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김 춘 길(충북사회복지신문 편집고문 겸 주필)

▲ 김춘길(충북사회복지신문 편집고문 겸 주필).

길 위에서

긴 꿈이었을까 저 아득한 세월이
거친 바람 속을 참 오래도 걸었네
긴 꿈이었다면 덧없게도 잊힐까
대답 없는 길을 나 외롭게 걸었네

푸른 잎들 돋고
새들 노래를 하던 뜰에
오색향기 어여뿐 시간은 지나고

고마웠어요
스쳐간 그 인연들
아름다웠던 추억에 웃으며 인사해야지
아직 나에게 시간이 남았다면
이 밤 외로운 술잔을 가득 채우리

푸른 하늘 위로 웃음 날아오르고
꽃잎보다 붉던 내 젊은 시간은 지나고

기억할께요 다정한 그 얼굴들
나를 떠나는 시간과 조용히 악수를 해야지
떠나가야할 시간이 되었다면
이 밤 마지막 술잔에 입술을 맞추리

긴 꿈이었을까
어디만큼 왔는지

문을 열고 서니 찬바람만 스쳐가네
바람만 스쳐..가네.

           (아티스트 최백호 노래)

▲ 최근 종영한 KBS 2TV 주말 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 한 장면.

안방극장을 달구며 시청자들을 울고 웃긴 KBS 2TV 주말 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53부작. 2014년8월16일~2015년2월15일)가 마침내 종영, 진한 부성애(父性愛)와 가족애(家族愛)를 남겨 곱씹어 보게 하고 있다. 특히 주인공 차순봉(유동근)이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애달프게 부른 최백호의 ‘길 위해서’노래는 노년들로 하여금 각자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순간을 갖게 해 처연한 심정을 가누기 어려웠다.

‘자식 바보’ 홀애비 차순봉은 자식들의 가족애를 회복키 위해 자식들을 상대로 제기한 ‘효도소송’의 마지막 조건으로 ‘가족노래자랑’을 택했고, 자기 가족과 사돈 가족들까지 참가한 그 ‘가족 노래자랑‘에서 최백호의 ’길 위에서‘를 열창했다. 그런 후 귀가, 잠자리에 들었다가 운명 했다. 이 드라마를 즐겨 시청한 젊은이들은 차순봉이 죽지 않고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길 바랐으나 나이 많은 어버이들은 차순봉이 세상을 떠나고 드라마가 끝날 것이라고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극본을 쓴 작가 강은경은 중병을 앓고 있는 ’3개월 시한부 인생‘ 차순봉을 설정하고 있는데다 어차피 한 번은 가는 인생길에서 차순봉을 예외로 취급할 수 없기 때문에 그를 살리기는 어려웠다고 본다. 드라마의 흐름으로 보아도 차순봉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드라마의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었다고 본다.

이 드라마에 대한 대중적 반응은 부정적인 것보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있을 수 있는 이야기라는 공감적 평가가 압도적인 것 같다. 아내를 잃고 3남매를 같이 늙어가는 누이동생(차순금 역 양희경)의 도움을 받아가며 알뜰살뜰 키워온 홀애비 차순봉이 3개월 시한부 인생길에서도 끝까지 가족애를 살리고 떠나는 행보에서 “우리 노(老)털들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하고 자문(自問)해보았다.

우연히 이 드라마를 방영 초반에 접했다 최종회까지 지켜본 필자는 ‘가족끼리 왜 이래’를 통해 몇 가지 가족관심 사항을 재확인 할 수 있었다. 그 첫째는, 남편은 늙어 갈수록 아내의 존재 필요성이 절실하다는 점이다. 노년의 남편(아버지)이 사별한 아내 (어머니)의 역할까지 힘써 해준다 해도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돌봄만큼 자세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홀로된 아버지가 중병(重病)의 시한부 인생이라면 자식은 물론 남편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가 ‘아내’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옆에서 함께 시청하며 눈물을 닦는 아내의 주름살 짙은 얼굴을 수시로 바라보며 고마움을 새삼 느꼈다. 부부가 애환을 함께 겪으며 노년을 살아가고 있는 자체가 축복이 아니던가!

둘째는, 누구든 언젠가는 저세상으로 가야 하는 게 인생이므로 마지막 삶을 후회 없이 살기위해 노력하는 한편 웰다잉((Well-Dying: 품위 있는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점이다. 웰다잉은 웰빙(Wll-Being:참살이)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자각하고 오늘을 살며 웰다잉을 준비해야겠다는 것이다. 극중 차순봉도 미흡하지만 웰다잉을 준비했다고 본다.

셋째는, 가족. 가정의 중요성이다. 저출산. 고령화시대의 심화와 핵가족. 1인가정 등의 점증으로 우리사회는 파편화된 가족애를 노출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을 극복하는 근본적 처방은 가족애. 가정 기능의 복원에 있음을 이 드라마는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넷째는, 죽은 부모는 잊혀지기 마련이고 남은 가족은 현실생활에 몰입하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의 재확인이다. 생존 시 그렇게 존경받고 사랑하던 사람(특히 부모 등)도 이 세상을 떠나면 점차 망각되기 마련이고, 산 가족들은 각자 가정을 이뤄 매일의 생활에 충실하고 있다. 저 세상으로 간 차순봉 가족들도 그렇게 살고 있다.

다섯째, 오늘의 아버지는 누구이며, 홀로된 아버지의 애환을 자식들이 얼마나 알고 있느냐 하는 물음을 가족들에게 던지고 있다. 자식들이 아버지의 깊은 속을 모르고, 함께 늙어가는 누이동생이 홀애비 오빠를 아무리 도운다 해도 병든 차순봉은 병고와 외로움을 내색하지 않고 혼자 감당하다 결국 이승을 하직했다. 이게 현대 우리나라 아버지들의 현주소인지도 모른다. 그런 한편 ‘가족끼리 왜 이래’는 오늘의 아버지들이 어버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를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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