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하며>

다시 설날을 맞으며

 

1500년 이어온
민족의 큰 명절 '설날'
탄압과 수난 속에서
이름조차 빼앗겼던

그날을 다시 생각한다

 

설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 오고 있습니다. 추석과 함께 우리 민족의 양대 명절의 하나인 설은 19세기 말 양력이 이 땅에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 한해를 시작하면서 만백성이 함께 즐겨온 민족의 대축제였습니다.

설날의 유래는 멀리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삼국유사에 ‘신라 비처왕 때 정월 초하룻날 설을 세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설은 기나긴 역사를 갖고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 뒤 고려와 조선을 거쳐 민족 문화로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설은 그 뿌리가 1500년은 된 것이 아닌가 짐작 됩니다.

설은 한 해를 끝내고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로‘설다’, ‘낯설다’, ‘삼가다’등의 의미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한자로는 원단(元旦), 세수(歲首), 신일(愼日)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설날에는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조상에 차례를 지내고, 떡국을 먹고, 성묘(省墓)를 하고, 부모, 일가친척, 이웃 어른들에게 세배를 하는 것이 고유한 풍속입니다. 또 설빔이라하여 옷을 새로 만들어 입고 남녀노소가 동네 마당에 모여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 등 민속놀이를 하며 같이 즐겼습니다.

조선의 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한 해 동안 빗질해 빠진 머리카락을 모아 두었다가 설날 해질 녘에 태우며 나쁜 병에 걸리지 않기를 기원했다’고도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민족의 명절이 근 현대에 들어오면서 불행하게도 제 이름마저 빼앗긴 채 숱한 박해와 핍박을 당해 왔습니다.

고종황제 때인 1895년 음력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바꿔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설의 수난은 시작됩니다. 이때부터 음력은 구시대의 유물로 낙인 찍혀 양력 날자 밑의 보조 활자로 밀려 났고 설이라는 이름조차 ‘구정(舊正)’으로 격하되는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이는 일찍 서양문화를 받아들인 일본이 쓰는 양력을 따라 하는데서 생긴 호칭이었지만 수난은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일제의 조선 문화 말살정책으로 본격적인 탄압으로 바뀝니다. 일제는 철저히 양력설을 강요했고 국민들이 설을 세지 못하도록 떡 방앗간을 지켜 서서 기계를 못 돌리게 하는가 하면 설빔을 입은 사람들에게 먹물을 뿌리는 고약한 심술을 부리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뿌리 깊은 민족의식은 온갖 탄압 속에서도 감시의 눈을 피해 가면서 몰래 설을 세곤 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건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고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설에 대한 핍박은 40년이나 계속됐다는 점입니다. 이승만 정부는 ‘이중과세’ 금지를 내세워 1949년 신정(新正)의 3일 연휴를 법제화하여 강제로 공무원들에게 양력설을 강요했고 박정희 정부 또한 설날을 공휴일에서 아예 제외시켜 학생들을 등교시키고 공장도 쉬지 못하게 하는 탄압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공직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할 수없이 신정을 셀 수밖에 없었고 국민들은 구정을 세는 이중과세가 점차 보편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 5공정권 들어와 지지기반이 취약했던 전두환 정부는 민심을 회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1985년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설을 공휴일로 선포했고 1989년 노태우 정부 들어와 비로소 ‘설날’이라는 제 이름을 되찾고 공휴일로 지정되기에 이릅니다.

설날을 맞아 색동옷을 입은 아이들이 동네 어른들에게 함께 세배를 드리고 있다. / 뉴시스 자료사진

무려 40년 동안 제 나라에서 이름마저 잃어 버렸던 설은 온갖 압제속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90년 만에 다시 회생을 한 것입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 대통령은 온갖 구설(口舌)을 들으며 옥고(獄苦)마저 치렀지만 6․25뒤 30년 넘게 계속 돼온 ‘통행금지’ 철폐와 설을 복권시킨 그 공은 평가 받아야 될 듯 싶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우리나라 말고도 중국과 싱가폴, 베트남, 대만이 설을 명절로 세고 있습니다. 잘 알려진대로 중국은 설을 ‘춘절(春節)’이라 하여 일년 중 가장 큰 명절로 무려 1억명이 도시에서 고향을 찾아 천리, 만리 이동을 하는 일대 장관을 이룹니다.

그들은 춘절에 폭죽을 터뜨리고 물만두를 먹고 빨강내복과 빨강양발을 신어 악귀를 쫓는 풍습이 있습니다. 한편 북한은 우리처럼 3일동안의 설 연휴를 지정해 즐기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제 곧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번 설에도 전 국민의 절반이나 되는 2000여 만명이 고향을 찾아 몰려 갈 것이니 고속도로, 철도 할 것 없이 전국의 도로는 또 다시 차량홍수로 넘쳐 날 것입니다.

온종일 하늘을 날던 새들도 해가 지면 둥지를 찾아 들고 산과 들을 헤매던 짐승들도 제 굴로 돌아가듯 인간들도 때가 되면 저를 낳아 준 고향 산천, 부모 형제를 찾아 가는 것입니다. ‘귀소본능(歸巢本能)’인 것이지요. 벌써 고향에서는 객지의 혈육들을 기다리고 자식들의 마음은 이미 고향에 먼저 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모두 정겹고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그런데 세월 따라 설날 풍습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참으로 아쉬운 것은 조상에 대한 효사상은 물론 웃어른에 대한 경로사상, 이웃사랑이 예전보다 많이 퇴색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명절의 의미는 조상을 기리고 경로효친의 정신으로 온 가족이 힘께 새해를 즐겁게 맞이한다는데 본뜻이 있습니다.

지난 시절 설날이면 젊은이들은 물론 조무래기 아이들까지 모두 온 동네 집집마다 어른들을 찾아 일일이 세배를 드리고 덕담을 듣던 일이 이제는 옛날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사는 형편은 어려웠지만 그 때는 사회공동체로서 그것은 도리였고 미풍양속이었는데 이제 그런 모습은 찾아 볼 수조차 없으니 시절의 무상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으로 살면서 왕래는커녕 옆집 사람이 누구인지, 이름조차 모르고 사는 오늘날 도시의 비정한 세태를 보노라면 개인주의에 이기주의까지 가득 팽배해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뜻 깊은 명절을 맞고도 함께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남들이 모두 고향을 향해 달려가건만 그렇지 못한 이들, 그들은 명절이면 오히려 더 외롭고 쓸쓸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야할 고향은 있으나 가지 못하는 이산가족들이 그렇고 사정이 어려워 귀성을 포기한 이들 또한 그렇습니다. 의지할 데 없는 노인들이 그렇고 보호시설의 부모 없는 어린이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생활보호 대상인 극빈층의 설은 또 어떻겠습니까.

회사가 어려워 밀린 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 이역만리 해외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 또한 가족이 그립기는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국토방위를 위해 설한풍 몰아치는 혹한의 전선 고지에서, 해안초소에서 밤을 지새우는 군장병들, 그리고 국민의 안녕질서를 위해 고생하는 경찰관, 소방관들, 또 음지에 있는 많은 이들이 모두 그러할 것입니다. 이들에게 설날은 오히려 더 힘든 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으로 나마 그들에게 위로를 보내야 하겠습니다.

바라건대 어서 빨리 통일이 되고 골고루 잘 사는 나라가 되어 아름다운 전통도 이어가고 모두가 다 즐거운 그런 설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어려운 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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