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읽기 (2)

근대의 새로운 사회경제적 지배계급과 정치엘리트들은 기존의 봉건체제와는 다른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축하여야만 했습니다. 새로운 체제의 기본적 지표는 ‘민주적이되 민주적이지 않은’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근대 시민혁명에서 선포한 인민주권,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반영하되, 지배계급과 엘리트들에 의하여 운영되는(≪페더럴리스트 페이퍼≫의 저자 중 한명인 해밀턴의 말처럼 “지주, 상인, 지식인들만으로 대표기구가 구성”되는) 체제여야 했습니다.

민주적이되 민주적이지 않아야 한다? 근대의 지배계급과 엘리트들이 이러한 모순적인, 이율배반적인 체제 구축의 위기에 봉착했음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였던 정치사상가가 바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입니다. 그리고 그는 혁명과 독재 그 이후의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모국 프랑스와 달리, 신생 미국이 안정적 헌정질서를 구축한 것을 보고는, 신생 미국의 정치엘리트들이 이러한 근대 체제 구축의 위기적 상황에서 탁월하고 결정적인 해답을 찾아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있는 신생 미국의 정치엘리트들.

신생 미국, 근대 체제 구축의 위기에 해답을 찾아내다

≪페더럴리스트 페이퍼≫ 읽기에서도 언급했듯이, 식민지 모국이었던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신생 미국은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하는데 최상의 환경을 갖고 있었습니다. 토크빌도 ≪미국의 민주주의≫의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민주정체 수립에 유리하였던 미국의 물리적 환경과 습속(정치문화와 시민문화), 시민정신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분쟁과 전쟁이 일상화된 유럽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가까운 거리에 그들을 위협할 만한 강력한 국가도 없었고, 광대한 영토와 풍족한 자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행운은 그런 지리적, 물리적 여건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근대 유럽의 진보를 가로막는 군주와 귀족계급을 갖고 있지 않았을 뿐더러, 시민들은 이민과 개척, 청교도, 상업과 무역업의 융성으로 자유와 평등의 정신이 넘쳐났고, 식민치하에서도 타운회의 등을 통하여 자치경험을 누적하여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고, 군주국이었던 모국의 식민정책에 반발하여 자유과 독립을 내걸고 투쟁하였던 신생 미국의 엘리트들은 당대 유럽의 엘리트들보다 훨씬 진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귀족계급의 사회경제적 특권이 없는, 모든 시민이 자유롭고 평등한 지위와 권리를 갖는 시민사회를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정치사회는 그것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정치사회에서도 모든 시민이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갖는다면(온전한 민주주의 체제가 이루어진다면), 사회의 절대다수인 빈민계급이 그들의 수의 힘을 이용하여 소수자를 압박하고 부유층의 재산을 강탈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민주주의는 그것이 고대 아테네적인 인민자치를 의미하든 아니면 근대적 대의체제를 의미하든, 언제나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한 국가에서 약 1,000만 명의 국민이 부유하든 가난하든 어떤 정책 결정을 위해 한 자리에 모인다고 상상해보자. 토지나 집 혹은 기타 개인적인 사유재산을 가진 자들은 그중 100 혹은 200만 명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만약 모든 사항들이 다수의 투표에 의해 결정되어야만 한다면……사유재산을 갖지 못한 800 혹은 900만 명의 다수는 100 혹은 200만 명의 소수가 가진 사유재산을 찬탈하려 할 것이다……다수는 우선 가난한 자들의 부채를 모조리 탕감하고, 세금은 부유한 자들에게 더욱 무겁게 부과하고 가난한 자들은 세금을 아예 내지 않게 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들을 투표에 따라 완전히 공평하게 나누자고 요구할 것이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되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되겠는가? 게으른 자들, 사악한 자들, 무절제한 자들은 모두 낭비와 도락에 빠져들어 자신들이 나누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치운 뒤, 그것을 사들인 자들에게 다시 새로운 분배를 요구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이념이 사회에서 인정되는 순간 ‘사유재산’은 더 이상 신성하지 않은 것이 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법과 공공의 ‘정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무정부 상태나 참주정이 시작될 것이다.

이는 미국 독립과 건국의 주역으로 2대 대통령을 지낸 존 애덤스(John Adams, 1735-1826)의 말이지만 근대 지배계급과 엘리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애덤스의 말처럼, ‘정의’(때론 이것을 자유, 이성 등으로 표현)와 ‘사유재산’(때론 이것을 기득권, 문명 등으로 표현)을 항상적으로 지속적으로 위협하는 위험한 것입니다. 똑같은 논리는 토크빌에게서도 보입니다. 그도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두려움을 공유하고 있었고, 민주주의의 위험성은 그것이 대의체제라고 하여 근본적으로 달라지 않는다고 보고, 민주주의라도 정의와 사유재산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결코 가난한 사람들이 입법권을 전횡할 수는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보통선거제가 수립된 곳에서는 어느 곳에서든지 다수가 틀림없이 입법권을 행사한다는 점은 당연하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이 언제나 다수를 이룬다는 점이 판명된 경우, 그들이 선거권을 가진 나라들에서는 그들이 입법권을 전적으로 보유한다는 점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그러므로 사실상 보통선거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회에 대한 통치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국민이 정치적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생각은 온당하지 못하고 타파할 만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모든 권위는 다수의 의지에서 나온다고 나는 주장했다. 그렇다면 나는 스스로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인가? 정의의 이름을 지닌 일반적인 법률은 특정 국민의 다수뿐 아니라 인류 다수에 의해서 제정되었고 또한 좋다고 인정받았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의 권리는 정의로운 것의 범위 안에서 머물고 있다. 하나의 국민은 사회전체를 대표하면서 그 사회의 법률인 정의를 운용할 권능을 가진 배심원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사회를 대표하는 배심원이 사회 자체보다도 더 많은 권력을 가져야 하는가? 그런 배심원은 사회의 법률을 집행하는데 지나지 않는다.……다수의 권력 자체는 무제한한 것이 아니다. 그 위에 있는 윤리계에는 인간성, 정의 및 이성이 있다. 또한 정치계에는 기득권이 있다.

민주주의의 ‘反민주적‘ 구축

이러한 근대 엘리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전혀 입증되지 아니한 본능적인 두려움은 그들로 하여금 온전한 민주주의(모든 시민이 동등한 선거․피선거권을 갖는 체제)를 포기하거나 유보하거나 유예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토크빌도 여타 근대 엘리트들과 마찬가지의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봉건제도를 무너뜨리고 군주정을 정복한 민주주의가 부유층 앞에서 꼬꾸라질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겠냐”며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적 흐름은 필연적․불가역적이라고 인정하고 있지만, 이러한 자신이 “정치적 권리의 행사를 즉각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토크빌과 같은 생각을 가진 근대 엘리트들에게 대안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민주적이되 민주적이지 않은 체제, 즉 민주정체에 反민주적 요소를 부과하여 외형적으로 민주적으로 보이되 실질적으로는 反민주적으로 운용되는 체제입니다.

이것은 현실의 민주정체를 부정하고 反민주적인 ‘혼합정체’를 구상한 고대 아테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내세웠던 혼합의 지표입니다. 그는 “제대로 혼합된 혼합정체는 민주정체의 요소와 과두정체의 요소를 모두 포함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그중 어느 쪽 요소도 포함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차이는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혼합이란 귀족과 평민계급의 사회적 차별과 위계에 따라 이들 간의 정치적 차별과 위계를 제도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대의 세례를 받은 신생 미국의 엘리트들은 시민사회내 차별과 위계를 인정할 수 없었고, 정치적 권위는 시민들의 동의에 기반을 두어야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도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정치권력(또는 주요한 정치권력)은 정치엘리트들이 보유하고 행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야만 민주주의의 폐해인 다수의 정치적 횡포를 예방할 수 있고, 시민사회의 정의와 재산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시민의 자발적 동의에 입각한 엘리트 위주의 정치체제, 민주적이되 민주적이지 않은 체제,  외형적으로 민주적으로 보이되 실질적으로는 反민주적으로 운용되는 체제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까요? 토크빌은 그러한 근대 체제 구축의 위기적 상황에서 신생 미국의 정치엘리트들은 탁월하고 유효한 해답을 찾아냈다고 보았습니다.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와 <<미국의 민주주의>>.

그들이 찾아낸 해답은

신생 미국의 정치엘리트들의 찾아낸 해결책은 인민의 정부를 구성하되, 정치에서 인민의 의사와 힘의 ‘직접성’과 ‘집중성’을 억압하고 제약하고 왜곡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체제를 주조하면서, 인민자치가 아닌 대의체제를 채택하고, 대의의 참여자(선거․피선거권자)를 제한하고, 대의기관을 3개로 분리하여 서로 견제토록 하고, 대통령과 상원의원을 간선토록 하고, 민주적 정당성을 전혀 갖추지 못한 대법원을 별도로 설치하고, 민주성이 결여되거나 부족한 보수적 상원과 대법원에 막중한 권한을 부여하여 시민의 대표기관인 하원을 견제토록 하였습니다(이에 대하여는 ≪페더럴리스트 페이퍼≫ 읽기 참조).

30여년 후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의 정치체제와 정치문화를 연구하던 토크빌은, 신생 미국의 헌정질서를 구축했던 정치엘리트들의 정치적 의도가, 독립전쟁으로 촉발된 인민의 민주화 열기를 억압하고, 인민(혹은 인민대표들)의 의사와 힘의 직접성과 집중성을 약화시키는데 있었음을 정확히 꿰뚫고 있습니다.

그들(미국헌법제정자들)은 모두 자유의 정신이 강력하고 지배적인 권위에 대항해서 끊임없이 투쟁을 벌이던 시기에 자랐던 것이다. 그 투쟁이 끝났을 때, 격정에 들떠 있던 군중들은 언제나처럼 더 이상 있지도 않은 위험성에 대하여 계속 싸움을 벌일 것을 고집하는 반면에 이들은 중도에서 멈췄다. 그들은 확연하게 달성되었다는 점과 아메리카가 이제 우려해야 할 위험은 자유의 남용 때문에 일어나는 위험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들은 열렬하고 성실하게 자유를 사랑했기 때문에 자기들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거침없이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파괴에 대해서 결연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서슴지 않고 제한조치를 제의했다. 대다수 주(州) 헌법은 하원 임기를 1년, 상원 임기를 2년으로 한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입법기관의 구성원들은 선거구민들이 바라는 것이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항상 급급하게 거기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이처럼 입법부가 지나치게 의존적이 되면, 대의제도의 주요한 성과의 본질이 변하는데 왜냐하면 그런 사태는 권위의 원천뿐 아니라 통치까지도 국민에게 내맡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고 합중국의 입법자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국민의 대표들이 자신의 판단을 행사하는데 더욱 자유로운 입장을 취할 수 있도록 임기를 연장시켰다. 주 헌법은 물론 연방헌법도 입법기구를 양원으로 나눴다……전제 사회의 힘을 입법기구의 단일한 수중에 집중시키는 것은 민주주의의 당연한 추세다……(그러나) 이와 같은 권력의 독점은 원활한 행정에 아주 해로운 동시에 다수의 독재에 유리하다. 과거 여러 나라의 입법자들은 흔히 이와 같은 민주주의적 경향에 굴복하고 말았지만 합중국의 창건자들은 끊임없이 그리고 용감하게 그와 같은 경향에 저항했다……주지사는 1년에 불과한 임기와 권력을 통해 전혀 권력을 보호할 수 없었다……(그러나) 연방헌법은 행정권의 모든 특권과 책임을 한 개인에게 부여하고, 대통령의 임기를 4년으로 했다……간단히 말해, 법률의 정해진 한계 안에서 행정권에게 강력하고 독립적인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결론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민주주의의 생존은 두가지 중요한 위험성 때문에 위협을 받는다. 즉 입법부가 선거구민의 의지에 완전히 굴복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입법부에 다른 정부권력이 집중되는 것이 나머지 하나이다. 다른 나라의 입법자들은 이런 폐해가 등장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합중국의 입법자들은 모든 힘을 다해서 그 폐해의 힘을 줄였다.

이처럼 입법기구를 양분했다고 해서 아메리카인들이 한쪽을 세습적으로 다른 한쪽을 선출하는 것으로, 한쪽은 귀족적으로 다른 한쪽은 민주적인 것으로 만들기를 바라지는 않은 것 같다. 어느 한쪽은 권력을 막는 방파제로 구축하고 다른 한쪽은 국민의 이익과 열정을 대변하게 하는 것도 그들의 목적은 아니었다. 현재의 양원제에서 기인하는 유일한 이점은 입법권의 분산이며, 또한 결과적으로 정치운동에 대해서 견제할 수 있다는 점이다. 

토크빌의 결론은, 신생 미국 헌정질서의 핵심은 인민(혹은 인민대표)의 직접성과 집중성의 억제에 있었다는 것이고, 그것이 민주적인 그러나 反민주적이어야 하는 근대 체제 구축 위기의 최상의 해결책이라는 것입니다. 

사법부, 근대의 새로운 귀족계급

미국의 헌정체제에 대하여 토크빌이 가장 감탄하고 극찬한 것은 ‘사법부’의 구성과 권한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가 감탄하고 극찬한 것은 그것의 민주성이 아니라, 이중삼중의  ‘反민주성’이었습니다.

미국 헌법제정자들은 연방대법원을 신설하며, 그 연방대법원 판사는 시민의 선거가 아닌 보수적인 상원의 인준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하여, 삼권중 하나인 사법권을 민주적 통제의 범위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더불어 그러한 사법부에 단순한 권리구제의 범위를 넘어, 의회에서 제정한 법률에 대한 위헌심사권한과 행정적 분쟁에 대한 결정권까지 부여하여 의회와 행정부를 견제할 막중한 권한까지 부여하였습니다.

미국 헌법제정자들이 이렇듯 입법․행정․사법의 삼권을 분리하면서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는 사법부를 구성하고, 그 사법부로 하여금 입법과 행정을 통제할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고, 사법부 스스로 입법행위와 정책결정까지 할 수도 있는 여지를 준 것은, 사법부를 인민의 통제에서 벗어나 귀족적으로 구성하려는 것이었고, 그것을 통하여 인민(혹은 인민대표)의 권력과 권한을 제약하려는 의도였습니다. 토크빌은 이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이를 극찬하고 있습니다.   

아메리카를 방문하여 그들의 법률을 고찰해보면, 그들이 사법관들에게 위임한 권한과 이들이 정부안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이 민주주의의 횡포를 가장 강력하게 막는 안전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법률가들의 성격에는 귀족들의 습관과 취향 일부가 보일 것이다. 법률가들은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질서와 형식을 본능적으로 애호한다. 그들은 대중의 행동에 대해서 똑같이 역겨움을 느끼고, 민주정부에 대해서 똑같이 은밀한 경멸감을 갖고 있다……법률가들이 당연히 차지하는 높은 지위를 저항 없이 누릴 수 있는 사회에서는 그들이 보이는 일반적인 정신은 두드러지게 보수적이고 反민주적일 것이다……법률가들은 민주제도를 전복하려 들지는 않지만, 민주주의의 본성과는 이질적인 방법에 의해서 그 진정한 방향으로부터 이탈하게 만들려고 언제나 노력한다……이와 같은 법률가적인 냉정성과 민주주의적인 원칙이 결합되지 않고서 민주제도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을지 나는 의문을 갖고 있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의 경우에는 법원이 요청받는 일은 사적 개인들의 분쟁만을 재판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대법원은 주권을 가진 권력들을 법정으로 소환한다. 대법원의 서기가 법원 계단으로 나아가 ‘뉴욕주 대 오하이오주’라고 말할 경우, 그 법원이 보통 기구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사건의 한쪽 당사자는 1백만을, 다른 한쪽은 2백만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그 판결로 그렇게 많은 수의 시민들은 만족시키거나 실망시키기도 하는 판사 한명의 책임의 막중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연방의 평화, 번영 그리고 생존 자체가 일곱 명의 대법원 판사들의 수중에 맡겨져 있다……그들은 민주주의 경박성을 견제하여 안정을 희구하는 보수정신을 옹호한다. 

근본적으로 反민주적으로 조직되고 구성원 내부에 보수적 성향이 충만한 사법부가 민주주의를 제약하여야 한다는 토크빌의 주장은 현대에 많은 문제가 되고 있는 ‘제왕적 사법부(Imperial judiciary)’를 연상케 합니다.

우리는 제왕적 사법부를 이미 경험하였습니다. 지난 2004년 민주적 정당성을 전혀 갖지 않은 우리의 헌법재판소는 국민의 손으로 선출된 대통령의 탄핵소추에 대하여 평결을 하였고,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제정한 ‘신행정수도 건설에 관한 특별조치법’의 위헌여부를 결정하기도 하였습니다.

프랑스의 1848년 2월 혁명의 모습, 프랑스는 1789년 대혁명 이후 안정된 정치체제를 구축하는데 실패하여, 그 이후 자코뱅 공포정치, 나폴레옹 쿠데타, 부르봉 왕조 복귀,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혁명,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 등 지속적인 격변을 겪었다.

민주주의의 문제는 독재와 파국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플라톤 이래 反민주적 정치사상가들은, 민주주의는 다수의 무지하고 가난한 빈민을 위한 독재정권으로, 소수의 자유를 억압하고 부유층들의 재산을 강탈할 것이고, 그에 반발하는 소수자, 부유층의 반발로 무정부상태의 혼란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신생 미국은 당대 유럽의 어느 국가보다 훨씬 더 많은 평등적․민주적 요소를 도입하여 자신들의 정체를 만들었습니다. 토크빌은 그러한 미국이 독재나 무정부상태로 전락하기는커녕 당대의 어느 국가보다도 안정적이고 평화롭게 발전해 나가는 것을 목도하였고, 그가 보기에 향후에도 그러한 독재정권이나 무정부적 혼란이 등장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습니다.

토크빌은 역사적 필연인 민주주의가, 미국에서 독재나 파국으로 흐르지 않고 안정적으로 효과적으로 정착한 것은, 신생 미국의 정치엘리트들이 인민의 정부,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되, 정치에서 인민의 의사와 힘의 ‘직접성’과 ‘집중성’을 효과적으로 억압하고 제약하고 왜곡하는 反민주적 정치체제를 구축하였기 때문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토크빌에 의하면 그것은 다수의 독재와 파국이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전통적인 우려를 ‘하찮은’ 기우로 만들 정도로 탁월한 해결책이었습니다. 결정적인 해결책은 아닐지 모르지만, 적어도 “정체의 지속은 대다수가 그 정체의 지속을 원해서가 아니라 다른 정체를 원하지 않는 데에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신생 미국의 민중들은 자신들의 민주적이며 反민주적인 정치체제에 충분히 만족하지는 않더라도, 그들이 프랑스 민중처럼 그러한 자신들의 정치체제를 뒤집어엎을 혁명을 선택할 가능성은 없어보였습니다.   

이처럼 민주적이면 反민주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한 신생 미국은 혁명, 독재, 파국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안정적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토크빌은 미국 건국 후 30여년이 지난 미국의 사회를 살펴보며,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새로운 경향이 생겨나고 있고, 그것이 향후 민주주의의 최대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反민주적 정치사상가들이 예견하던 혁명, 독재, 파국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그가 읽어낸 민주주의의 새로운 경향과 문제점은, 현대 우리사회의 모습과 폐단을 정확히 시사한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20세기 민주주의의 파국과 변질을 예견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독재와 파국이 아닌, 토크빌이 읽어 낸 민주주의의 새로운 경향과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에 대하여 그가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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