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하며>

춘래불사춘

 

ㅡ꽃피는 봄이 왔는데
봄이, 봄이 아니라 하네.
정치는 투쟁으로 날이새고
나라는 전쟁일보직전의 위기
2016년 대한민국의 봄ㅡ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엊그제 푸념하듯 던진 말입니다. 봄이 왔으나 봄이, 봄이 아니라는 이 의미심장한 한마디는 김대표의 최근 심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공천권을 손에 쥐고 후보자들의 생살여탈권을 휘둘러야 할 집권여당의 당수가 거꾸로 면접생이 되어 “차렷! 경례!” 구령에 90도로 허리를 굽혀 과한 예를 갖추는 모습만으로도 현재 김대표의 심사가 어떠한가를 짐작케 합니다. 누가 뭐라 해도 현재로선 여당의 차기 대권주자 1순위인 그이기에 하는 말입니다.

‘춘래불사춘’이라는 말은 원래 2000여년전 전한(前漢)의 11대 황제인 원제(元帝)때 궁녀였던 왕소군(王昭君)의 삶을 그린 시에 나오는 글입니다. 왕소군은 양귀비, 서시, 초선과 함께 중국 역사상 4대미인 중 한사람으로 꼽힌 여인입니다.

중국의 역사서인 한서(漢書), 서경잡기(西京雜記)에 보면 그녀는 원래 이름 없는 궁녀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한나라는 골치 아픈 북방 흉노를 회유하기 위해 궁녀 중 한명을 뽑아 보내게 되었습니다.

황제는 궁중화공에게 궁녀들의 인물화를 그려 오도록 지시합니다. 그림을 보고 가장 못난 궁녀를 골라 보내려는 꼼수였습니다. 궁녀들은 속내도 모르고 서로 예쁘게 그려 달라고 화공에게 뇌물경쟁을 벌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미모를 믿고 있던 왕소군만은 전혀 부탁을 안 합니다. 당연히 추녀로 그려진 왕소군의 인물화는 예쁘게 그려진 다른 궁녀들을 제치고 황제의 지목을 받습니다.

그녀가 흉노로 떠나는 날 실제 왕소군을 본 황제는 깜짝 놀랍니다. 그녀는 못생긴 추녀가 아니라 절세의 미녀였던 것입니다. “저런 미인을 흉노로 보내다니, 아깝구나.” 황제는 크게 탄식하고는 화공을 참수(斬首)해 버립니다.

어쩔 수 없이 황량한 북방 낯선 땅으로 간 왕소군은 흉노의 왕인 호한야선우(好韓邪單于)의 후궁이 되어 아들을 낳고 잘 삽니다. 그러나 몇 해 뒤 호한야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가 죽으면 처첩은 아들이 차지한다는 관습에 따라 이번에는 아들인 새 왕의 후궁이 되어 딸을 둘이나 낳고 복을 누리며 72세 까지 살다가 죽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후세의 시인, 묵객들은 왕소군의 삶을 소재로 숱한 작품을 세상에 내 놓았고 그중 하나가 당나라 동백규의 ‘소군원(昭君怨)’으로 그 내용 중에 들어있는 글이 바로 ‘춘래불사춘’입니다. 당시 한족(漢族)들은 아버지의 처첩이 자식의 것이 되는 흉노의 관습을 매우 혐오해 왕소군의 삶을 비극적으로 작품화했던 것입니다.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는 봄.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땅의 봄은 봄이 아닌 봄이 되고있다. /Newsis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봄이 왔으나 봄이, 봄같지 아니하네-

이 명구는 2천여 년을 지나 오늘에까지 전해져 해마다 봄이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어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제 정치인의 하소연으로 까지 바뀌어 화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필자는 언제 부터인가 해마다 봄이 오면 한편의 ‘춘래불사춘’을 습관처럼 써 오고 있습니다. 지난시절 이 땅의 봄은 꽃은 피고 새들은 지져 겨도 백성들의 허기진 삶은 피할 수 없는 질곡(桎梏)이었기에 매년 소회(所懷)를 쓰곤 했습니다. 되돌아보면 이 땅에 사는 대다수 민초들의 봄은 하나같이 ‘春來不似春’이 아니었을까,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겨울이 가고 해동(解凍)이 된 이 무렵이면 지난 가을 수확한 양식이 떨어져 보리 고개가 시작됐고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목숨을 부지했던 것이 우리조상들의 삶이었습니다. “가난은 임금님도 어쩔 수 없다”던 농경사회, 그것은 피할 수 없던 민족의 숙명이었습니다. 가혹했던 일제 36년이 가고 해방이 되어 나라를 찾은 뒤에도 봄은 언제고 ‘춘래불사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어진 정권에서도 독재와 억압만이 있었을 뿐 가난한 서민들, 진정한 국민의 봄은 누릴 수 없었습니다.

가까운 현대사에서만 보더라도 1960년 3·15부정선거에서 비롯된 전국적인 혼란이 그랬고 4·19혁명, 5·16군사쿠데타, 광주 5·18학살 등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사건들이 줄줄이 봄을 멍들게 하면서 힘없는 국민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습니다.

김무성대표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나라, 우리사회는 봄이 왔으나 봄이 봄이 아닌 봄을 보내고 있습니다. TV를 틀면 온통 북한 핵소식, 미국의 신무기 시위로 전쟁직전의 공포분위기로 넘쳐나고 험악한 독설들만 오고 가는 남북관계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입니다.

봄은 희망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국토는 남북으로 갈리고 지역은 동서로 갈리고, 이념으로, 노사로, 세대로, 빈부로 사분오열돼 갈등이 일상화된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갈등을 조정하고 봉합해야 할 정치는 오히려 권력투쟁과 정쟁을 일삼고 있으니 이러고 어찌 봄을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하루 40여명, 1년에 1만 500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나라에서 봄이 온들 봄이 봄일 수가 있을까. 부모가 제가 난 자식을 살해해 암매장하고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는 이 못된 풍토에서 봄이 봄 같기를 기대하다니.

엊그제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성장과실의 분배, 아시아의 불평등 분석’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돈 잘 버는 소득 상위10%가 전체소득의 45%를 차지하고 있다고 전합니다. 우리나라가 아시아 최고의 불평등 국가로 나타났다는 이런 소식은 오늘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또 청년실업률 12.5%라는 사상 최고의 통계청 발표 역시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꿈을 펼치며 신바람이 나야할 젊은이들이 일할 곳이없어 거리를 배회하고 제가 난 나라를 지옥이라고 ‘헬조선’을 외치는 현실에 어찌 봄이 봄일 수가 있겠는가.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다는 구조적인 사회 불평등 현상을 놓고 자조(自嘲)하는 젊은이들을 나무랄 수 있겠는가.

“살아야 할 것인가, 죽어야 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라고 고뇌했던 햄릿의 독백이 사방에서 들리는데 봄이 어찌 봄일 수 있겠습니까.

김무성대표의 ‘춘래불사춘’은 그 심정은 이해 되지만 ‘행복한 고민’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2016년 대한민국은 봄은 왔으나 봄이 아닙니다. ‘春來不似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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