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하며>

행복에 대하여

 

주어진 삶을 사랑하고
욕심내지 말고 늘 감사하고
단순하고 건강하게 사는 삶,
그것이 곧 행복이다.

행복은 내 마음 속에 있다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어 한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의 '만종(晩鐘)'은 프랑스가 자부하는 불후(不朽)의 걸작입니다.

저녁노을이 물들어 가는 들녘에서 가난한 부부가 머리 숙여 기도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멀리 마을 교회당에서 들려오는 은은한 종소리가 아련히 귓가에 맴도는 듯 착각마저 갖게 합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수확을 안겨준 하늘에 감사하는 소박한 부부의 평화롭고 고즈넉한 모습은 “인간의 행복이란 바로 저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을 금치 못하게 해줍니다. 

동서고금(東西古今), 지구상에 인류가 있은 이래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소망해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행복한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인간의 행복은 통치자들이 한결같이 추구하는 치세(治世)의 궁극적인 이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행복이 무엇이기에 모든 인간이 행복을 이야기하고 행복해 지기를 염원하는 것일까.

하루 일과를 마친 부부가 저녁 노을이 물든 들에서 기도하는 밀레의 걸작 ‘만종.’

국어사전을 보면 ‘행복’은 ‘복된 좋은 운수’,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행복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때그때 느끼는 좋은 일과 어떤 것에 대한 만족, 기쁨, 흐뭇함의 다른 표현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일’이 있기를 날마다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횡재(橫財)를 바라는 사람은 복권이 당첨되기를 갈망하고 취업을 원하는 구직자는 좋은 직장에 입사하기를 고대합니다. 좋은 배우자를 찾는 젊은이는 짝을 찾아 헤매고 자녀를 둔 어머니는 좋은 학교에 합격시켜달라고 기도하고 절합니다.

갖고 싶은 것을 갖고, 하고 싶은 일이 이뤄지듯 욕망을 이루면 기뻐하고 만족하고 흐뭇해 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그것이 곧 사람들이 바라는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성취하고 갖고 싶은 것을 갖는 일이 쉽지도 않을 뿐더러 설령 그것들이 이루어 진다해도 그 기쁨과 만족감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탈 벤 샤하르(Shahar)교수는 ‘행복학’의 세계적 권위자입니다. 그의 ‘행복학’은 예일대 셸리 케이건(Kagan)교수의 ‘죽음(Death),’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Sandel)교수의 ‘정의(Justice)’와 함께 아이비리그의 3대명강의로 꼽힐 만큼 유명합니다. 

그의 ‘행복학’은 하버드생의 약 20%인 1400여명이 수강을 할 만큼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합니다.

샤하르 교수는 베스트셀러가 된 저서 '해피어(Happier)'에서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본능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서 “모든 인간은 행복할 권리가 있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거운 일을 하고, 좋은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지금 하는 것에서 행복을 얻고 삶에서 의미를 찾으라”고 권합니다.

그는 네 가지 유형의 사람을 비교합니다. 현재의 즐거움이 곧 행복이라는 쾌락주의자,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성취주의자, 현재도 미래도 없는 허무주의자, 그리고 현재의 즐거움이 미래의 성공과 직결되는 행복주의자입니다.

이 넷 가운데 우리 사회는 거의 모두 ‘성취주의자’가 되라고 입을 모읍니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밤새워 공부하고 취직하기위해 더욱 애써 노력하고 승진하기 위해, 집을 사기 위해, 내일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참고 인내하라고 독려합니다.

그렇지만 샤하르 교수는 “인생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역설합니다.

그는 “산을 오르는 사람이 오직 정상에 오르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면 그것은 행복한 삶이 될 수 없으며 정상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오르면서 즐거움을 누리며 걷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잊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어렵고 가난한 삶, 보잘 것 없는 일을 하는 사람도 부자보다 그 누구보다 더 의미가 있을 수 있으며 즐거움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행복이라는 단어는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을 수도 없는 실체가 없는 허상(虛像)인 것입니다. 

말이 좋아 행복이지, 그것은 신기루(蜃氣樓)같은 것입니다. 멀리서 아름답게 눈에 보이는 여름날의 무지개, 북극의 오로라와 다를 게 없습니다. 행복은 자기만족이고 다분히 주관적인 것일 뿐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녔다는 철학자 시노페의 디오게네스(Diogenes)가 거리 구석에 누워있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시종들과 함께 그를 찾아가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들어 주겠다”고 말합니다. 디오게네스는 “내가 지금 필요한 것은 대왕이 옆으로 비켜주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대왕이 햇볕을 가려 그늘이 지었던 것입니다. 이 철학자에게 필요한 것은 지위나 명예가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햇볕이 곧 ‘행복’이었던 것입니다.          

앙드레 지드의 ‘배덕자’에 보면 ‘강한 자에게는 강한 자의 기쁨이 있고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의 기쁨이 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행복이란 같은 조건일지라도 사람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하려면 우선 정신과 육체가 건강해야 합니다. 자기만족이 행복이라고 해서 알콜 중독자나 마약 복용자를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 정신이상자가 달을 보고 웃는다고 행복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최근 한 재벌부부의 불화(不和)를 보면서 행복은 부와 명예가 있다고 해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딸과 재벌 회장이 만났으면 응당 행복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아니, 행복은커녕 결혼 생활이 고통의 세월이었다는 고백에는 더욱 놀라울 뿐입니다. 개인이 걱정할 일은 아니겠으되 안쓰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행복이란 가벼이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남의 불행은 말하기 쉬워도 행복은 결코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이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이 정답은 아닌 것입니다. 불교지도자 달라이라마도 “행복은 뉴욕의 고급 벡화점에서 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결국 사람의 행복이란 주어진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삶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리고 욕심내지 않고 매사에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 단순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 그것이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디오게네스는 말했습니다.

행복은 저 산 넘어 어디엔가 있는 파랑새가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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