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매디슨 등의 ≪페더럴리스트 페이퍼≫ 읽기 (4)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의 공동저자 중 한명인 해밀턴(Alexander Hamilton, 1755/57∼1804)은 신생 미국의 헌법제정자들 중에서도 귀족주의적 성향이 농후한 대표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군주제와 세습 귀족으로 구성된 상원 제도를 인류의 가장 고결한 제도로 흠모하고 있었고, 신생 미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정치체제가 실현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이에 반하여 같은 공동저자였던 매디슨(James Madison, 1751∼1836)은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 미국의 3대 대통령)과 함께, 신생 미국에서 가장 민주적․진보적 사고를 가진 정치지도자였습니다. 해밀턴과 매디슨의 이러한 정치적 성향의 차이는 ≪페더럴리스트 페이퍼≫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페더럴리스트 페이퍼>>.

해밀턴 vs 매디슨

누가 연방의 대표들을 뽑아야 하는가? 부자들만도 그리고 가난한 자들만도 아니며, 학식있는 사람들만도 그리고 무식한 사람들만도, 명문가의 상속자들만도 그리고 불운하고 이름 없는 사람들의 비천한 자손들만도 아니다. 대표를 뽑는 사람들은 합중국 시민 전체이다. 그들은 모든 주에서 의회의 의원을 선출할 권리를 행사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 누가 대중의 선택 대상이 되는가? 자신의 고장의 존경과 신뢰를 믿고 당당하게 자신을 추천할 만큼 장점을 지닌 모든 시민들이다. 국민의 판단을 구속하거나 그들의 의사를 좌절시킬 수 있는 부, 출생, 종교, 직업과 같은 자격의 제한은 없다.

시민이 선출된 소수의 대표에서 정부를 위임한다면……선출된 집단의 지혜는 자국의 진정한 이익을 가장 잘 분별케 할 것이며, 그들의 애국심과 정의에 대한 애정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국가의 이익을 희생시키지 않을 것이다……모든 정치체제의 목표는 우선 그 사회의 공익이 무엇인가를 판단할 최고의 지혜와 그러한 공익을 추구하는 최고의 덕성을 지닌 사람들을 지도자로 확보하는 것이거나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매우 중요한 위임을 받을 사람을 선택하는데 시민들의 분별력이 작용해야 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이런 목적은 기존의 기구가 아닌 특정한 목적과 경우를 위해 선택된 사람들에게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또한 선거는 후보자의 자격을 분석할 수 있는능력을 가졌으며 신중하고 자신들의 선택을 좌우하는 모든 원인을 잘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어떤 계층의 감정과 관심사가 보다 잘 이해받고 처리되기 위해서, 대표기구에 그들 계층을 대표하는 구성원이 존재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국민들이 자유롭게 투표하도록 되어 있는 체제에서 그런 일을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체제에 대표기구는 예외없이 정부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지주, 상인, 지식인들로 구성될 것이다. 세 부류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시민계층의 이익과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돌보지 못하리라는 위험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시민들 돕는 지원자이며 자신의 명예를 지속시키기 위해 동료시민들의 선출에 의지해야 하는 그러한 대표들이 시민들의 성향과 경향에 대한 정보를 얻는 데 노력한다면, 당연히 시민들은 그의 행위에 적절한 영향력을 갖도록 허용할 의사를 갖지 않겠는가?……사회의 다양한 계층을 대변하는 이익과 의견의 자연스러운 작용에 의해, 그 수에 관계없이 대표들은 대부분 다른 모든 사회적 이익과 의견을 진실로 대표할 수 있는 지주, 상인, 지식인층으로 구성될 것이다.

위 인용문중 전 2자는 매디슨의 글이고, 후 2자는 해밀턴의 글입니다. 해밀턴은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에서 가장 많은 칼럼을 썼음에도 단 한번도 형식적으로라도(명분적으로라도) 매디슨과 같이 모든 인민이 평등한 선거․피선거권을 갖는다는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위 인용문들의 순서는 필자가 임의적으로 재편한 것이지만, 위 순서대로 읽다보면, 어떠한 음험한 흐름을 읽을 수 있습니다. 위 글들은 정치적 평등의 당위에서 정치적 탁월함의 요청으로, 탁월함의 명분에서 신분적․계급적 위계의 구축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역사도 그렇게 진행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림(再臨)

이러한 흐름은 정확히 아리토텔레스적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은 정치에서의 탁월함의 요청 → 탁월함의 재구성(있고 없음이 아니라 많고 적음의 차이로) → 이상적 정의로서 탁월함의 정도에 따른 비례의 원칙 → 현실적 대안으로서 과두와 민주의 혼합 → 구체적 방안으로서의 신분․재산과 선거의 활용이라는 순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탁월함의 요청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의 또 하나의 전제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말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은 정치적 참여와 행위를 통하여 완전한 이성적 존재가 되며, 그들 모두에 의한 결정(집단 지성)에 의하여 훌륭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자신의 민중과 민주주의에 대한 원초적 혐오감, 엘리트들의 탁월함에 대한 과신으로 인하여, 위와 같은 정치적 평등의 전제는 계속적으로 무시되고 왜곡되고 종국에 폐기되고 있습니다(이에 대하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읽기를 참조).  
그는 현실의 인민자치적 민주정체를 거부하고, 형식적인 정치적 평등의 전제 위에 신분과 재산을 비례적으로 반영하고 엘리트적 탁월함을 추출 혹은 생성할 수 있는 혼합정체를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그가 제시하는 혼합의 수단은 인민자치적인 민회의 권한 축소, 선거에 의한 대의제의 전면적 활용, 계급별 대의체의 별도 구성과 상호견제, 선거․피선거권의 신분적․재산적 제약 부과 등입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구상은, 신생 미국의 헌법제정자들을 매료케 했고, 실제 신생 미국의 헌정질서로 실현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신생 미국 헌법제정자들의 근본적인 의도는 정치에서 인민의 직접성을 제약하고 대표의 비례성을 왜곡하는데 있습니다. 먼저 정치권력이 다수 인민의 수중에 그대로 놓이는 것을 폐기하고 그 대신 대표(대의)체제를 수립하고, 그 이후 다수 민중의 의사가 비례적으로(그 數대로) 대표되는 것을 억제시키고, 신분과 재산이 대표되도록 대표절차를 왜곡시키고, 신분과 재산의 대표로 하여금 인민의 대표를 견제토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생 미국의 선거에 의한 대의정부, 선거에서의 재산적 제약, 대통령과 상원의 간선제도, 민주적 정당성을 전혀 갖지 않는 사법부의 설치, 3권의 분립과 상호견제 등은 바로 인민의 직접성을 제약하고 대표의 비례성을 왜곡하는 수직적․수평적 제도들입니다.

헌법제정회의 모습.

≪페더럴리스트 페이퍼≫ 이후의 매디슨

매디슨은 ≪페더럴리스트 페이퍼≫를 쓸 당시 다른 어느 정치엘리트보다도 민주적 사고를 가졌지만, 그도 자신의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다수 인민과 그들에 의한 민주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에서 그는 모든 인민이 동등한 정치적 참여권을 가졌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도 그대로 실천하지 않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도모하지도 않았습니다.

≪페더럴리스트 페이퍼≫ 저술(미국 건국) 이후 매디슨은 해밀턴과 결별합니다. 매디슨은 미국 건국과정에서 해밀턴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였지만, 이후 강력하고 권위적인 중앙정부를 구성하려는 해밀턴(이러한 주장하는 하는 정치엘리트들이 ‘연방당’을 구성함)과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됩니다. 해밀턴은 정적이었던 애런 버(Aaron Burr, 제퍼슨 정부하에서 부통령을 지냄)의 권총 결투신청에 마지못해 응했다가 비명횡사 하였습니다.

그러나 매디슨은 해밀턴보다 30여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 30년 동안 미국은 헌법제정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대중이 정치 무대의 전면에 진출하고, 정치적 토론과 경쟁이 점증하고 확대 되는 등 급속히 민주화가 진행되었습니다. 그 헌법제정 이후의 민주화를 상징하는 인물이 매디슨이기도 합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언론 출판의 자유의 확대, 외국인규제법과 보안법 폐지, 대중의 폭넓은 정치참여, 노예제 폐지 등을 요구하여 민주주의 확대에 기여하고, 제퍼슨과 함께 ‘민주공화당’(현재의 민주당의 전신)을 창당하여 정당정치의 초석을 놓았습니다(그는 제퍼슨 이후 미국의 4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헌법을 제정하고 ≪페더럴리스트 페이퍼≫를 쓸 당시의 매디슨은, 여느 정치엘리트들처럼 자신들의 공화정부를 다수의 무지한 인민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방안을 구체화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매디슨은 다수 인민과 그들에 의한 민주주의의 위험을 과대 평가하였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다수 인민과 민주주의에 보다 신뢰를 보내 참정권과 정치참여의 확대를 통한 다수 인민에 의한 통치가 “가장 덜 불완전한 정부”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또 하나의 변화는 정당에 대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떠한 자유로운 국가라도 정당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며 스스로 정당을 설립하여, 기존의 명사(名士)정치 시대에서 새로운 정당정치 시대로의 변화를 주도하였습니다.

그래서 달(Robert Dahl) 교수는 ≪미국헌법과 민주주의≫(원제는 How Democratic Is the American Constitution?)에서 이러한 차이점에 근거하여, 1780년대 헌법을 제정하고 ≪페더럴리스트 페이퍼≫를 쓰던 젊은 매디슨과 1820-30년대의 원숙한 정치인이 된 매디슨을 구분하며 매디슨의 다수 인민, 민주주의, 정당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달의 <<미국헌법과 민주주의>>.

매디슨의 전통적 고민, 그러나 전혀 새로운 해결책

원숙한(≪페더럴리스트 페이퍼≫이후의) 매디슨의 고민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전통적 고민으로, 모든 인민의 정치적 평등과 참여가 실질적으로 보장되고, 그들이 그 수에 따라 비례적으로 대표되는 온전한 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할 때 예상되는 폐해, 즉 인민들의 무지, 편견, 일시적 감정 등으로 인한 잘못된 정책이나 질서파괴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고, 둘째는 전혀 새로운 고민으로, 그러한 온전한 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할 때 효과적으로 그리고 탁월하게 정치를 수행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라는 점입니다.

 전자의 고민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일관된 고민이었습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는 ‘反엘리트적’인 것으로, 그래서 정치적 탁월함을 생성하거나 유지하지 못하는 체제로 이해하고, 또한 민주주의는 ‘反재산적’인 것으로, 그래서 기회만 주어진다면 부유층의 지위와 재산을 강탈하는 체제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고민의 해결책으로 민주주의의 폐지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는, 부유층들의 지위와 재산을 구조적으로 반영하도록 강제되고, 탁월한 지혜와 덕성을 갖춘 엘리트들에 의하여 지도되는 체제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추론은 역사적으로, 논리적으로 사실이 아님이 증명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민주정체를 수립한 민중들이 부유층의 재산을 강탈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어떤 군주, 귀족정체보다 오히려 민주정체에서 부유층들의 재산은 더 효과적으로 보호되었습니다. 또한 민주주의는 전혀 反엘리트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고대 아테네 민주정체에서도 페리클레스와 같이 정치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정치엘리트들은 항상 존재하였습니다. 어떠한 정치체제에서건 정치엘리트는 생성될 수밖에 없고, 그들은 막강한 정치권력 혹은 영향력을 갖습니다.

민주주의가 反엘리트적이지 않다? 민주주의는 엘리트주의와는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정치)엘리트와 상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트(elite)’와 ‘엘리트주의(Elitism)’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여기서 엘리트주의는 사회는 기본적으로 엘리트와 대중으로 구성된다고 보고, 정치적으로 유능한 엘리트가 전혀 무능한 대중을 자의적․일방적으로 지배하는 체제를 말합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혼합정체 주장, 고중세의 귀족중심체제, 근대의 부유층중심의 대의체제, 현대의 기술관료주의나 전문가주의 등은 모두 이에 포함된다고 할 것입니다. 달 교수가 ’후견주의 guardianship‘로 지칭하고자 하는 바도 같은 것입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정치엘리트가 현실적으로 없는 아니고 필요 없는 것도 아닙니다. 탁월한 정치엘리트의 필요성은, 오히려 모든 시민이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민주주의 체제일수록 더욱 크다고 할 것입니다.

플라톤 이래 엘리트주의자들의 오해는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무지하고 편협한 대중에 의한 정치로, 정치엘리트의 탁월함을 전혀 추출해 내지 못하거나 이를 말살하려는 정치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인민자치를 의미하건 대의민주주의를 의미하건, 항상 정치엘리트들 생성하였고, 더불어 엘리트의 선택 범위를 월등히 넓히고 선택된 엘리트에게 효과적으로 책임을 부과(선거와 같은 정치적 심사와 사법적 통제)하여 정치엘리트들의 탁월성을 어느 정치체제보다도 잘 추출하고 유지할 수 있었고, 그러한 탁월한 정치엘리트들에 의하여 민주정체는 어느 정치체제보다도 탁월한 정치적 결정을 해왔습니다.  

원숙한 매디슨은 전통적 정치사상가들의 다수 인민과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은 왜곡과 편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민주주의의 예상되는 폐해는, 전통적 사상가들처럼 민주주의의 폐지가 아니라,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민주주의를 더욱 강화함으로써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론 출판의 자유 확보와 외국인규제법과 보안법 폐지 주장 등 민주주의의 기초 확립에 매진하였던 것이고, 보통선거권의 실현과 대중의 참여를 통한 민주주의의 확대를 도모하였던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폐해는 오히려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확대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는 매디슨적(매디슨이 이런 말을 직접하지는 않았기에 ‘매디슨적’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사고는 가히 혁명적 발상의 전환에 해당합니다.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이견, 대립, 분파, 갈등, 시위, 분규는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을 당연시하고 민주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이것을 불온시하고 권위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반드시 더 큰 해악을 초래할 뿐입니다. 국가이념에 어긋난다고 하여 시민의 이견표출을 억압하고, 시민들의 시위나 노동자들의 분규가 국익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경찰력을 동원하여 막으려고 하고, 북한이나 테러 분자의 위협을 이유로 정보를 통제하고 일체의 교류를 제한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민주주의는 붕괴되고 권위주의 체제가 수립될 것입니다. 사상과 언론,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확대하고, 정보의 자유시장을 확립하고, 자유로이 이전하고 접촉하고 교류할 수 있는 권리를 확대할 때, 오히려 우리는 민주적 조정과정을 통하여 보다 탁월한 정치적 결정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매디슨.

정당, 새로운 민주주의를 위한 최고의 도구

앞서 지적한 것처럼 원숙한 매디슨은 근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당(party)’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민주공화당을 설립하여 정당정치 시대를 열었습니다. 원숙한 매디슨의 행보는 사실 ≪페더럴리스트 페이퍼≫ 속에서도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파벌(faction)’은 공동체의 단합과 번영을 방해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매디슨은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에서, 정치사회에서 파벌의 형성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파벌의 폐해(파벌의 非합법적․非민주적 음모와 파벌간의 극단적인 대립)는 오히려 파벌을 공식화하고 파벌의 외연이 대중적으로 지역적으로 확대될 때, 더 효과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사고합니다.

파벌의 해를 고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그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그 영향을 조정하는 것이다. 파벌의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은 다시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파벌의 존재에 필수적인 자유를 아예 없애거나 시민들 모두 같은 의견과 열정, 관심사를 갖게 하는 방법이다. 첫 번째 치료법은 질병 자체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있고……두 번째 방법은 실행 불가능한 것이다……파벌의 잠재적인 원인은 인간의 본성에 심어져 있고 그것은 시민사회의 환경에 따라 여러 행위에 반영되는 것을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다……따라서 우리의 결론은 파벌의 원인은 제거될 수 없고 오직 파벌의 영향을 조정하는 방법에 의해서 치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회가 작을수록 사회를 구성하는 이권과 정당의 수는 더 적을 것이다. 개별 정당과 이권 수가 적을 수록 더욱 자주 같은 정당에서 다수가 형성될 것이고, 다수를 구성하는 개인이 적을수록 그리고 그들의 관할구역이 적을수록 더욱 쉽게 그들은 전제의 계획을 모의하고 실행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관할 구역의 범위를 넓히면 훨씬 다양한 정당과 이권을 수용하게 된다. 그리고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고자 하는 다수의 공통된 동기를 더욱 불가능하게 만들고, 만약 그런 공통된 동기가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공감하는 모든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행동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파벌의 영향을 억제하는 데 있어서 공화국이 갖는 이점은 작은 공화국보다는 큰 공화국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근대국가의 가장 큰 특징은 인구적․지역적 광범위함과 신분적․계층적 다양함에 있습니다. 근대에 이르러 고대 아테네적 인민자치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고, 대의제는 이제 필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원숙한 매디슨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민주화가 진전이 되어 대의제에 신분적․재산적 제약이 사라져(비록 백인 성인 남성에 한정된 것이지만) 민주적인 대의제, 즉 대의민주주의 체제가 수립되어 갔습니다.

수많은 시민이 정치적 발언권을 가졌고, 비록 대표에 의해서이지만 수많은 시민이 정치적 참여권을 가진 새로운 근대에, 과연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정치적 결정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 체제는 저절로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정치적 결정을 산출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수학자였던 콩도르세(Condorcet)는 개인들이 올바른 결정을 내릴 확률이 51% 이상이면 시민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것이 누적되어 올바른 결정을 내릴 확률이 월등히 높아진다고 하여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치참여자, 참여범위의 확산은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정치적 결과를 담보하지 못합니다. 다수의 시민 혹은 다수의 대표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원자화 되고 파편화 되어 있다면, 오히려 비효과적이고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산출할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많은 정치학자들이나 20세기의 역사적 경험(시민들의 열렬한 또는 수동적 지지로 가능하였던 나찌정권이나 제3세계 군부독재정권)은, 콩도르세의 수학적 정리가 순진한 가정일수 있다는 것은 알려줍니다. 원자화 되고 파편화된 다수는 자신들의 의사와 이익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도 없고, 이를 정치적으로 결정하기 쉽게 정책으로 만들 수도 없고, 반대편의 불법적․反민주적 음모와 행태를 효과적으로 제지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선동가나 독재자에 의하여 군중과 신민으로 휘둘리기 십상인 것입니다. 비록 다른 주제(의원의 적절한 수)에 관한 문제에서였지만, 매디슨은 이러한 정치에서의 수(數)의 모순에 대하여 정확히 꿰뚫고 있습니다.

나의 판단으로는 매우 심각한 주의를 요하는 한 가지 의견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입법의회에서 의회를 구성하는 숫자가 많을수록 실제로 그 진행을 지도하는 사람은 더 소수라는 점이다. 첫째, 의회가 어떤 사람으로 구성되든지, 그것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이성보다 감정에 치우친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이고, 둘째 그 수가 많을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한정된 정보만 소유하게 되고 그들의 능력 또한 변변치 않을 것이다. 극소수의 웅변력과 수완이 그들의 힘과 결합되어 작용한다는 것은 정확히 이를 묘사한 것이다. 모든 국민들이 직접 참가하였던 고대 공화국에서는, 한 명의 연설가 혹은 교활한 정치가가 왕권을 그의 손에 쥔 것처럼 완전한 지배력을 휘두르는 듯 보였다. 같은 원칙에 근거하여,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에 대표자가 많을수록, 국민의 집단적인 모임에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결점이 더 많아질 것이다. 무지는 교활함에 속기 쉽고, 열정은 괴변과 열변의 노예가 되기 쉽다. 일정 한도를 넘어 대표들을 증가시킴으로써 그들이 소수가 지배하는 정부에 대한 장벽을 강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실수는 없다. 경험이 주는 교훈에 의하면, 그와는 반대로 국민들은 안전, 지역정보, 그리고 전체 사회에 대한 넓은 공감이라는 목적을 위해 충분한 수의 대표를 확보하지만 대표가 늘어감에 따라 자신들의 견해는 좌절될 것이다. 정부의 모양새는 더 민주화되겠지만, 정부를 활력있게 하는 정신은 더 과두화될 것이다. 정부조직은 확대되겠지만, 그 조직을 움직이는 사람은 더 소수가 될 것이며 때때로 더 비밀스러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광범위한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정치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매디슨은 그에 대한 해답을 정당제도에서 찾은 것입니다. 원숙한 매디슨의 정당에 대한 태도와 행보에 비추어 보면, 그는 정치에서 특히 근대적 대의민주정치에서 정당의 중요성을 인식한 최초의 정치사상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디슨은 파벌들을 공식화한 정당체계를 통하여, 지지자나 참여자의 의사와 이익을 결집시키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정치화․정책화할 수 있으며, 반대편을 감시하고 견제하여 반대편이나 독재자의 일방적 정치주도를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더욱이 시민사회와의 연계가 강화되고, 대중적․지역적으로 확산된 저변이 넓은 정당체계를 갖출수록, 그것의 시민 대표성은 높아지고, 정당들의 불법적 음모와 정당간의 극단의 대립을 낮아질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미국 민주주의와 토크빌

매디슨이 죽기 몇 년 전인 1831년, 프랑스의 개화한 젊은 귀족 한 명이 미국의 사법제도를 연구차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본토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미국 민주주의의 경이로운 발전을 목격하고, 귀국하여 이를 책으로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 책 속에는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놀라움과 찬양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도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혐오와 두려움은 전통적인 것이기도 하였지만, 전혀 새로운 근대적인 것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프랑스 귀족은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이었고, 그가 쓴 책이 바로 ≪미국의 민주주의(De la démocratie en Amérique)≫입니다. 그는 원숙한 매디슨이 구현한 미국 민주주의에서 무엇에 감탄하고, 무엇을 찬양하고, 또한 무엇에 두려운 눈빛을 보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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