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읽기 (3)

전통적으로 플라톤 이래 反민주주의자들은, 민주주의는 그것이 고대 아테네적인 인민자치를 의미하든, 모든 시민이 동등한 대표권을 갖는 대의체제를 의미하든, 종국에는 노동자나 빈민과 같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에 의한, 그리고 그들을 위한 혁명적 독재정권을 가져오고, 그로 인한 분쟁으로 무정부적 혼란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모국인 프랑스에서 자코뱅의 공포정치와 그 이후의 정치적 혼란을 경험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은 민주주의가 그렇게 귀결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한 미국의 사례를 직접 목격한 그는 미래의 민주주의의 진정한 폐해는 그러한 독재나 파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무질서 상태는 민주시대에 두려워해야 할 첫 번째 해악이 못되고 가장 하찮은 해악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평등의 원리는 두 가지 경향을 야기하는데, 그 하나는 인간으로 하여금 곧바로 독립 상태로 이끌면서 무질서 상태로 몰아넣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예 상태에의 길을 열어놓게 되기 때문인데, 이 노예 상태로의 길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잘 모르게 나타나는 것이긴 하지만 확실한 것이다. 국민이 전자의 경향에 대하여는 잘 알고 이에 저항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경향에 대해서는 그것을 인식조차 못하고 끌려가게 된다. 그래서 이것을 밝히는 일이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현대인에게서 똑같이 해로운 두 가지 상반된 관념을 발견하게 된다. 일부 사람들은 평등이 야기하는 무질서 경향 이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찾아내지 못한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유로운 행위를 염려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두려워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수는 적지만 보다 각성된 사람들인데, 그들은 평등의 원리로부터 출발하여 무질서상태로 끝나는 앞의 논리와 달리, 이들은 인간이 종국적으로 노예상태로 들어가는 필연적인 길을 찾아냈다. 그러나 이들은 자유로운 상태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고 통치자에게 복종할 준비를 마음 속으로 갖추고 있다. 전자는 자유를 위험한 것이라고 포기하고, 후자는 자유를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토크빌은 민주주의의 진정한 폐해는, 소란스럽고 불안한 독립 상태․자유의 남용․무정부 상태가 아니라 조용하고 안정적인 노예 상태․자유의 포기․자발적 복종의 상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 이전의 민주주의에 대한 전통적 사고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민주혁명은 프랑스적인 무질서와 혼란의 공포에서 벗어나 미국적인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체제로 진화하게 될까요? 어떻게 시민들은 민주체제하에서 자유와 독립을 스스로 포기하고 복종과 노예의 상태를 선택하게 될까요?

로베스피에르(1758-1794), 자코뱅당의 지도자로 공포정치를 이끌다가, 테르미도르 쿠데타로 체포되어 그 자신도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전혀 새로운 민주주의의 미래를 그리다

토크빌은 근대 시민혁명은 처음에는 무질서와 혼란을 가져올 수 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하면 민주체제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민주체제하에서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적 평등화(그가 여기서 말하는 평등은 신분상의 평등을 의미할 뿐입니다)가 지속되면, 1) 개인들은 사적․경제적 이익추구에만 열중하여 공적 관심과 정치적 참여는 점점 쇠락하게 되고, 2) 사회는 이익 추구를 위한 안정과 질서를 열망하는 시민들로 인하여 점점 보수화 되는 한편, 평등에 대한 집착으로 사회의 여러 가치관․성향․기호는 다수의 그것으로 획일화 되고, 3) 정치는 시민들의 안정과 질서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권위적으로 변모하고, 시민들의 욕망과 복지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그 권력과 기능이 계속적으로 확대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민주화․평등화가 지속되면 민주정체는 결국, 시민들은 자유와 비판 정신을 포기한 채, 안정과 물질적 욕망 충족을 위하여 점점 정부에 의존하는 나약한 노예나 동물이 되고, 정부는 그러한 시민들을 억압하고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을 어버이처럼 보호하고 목자(牧者)와 학교 선생처럼 양육하는 ‘민주적 전제(democratic tyranny)’로 귀결될 것이라고 예견합니다.

(민주정체에서) 다수는 사실적인 동시에 윤리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 권력은 행동뿐 아니라 의지에도 작용하고 모든 도전뿐 아니라 모든 토론까지도 억압한다……다수는 사상의 자유 둘레에 엄청난 장벽을 세운다. 이런 장벽의 한계 안에서 작가는 자기 좋을 대로 쓸 수 있지만, 그 한계를 넘을 경우 그에게는 재앙이 올 것이다. 화형을 당할 위험에 처한 것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비방과 박해를 받아야 한다……그는 마침내 굴복하고 진실을 말했던 것을 후회나 하는 것처럼 침묵 속으로 가라 앉는다……(군주정과 반대로) 민주공화정에서는 신체는 자유스럽게 내버려두지만 영혼은 얽매인다……이런 나라들에서는 다수의 권력이 너무나 절대적이고 막강하기 때문에 개인이 다수가 규정해놓은 궤도를 이탈하려 한다면, 시민으로서의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또한 인간으로서의 자질을 거의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민주국가의 역사에는 아주 위험스러운 국면이 있다. 그들에게 물질적인 쾌락에 대한 욕구가 교육이나 자유제도에 대한 경험보다 더 빨리 증대될 때는, 인간은 그들이 곧 획득하게 될 새로운 소유에 도취되어 자제심을 완전히 잃는 때가 도래할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너무 초조해진 나머지 개인의 사적인 재산과 공공의 번영 사이에 존재하는 긴밀한 관계를 보지 못하게 된다……정치적인 의무의 이행은 그들에게는 오히려 귀찮은 방해로 생각되는데,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직업과 업무에 전념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시민들이 공공업무에 종사할 생각을 갖지 않을 때, 그리고 여가시간을 공적 의무에 바치려 하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게 될 때, 정부의 자리는 말하자면 공석이 된다. 이처럼 심각한 순간에 어떤 유능하고 야심적인 인물이 최고통치권을 장악하게 되면, 그는 권리침해의 길을 찾아낼 것이다. 만약 그가 얼마간 국가의 물질적 번영에 신경을 쓰기만 하면, 더 이상 그에게 요구되는 바가 없을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공공안녕을 유지해야만 한다. 물질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열정에 빠진 사람들은……무정부상태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그들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은 소유가 일어나자마자 그들이 누리는 자유를 포기해버릴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다……질서유지 이외에는 아무 것도 정부에 요구할 것이 없는 국민이 있다면, 그는 이미 정신적인 노예이자 동시에 자기 자신의 행복의 노예이며, 그는 단지 자기를 구속할 사람만을 기다릴 뿐이다.

만약 현대의 민주국가에 폭정이 실시된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게 될 것이다. 즉 보다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면서 동시에 유연한 형태를 취할 것이다. 인간을 가혹하게 다루지 않으면서 품위를 떨어뜨릴 것이다……현대인의 사소한 열정, 온유한 생활태도, 광범위한 교육열, 순수한 신앙, 유순한 도덕성, 규칙적이고 근면한 관습, 항상적인 자제심 등을 생각해볼 때, 나는 현대인이 폭정에 직면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은 들지 않고 오히려 통치자가 그들의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정부를 가지게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그런 권력은 절대적이고, 사소한 점까지 배려하며, 질서정연하고, 신중하고 점잖다. 그 권력은 양친의 권력과 흡사하다……그 권력은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고 그들의 오락거리를 제공하고 그들의 주요관심사를 처리해주고 그들의 산업 활동을 지도하고 그들의 계약을 위한 규칙을 제정해주고 그들의 상속재산을 분배해준다. 급기야 그 권력은 사람들에게 사고의 부담과 삶의 걱정마저 전적으로 없애주니 더 이상 무엇이 남겠는가?…… 그런 권력은 사회전반을 사소하고 복잡하면서도 획일적인 작은 규칙들의 그물로 엮어……시민의 의지는 분쇄당하지 않지만, 약화되고 굴절되고 종속 된다. 이러한 권력은 시민을 억압하거나 강제하지 않고, 다만 시민들을 방해하고 제약하고 나약하게 하고 질식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래서 결국은 시민들은 겁 많고 열심히 일하는 동물들로 전락하고 정부는 그 목자(牧者)로 군림하게 된다.

근대 시민혁명에 관한 책들, 장 마생의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은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프랑스 대혁명 시대를 그리고 있고, 노명식 교수의 << 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1789-1871>>는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1830년 7월혁명, 1848년 2월혁명,1871년 파리코뮌까지의 프랑스의 역사를 개관하고 있고, 데이비드 파커의 << 혁명의 탄생>>은 16세기 네덜란드 혁명, 이후의 영국 혁명, 프랑스 혁명, 미국독립전쟁에서 1989년의 소련의 탈공산혁명까지 근대 유럽의 좌우익 혁명을 망라하고 있다.

민주적 전제를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토크빌은 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이러한 경향을 갖고 있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전제정치로 빠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것이 필연이었다면 ≪미국의 민주주의≫를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토크빌은 신생 미국에 이러한 민주적 전제를 조장하고 촉진하는 경향과 전혀 상반되는 제도, 습속, 정신도 존재한다고 보고, 민주적 전제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것들을 보완하고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토크빌은 민주적 전제로의 흐름을 막을 수 있는 제도와 실천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 보장을 위한 신문(언론)의 활성화, 사법부의 권한 강화, 법치주의의 강화, 시민들의 이기심의 완화와 공공정신의 발양을 위한 종교와 교육의 강화, 시민사회내 결사체의 확대와 강화, 중앙집권화 경향의 억제(행정권의 분산)와 지방자치의 활성화 등을 제안합니다. 그의 제안의 요지는 민주주의를, 자유주의적 제도(예컨대 신문의 활성화, 권력의 분산, 사법권과 법치주의의 강화 등)와 공화주의적 실천(시민정신의 함양, 결사체의 강화, 지방자치의 활성화, 법치주의의 강화 등)으로 제약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토크빌이 제안하는 제도와 실천의 대부분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교과서적인 것들입니다. 다만 특이한 것은 그가 ‘결사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은 개인과 국가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 집단이나 결사체에 대하여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 그들은 근대 시민혁명으로 가문, 교회, 길드, 지역공동체 등의 중간 집단들을 해체되거나 현저히 약화시켰습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중간 집단의 존재와 가치를 중요시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중간집단은 시민사회내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훌륭한 버팀목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토크빌은 미국에서 자발적인 중간 집단이나 단체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며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들 결사체들이 봉건 사회의 귀족계급이나 길드가 담당하였던 긍정적 역할(국왕에 대한 견제, 소수자의 보호, 자유와 재산의 보호, 시민 교육 등)을 민주사회에서 훌륭히 대행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습니다.

귀족주의 시대에 개인의 독립을 보장하는데 가장 공헌한 것은 바로 최고의 통치권자가 그 사회의 정치와 행정을 독점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러한 기능을 귀족계급이 담당하였다. 그래서 통치권은 항상 분산되었고 억압적이지 않았고, 개인에게도 크게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오늘날에는 이러한 방법에 의지할 수 없지만, 이것을 대체할 수 있을 만한 어떤 민주적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 귀족이나 길드로부터 빼앗은 모든 권력을 정부에만 맡기지 않고, 그 일부를 개인 자격의 시민들로 구성된 중간 집단에 맡길 수 있는 것이다……개인 자격의 시민들이 서로 결합함으로써 귀족계급과 유사할 만큼 거대한 부와 영향력과 세력을 지닌 조직체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방법에 의해 귀족주의가 지닌 가장 훌륭한 장점 중 많은 것이 아무런 불의나 위험을 수반하지 않고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상업적 공업적 목적을 위한 결사나 심지어 과학적 문학적 목적을 위한 결사가 사회의 강력한 구성요소가 될 것이다. 이러한 단체는 그 구성원들이 각성되어 있으므로 통치자가 마음대로 다룰 수 없으며, 만약 탄압을 받으면 반드시 항의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사가 정부의 탄압에 저항하면서 자신들의 권리를 방어함으로써 그 나라의 일반적인 자유를 수호하게 될 것이다.

루이 나폴레옹(1808-1873), 나폴레옹 황제의 조카로 1848년 2월혁명으로 제정된 헌법에 의하여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이후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나폴레옹 3세)가 되었다. 말년에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71)에서 패하여 포로로 잡히기까지 하였다.

토크빌의 민주주의의 경향과 미래는 실제 맞았는가?

개인주의, 이기주의, 경제주의, 평준화, 속물화, 획일화, 보수화, 정부의 권위주의 심화, 정부 기능의 확대……이는 토크빌이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발생하거나 강화될 것으로 묘사하는 여러 경향들입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한 그의 추론은 상당히 그럴듯해 보이고, 일견 현대 대중민주주의 시대를 예견한 것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들의 많은 부분은 민주주의와 필연적으로 연관된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경향 중 어떤 것은 민주주의 이전부터 존재하던 것이고, 어떤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른 원인으로 강화된 것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민주주의가 아닌 체제에서도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상업 정신은 민주주의적 사고가 시작되기 훨씬 전인 15-6세기경부터 시작된 것이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민주주의 이전에 있었던 자유주의의 산물로, 돈과 축적에 대한 집착은 민주주의 보다는 자본주의의 산물로 설명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고, 속물적 경향과 보수적 심성은 민주주의 체제뿐만 아니라 모든 체제의 시민들에게 공통된 것이기도 합니다.

‘민주주의는 상업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와 동일한 것이다’ 라거나 ‘민주주의는 이러한 것과 필연적으로 병행하는 것이다’ 라고 한다면 토크빌의 주장이 옳을 수 있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토크빌의 판단은 심각한 오류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의 우리는 민주주의는 상업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 등과 서로 다른 개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이러한 상업주의 등과 필연적으로 병행되어야 하는 것도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특히 현대에 들어서는) 민주주의는 토크빌이 말하는 경향들 예를 들면 자본주의나 속물화, 보수화 대한 저항적 지표로 호명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경향성에 대한 분석상의 오류를 제쳐두고라도, 민주주의는 결국 ‘민주적 전제’로 전락할 것이라는 토크빌의 예견은 과연 맞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많은 학자들은 토크빌의 민주적 전제는 20세기 전반기에 나타난 독일․이탈리아의 전체주의와 세계대전 이후 확산된 제3세계 권위주의 체제의 전조를 예견한 것이라고 높이 평가합니다.

이것도 일견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일반적인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역사를 보면 민주주의가 견고하고 성숙한 나라일수록 시민들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가 더욱 잘 보장되었으며, 시민들의 정치참여와 비판 정신도 증대되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나라일수록 전쟁 테러 공황 등의 위기 상황에서도 굳건하게 민주주의를 유지하였습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파국을 맞거나 전체․권위주의 체제로 전락한 국가는 실제로 민주주의를 도입한 지 얼마 되지 않거나 제대로 성숙하지 못한 나라들이었습니다.

토크빌이 말한 민주주의의 여러 경향과 암울한 미래는 그럴듯하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기본적인 분석상의 오류를 갖고 있고 실제 역사도 그의 추론과는 정반대로 진행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토크빌이 말한 여러 경향들은 민주주의의 심화와 평등주의적 심성의 확산의 결과로 모두 포섭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또한 그가 말한 암울한 미래는 민주국가의 귀결이 아니라 오히려 非민주국가의 귀결이었습니다.

코미디 같은 실제 역사를 미리 말해드릴까요? 나중에 정치인이 된 토크빌은 1848년 프랑스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와 평등을 요구하는 노동자와 민중들의 시위가 확산되자, 자신의 자유주의적 신념을 저버리고 독재자적 성향이 풍부하였던 루이 나폴레옹(Louis Napoleon, 1808~1873)에게 귀의하여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그의 독재정권 수립에 기여하게 됩니다. 전제정치로 귀결된 것은 그가 비판하던 민주주의가 아니라, 그 자신이었습니다.

토크빌의 처방은 민주적인가

결론적으로 본다면, 혁명적 민주주의건 이후의 안정적이고 보수화된 민주정체(민주적 전제)건, 민주주의에 대한 토크빌의 처방의 핵심은 자유주의적 전통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많은 후학들은 토크빌이 민주주의에 대한 처방으로 내놓은 자유주의적 제도와 가치(언론과 결사의 자유 확보, 자치영역 확대, 권력 분산, 사법부 강화, 시민들의 이기심 완화와 법치주의와 공공정신 함양을 위한 교육 강화 등)는 현재 민주주의의 자유주의적 기초 내지는 전제를 역설한 것이라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토크빌이 말한 여러 처방들은 현대 민주주의의 자유주의적 기초(전제)들인 것은 사실입니다. 정치적 자유, 시민의 정치참여 권리, 권력의 분립과 견제, 법치주의 등과 같은 자유주의적 전통에서 유래하는 권리와 제도들이 보장되어 있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은 토크빌이 진정으로 의도한 것일까요?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처방은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위한 고언(苦言)이었을까요? 아니면 그의 처방이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전제 조건들과 우연히 일치한 것에 불과할까요? 아니면 그의 처방은 (그가 꿰뚫어 본 미국의 헌정질서의 민주적이면서도 反민주적인 모순처럼) 외형은 민주적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질은 反민주적 욕망을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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