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기수론

―세계는 이미 젊은이들이
정치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이준석 현상’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세상은 변화를 거듭합니다―

1969년 11월 8일 신민당 원내총무 김영삼의원은 “7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합니다. 김 총무는 이날 서울의 유일한 양식당인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정희 정권의 불법적이고 강압적인 3선 개헌 강행 이후 오늘의 내외정세를 냉정히 분석하고 수많은 당 내외 동지들의 의견들을 종합한 끝에 71년 선거에 신민당이 내세울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정치사에 충격을 준 ‘40대 기수론’의 시발입니다.

당시 김영삼 총무는 ‘40대기수론’의 근거로 “첫째, 5·16군사쿠데타로 등장한 현 집권세력, 다시 말해서 71년 총선거에서 싸울 상대세력이 야당의 평균 연령보다 훨씬 젊다는 사실이다. 둘째, 해방 후 25년간의 야당의 법통을 이어온 오늘의 야당은 국민적인 지지를 받은 훌륭한 지도자를 내세워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려 했으나, 그 지도자들의 노쇠에서 온 신체상의 장애로 두 차례나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민족적 과업을 일보직전에 좌절하고만 쓰라린 역사를 지니고 있다”며 “정권교체를 위해 젊은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1개월 전인 9월 14일 공화당은 대통령의 3선을 금지한 헌법 개정안을 날치기로 변칙 통과시켜 민심이 흉흉하던 때였기에 정국에 일으킨 파장은 컸습니다.

뒤이어 당내 라이벌의 한 사람인 김대중의원과 미국에서 귀국한 이철승 전 의원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출마를 선언함으로써 세 사람의 ‘40대 기수론’은 본격적으로 불이 붙었습니다. 이때 김영삼은 42세(1927)였고 김대중은 45세(1924), 이철승은 47세(1922)였습니다.

먼저 놀란 것은 당 원로인 유진산 의원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당내 위계질서가 분명하고 장유유서가 확실하던 때였던지라 이들이 치켜든 ‘40대 기수론’은 귀를 의심치 않을 수 없는 망발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뒤통수를 맞은 꼴이 된 유 의원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습니다. “뭐라고? 40대기수? 구상유취(口尙乳臭)로다!”하고 성을 가라앉히지 못했습니다. 구상유취란 “입에서 젖 비린 내 난다”는 뜻으로 상대를 어리게, 갖잖게 볼 때 쓰는 최하 비속어입니다.

‘40대기수론’은 금 새 정국을 뒤덮었고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신민당 대회는 1970년 9월 29일 오전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 오후에 치러진 2차 투표에서 김대중 의원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습니다.

결국 1971년 4월 27일 치러진 7대 대통령 선거는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의 대결이었습니다. 결과는 박정희 634만2828표, 김대중 539만5900표 로 득표율은 53.2%대 45.3%, 표차는 94만6928표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3선은 달성했지만 표차가 예상 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당연히 공화당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8년이나 정권을 쥐고 있던 터에 94만표 차라면 매우 위태로웠던 표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듬해인 1972년 10월 박대통령이 허겁지겁 쫓기듯 ‘유신(維新)’을 선포한 것도 사실은 그 때문입니다.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던 한 인사는 “큰일 날 뻔 했다”고 가슴을 쓰러 내릴 정도였습니다.

1971년 김영삼의원이 저술한 ‘40대 기수론.’ 패기와 야망으로 가득 찼던 40대 당시 김영삼 의원의 모습이다./충청미디어 소장자료

국민의힘 당 대표 선출을 둘러싸고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따돌리고 국회의원도 한번 못해 본 30대의 이준석 후보가 돌풍을 일으키자 기성의 중진의원들 입에서 한숨 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전혀 예측할 수 없던 현상이 일어나니 제1야당이 충격에 휩싸인 것입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변고입니다.

이준석은 1985년 3월 31일생으로 올해 나이 36세입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과학고를 거쳐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학과 컴퓨터를 공부한 영재입니다. 2011년 12월 박근혜 대통령 당선 뒤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에 전격 발탁되어 화려하게 등장해 젊은이들의 선망(羨望)의 적(的)이 되었으나 2016년 20대 국회, 2018년 재보선, 2020년 21대 총선에 서울 노원 병 지역에서 세 차례 출마했으나 분루(憤淚)를 삼키며 인고의 세월을 견뎌 왔습니다. 당시 나이 26세 였으니 10년 전 이야기입니다.

세계에는 젊은 나이에 이름을 날리는 정치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나이를 앞세워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암살당했지만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은 35대 케네디 대통령은 43세에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프랑스의 마크롱은 2017년 39세의 나이로 프랑스의 25대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오늘 날 세계 각국은 30~40대 젊은 리더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기존 정체에 식상한 국민이 경제위기 돌파를 위해 젊은 국가 지도자를 선출한 결과입니다. 선진국 클럽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소속 36개국 중 15개 국가 정상이 30~40대입니다. OECD국가 지도자의 평균연령은 53세. 정치 지도자의 대부분이 60대 이상인 우리나라와 사뭇 다릅니다. OECD에서 한국 보다 국가 지도자 연령이 높은 나라는 미국 대통령 조 바이든(78),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71), 체코(76), 칠레(72), 멕시코 대통령(70)등 5개국에 그치고 있습니다.

4차 산업 혁명 시대에는 젊은 지도자일수록 실생활에 최적화된 정책을 편 결과입니다. 젊은 리더들은 갈등 조정과 사회 통합에서도 적지 않은 성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젊은 리더들이 이념에 대해서도 대체로 유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예로 벨기에의 샤롤 미셀 총리는 2014년 38세에 총리가 되었고 우크라이나 블로드미르 그로이스만은 38세에 총리, 뉴질랜드도 160년 만에 최연소 37세 여성총리를 탄생시켰습니다.

젊은 지도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엇갈립니다. 참신하고 혁신적인 정신으로 국정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에 기여할 수도 있지만 경륜이 부족해 위기 대처 능력이 떨어지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정치 스타일로 역풍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훌륭한 지도자는 나이가 변수가 되지 않습니다. 경륜과 자질이 소중한 덕목입니다.

그러면 한국은 어떤가. 1945년 일제로부터 독립이 된 뒤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73세 였습니다. 그가 1960년 세 번 째 선거에서 당선됐을 때 85세 였습니다. 신체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판단력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박정희 소장(1917)이 탱크를 몰고 한강을 건너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나이가 43세였습니다. 민간인 신분으로 행동을 같이 한 김종필씨(1926)는 34세 였습니다. 그에 비하면 36세의 이준석이 당 대표로 나왔다고 해서 그리 어린 것은 아닙니다.

말이 나왔으니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북한의 김정은 총서기 말입니다. 그가 아버지 김정일 위원장의 급서(急逝)로 자리를 물려받은 건 2011년입니다. 김 총서기의 나이 27세 였습니다. 처음 권력의 정상에 오르자 남쪽에서는 “저거, 몇 달도 못 가 무너진다”며 수군댔습니다. 하지만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깜짝 정상회담을 함으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도 싱가포르와 하노이에서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1984년생이니 그의 나이 올해 정확히 37세입니다.

정치인들 가운데는 몸은 노쇠했으나 30대 정신을 가진 청년이 있는가 하면 몸은 30대 청년이나 정신은 70대 노인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조선 세조 때의 무인(武人) 남이장군(南怡將軍)은 그의 나이 27세에 이렇게 읊었습니다.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이요,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丈夫)니라. “남아 20대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한다면 훗날 누가 대장부라 칭 하겠는가.” 어찌 됐든 이제 이준석은 한국 정치사의 기념비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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