한 정신이 자유민주주의의 실현과 부정부패의 척결이었다면 그 혁명은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중인 ‘미완의 혁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숭고한 4․19정신은 지금 어느 누가 잇고 있으며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 목이 터져라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를 내 달렸던 한 사람으로서 오늘의 이 혼란스럽고 부패한 사회를 보는 심정은 한 마디로 슬프고 착잡합니다. 역사의 발전이란 이렇게도 어려운 것인가.

우리는 이 4월, 다시 선거를 치릅니다. 햇빛은 눈부시고 꽃들은 다투어 피는 가운데 유행가제목처럼 ‘봄날’은 가고 있습니다.

공천을 놓고 여야없이 이상한 ‘생쇼’를 벌이는 이번 20대 총선은 과연 얼마나 ‘좋은 인물’들을 가려 뽑을지 궁금합니다. 선거 때 마다 잘못 뽑아놓고 후회하는 것이 우리 국민들의 속성입니다. 누군가 그랬습니다. “정치인을 원망하지 말라. 그것은 바로 국민의 수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요.

186위, 그날의 영령들이 잠들어있는 서울 수유동 국립4․19민주묘지 사월학생혁명기념탑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 되살아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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