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하며>

이승만과 김구

 

ㅡ현실정치에서는 이겼지만
역사에서는 진 이승만,
현실정치에서는 졌지만
역사에선 이긴 김구.
오늘 그들을 생각한다ㅡ

 

우리 현대사에 큰 족적(足跡)을 남긴 두 인물, 우남(雩南) 이승만 박사와 백범(白凡) 김구 선생은 동지로, 라이벌로, 정적(政敵)으로 한 시대를 풍미(風靡)한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국운이 풍전등화(風前燈火)이던 시절 한 사람은 미국에서, 또 한 사람은 중국에서 조국광복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힘을 합쳤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몸을 숨겨가며 독립운동을 하던 시기에는 동지였으나 해방공간에서는 경쟁자가 됐고 정부수립 과정에서는 라이벌, 정적(政敵)의 관계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1948년 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수립과 함께 초대대통령 자리에 오름으로써 승패가 갈렸고 통일정부를 주장하던 김구는 49년 6월26일 육군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짐으로써 일단 경쟁관계는 끝이 납니다. 이는 바로 현실정치에서 이승만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 됐고 김구는 패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삶에는 공통점도 있었습니다. 지역은 달랐지만 같은 황해도 동향이라는 점이 그랬고 서당을 다니고 몇 차례 과거시험에서 낙방한 점 또한 그렇습니다. 무대는 달랐지만 40여년 독립운동을 한 점, 그로인해 옥고(獄苦)를 치른점 역시 같았고 두 사람이 모두 생의 마지막을 비극적으로 맞은 점 또한 같았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두 거인 이승만박사(오른쪽)와 김구선생. 두사람은 동지로, 경쟁자로, 라이벌로 조국광복에 헌신했다. / Newsis

이승만은 1875년 4월18일 황해도 평산(平山)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납니다.

어려서 부모를 따라 서울로 올라온 이승만은 서당에서 글을 익히고 미국인 목사 아펜셀러가 세운 배재학당을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대, 하버드대를 거쳐 1910년 프린스턴대학에서 한국인 최초의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이후 그는 하와이에서 한인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벌입니다.

이승만은 뛰어난 사교력과 유창한 영어로 미국정부 관리들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벌이는 한편 교민사회를 다지면서 자신의 기반을 점차 넓혀 갑니다.

1933년 이승만은 스위스 여행 중 제네바의 호텔 레스토랑에서 훗날 퍼스트레이디가 된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납니다. 그때 이승만의 나이 58세, 프란체스카는 33세였습니다. 이승만은 고국에 본처와 아들이 있었으나 이혼한 상태였고 프란체스카 역시 재혼이었습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고국에 돌아 온 이승만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48년 8월15일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그의 나이 73세. 이때 이승만대통령은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라는 구호로 국민의 단합을 촉구합니다. 이 슬로건은 바로 이대통령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국내정세가 혼란할 때 마다 대국민 메시지로 쓰여집니다.

이대통령은 취임한지 2년 뒤 시련을 맞습니다. 1950년 6월25일 북한인민군이 남침을 한 것입니다. 이때 이대통령의 첫 번째 실수가 일어납니다. 북한의 남침 소식이 전해지자 이대통령은 부랴부랴 짐을 챙겨 특별열차편으로 재빨리 대전으로 피신을 합니다. 그리고는 녹음방송을 통해 “우리 국군이 적군을 격퇴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국민들을 안심시킵니다. 포성에 놀라 혼비백산 피난보따리를 싸던 시민들은 대통령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북한 인민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이미 미아리고개를 넘어 서울도심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이대통령은 단 하나뿐이던 한강인도교 폭파를 지시합니다. 다리를 건너던 수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고 강을 건너지 못한 시민들은 인민군 치하에서 수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대통령은 12년 장기집권기간 많은 과(過)가 있었습니다. 1950년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위시해 51년 거창양민 학살사건, 52년 부산정치 파동에 따른 발췌개헌안사건, 54년 사사오입(四捨五入)개헌 파동, 58년 경향신문폐간으로 대표되는 언론탄압, 59년 정적이었던 진보당의 조봉암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교수형에 처한 것, 60년 3․15부정선거와 경찰발포로 시위학생 180여명을 희생시킨 것 등등․․․큰 실수들을 너무 많이 저질렀습니다. 그 중에서도 자신의 집권을 위해 단독정부를 서두름으로써 남북분단을 고착화시켰다는 점은 역사의 평가가 남아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대통령은 국민혁명이라는 전대미문의 민중궐기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1960년 5월 29일 안개 자욱한 새벽 하와이 망명길에 오릅니다. 이승만은 호놀룰루의 요양원에서  교포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생활하다가 65년 7월19일 부인 프란체스카여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90세의 나이로 쓸쓸히 눈을 감았습니다.

김구선생은 이박사 보다 한해 늦은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海州) 백운방 텃골에서 태어납니다.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었으나 조선시대 화를 당한 선조들이 멸문지화를 피하기 위해 양반신분을 숨김에 따라 상민(常民)으로 성장했습니다.

어려서 서당에서 글을 배웠고 17살 때 과거 시험을 보았으나 낙방합니다.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를 보면 “과거에 장원을 하려면 공부를 하기보다 정승의 첩을 찾아가 뇌물을 바치는 것이 쉬웠다”고 적고 있습니다. 번번이 시험에 떨어지자 실망한 아버지는 ‘마의상서(麻衣相書)’를 구해다 던져주고 “장원은 틀렸으니 관상이나 봐주고 먹고 살아라”고 권합니다.

김구는 아무리 책을 살펴봐도 자신의 관상이 길상(吉相)으로 나와 있지 않은 것에 실망합니다. 그때 눈에 띄는 구절을 발견합니다. ‘상호불여신호(相好不如身好) 신호불여심호(身好不如心好).’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아무리 몸이 좋아도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라는 뜻입니다. 백범은 결심합니다. “마음착한사람이 되겠다”고. 백범이 “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어 마당을 쓸겠다”고 한 것이나 “민족의 분열은 안 된다”며 ‘통일정부’를 주장한 것 등은 바로 그 결심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하여튼 ‘문지기’가 되겠다던 백범은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었고 비명에 떠나 통일정부는 보지 못했지만 후세 국민들의 뇌리에 ‘통일의 화신’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김구는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며 1948년 4월19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지도자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38선을 넘어 갑니다. 그리고 돌아와 1년 뒤 인 49년 6월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집니다. 향년 73세였습니다.

조국광복을 위해 땀흘린 이승만과 김구, 두사람의 애국심에 대해서는 아무리 칭송을 한다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공(功)과 과(過)가 있기 마련입니다. 훼예포폄(毁譽褒貶), 헐뜯고 칭찬하고 박수치고 비난하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사람 사는 세상의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잘한 것은 잘한 대로, 못한 것은 못한 대로 인정하면 됩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정부수립 당시 이승만이 김구와 손잡고 통일정부를 실현 했던들 오늘 같은 민족분단은 없었을 것이고 그의 이름은 더욱 빛나고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승만은 현실정치에서는 이겼지만 역사에서는 졌고 김구는 현실정치에서는 졌지만 역사에서는 승자가 되었습니다.

남북관계가 금방 전쟁이라도 터질듯 험악한 말들이 오고 갑니다. 그런데 내 나라 문제를 놓고 남들이 ‘밤 놓아라, 대추놓아라’ 참견하고 흥정을 하는 것을 보면서 솔직히 씁쓸함을 금치 못합니다. 70년 전이나 오늘이나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역사에서 가정(假定)은 금물(禁物)이라지만 만약 오늘과 같이 남북관계가 일촉즉발의 위기에 빠져 있을 때 김구선생이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글쎄, “내가 가서 담판을 짓고 오겠다”고 옛날 모습 그대로 회색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판문점을 향해 달려가지는 않았을까, 부질없는 생각을 해봅니다.

올해는 3 · 1운동 97주년. 나라가 어려울 때 큰 인물을 그리워 하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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