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3월을 맞으며

―그 봄이 다시 찾아 왔습니다.
만세소리 메아리치던 3월.
온 겨레가 만세를 불렀습니다. 
가슴을 에이는 마지막 유서 
국민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그로부터 10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한 세기(世紀)하고도 두 해, 오늘 우리는 다시 그 3월을 맞이합니다. 1919년 봄, 온 겨레가 하나 되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던 기미만세운동 얘기입니다.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대한독립 만세!” 함성은 전국으로 메아리쳐 일본제국주의의 총칼 아래 신음하던 1700만 겨레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3·1운동은 1910년 일본제국주의의 대한제국 국권 피탈(被奪)이 주요인이었지만 동경에 유학 중인 학생들 400명의 ‘2·8독립선언’에 이어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이 컸습니다.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외부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윌슨의 선언은 식민치하 절망에 빠져 있던 한국인들에게 크나큰 희망을 주었고 용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3·1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고종황제의 돌연한 죽음이었습니다. 1월 21일 아침 고종이 덕수궁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종의 절명소식이 알려지자 서울장안에는 식혜에 탄 독약 때문이라는 독살 소문이 퍼졌고 그것이 민심을 자극해 장례일인 3월 1일에 맞춰 백성들이 경성으로 몰려들면서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3·1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홍기조, 이승훈, 오화영, 신홍식, 한용운, 최남선 등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인이 주축이 된 33인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날 서울 인사동의 요릿집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했습니다. 원래는 탑골공원에 모인 군중들과 함께하기로 돼 있었지만 경찰의 감시로 약속이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독립선언문의 초안은 33인의 한 사람인 육당(六堂) 최남선이 썼습니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朝鮮(아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라는 한문으로 쓴 어려운 문장을 만해(萬海) 한용운, 춘원(春園) 이광수가 의론해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식의 쉬운 말로 수정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군중들이 모여 만세를 부른 곳은 종로 2가의 탑골공원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1000여명의 군중이 민족대표들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늦어지자 경신학교 출신의 정재용의 독립선언문 낭독과 “대한독립만세!” 함성을 시작으로 3·1독립운동의 불씨가 달려 졌고 이 불길은 이내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 나갔던 것입니다.

역사에는 33인의 대표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사실 3·1독립만세 사건의 발원지요, 성지(聖地)는 탑골공원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메아리가, 메아리가 되고 또 메아리가 되어 온 나라에 울려 퍼졌습니다.

당시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시위 참가자는 총 202만 명이고 사망자 7000명, 부상자 4만5000명, 체포자 4만9000명이었습니다. 일제는 무력으로 시위 참가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습니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난 뒤 이를 보도한 매일신보 지면. 경성(京城), 평양(平壤) 등 전국 각 지방의 소요 사태를 자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민족문화대백과

만세운동이 일어난 뒤인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이 선포됐고 현행 헌법전문에 명시되어있듯 그것은 곧 오늘 대한민국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국무령 이동녕, 주석 김구 였습니다. 그러니까, 올 2021년은 3·1운동 102주년인 동시에 대한민국 건국 102주년의 뜻깊은 해이니 그 의미는 아무리 강조한다 해도 결코 지나침이 없겠습니다.

그 때는 모두가 하나였습니다. 102년 전 그 때, 국토도 하나였고 민족도 하나였습니다. 남북이 따로 갈라져 있지 않았고 동과서가 따로 있지 않았습니다. 보수와 진보가 따로 있지 않았고, 세대와 세대가 따로 있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찾자는 대의(大義) 앞에 국토와 겨레는 둘이 아닌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국토는 남북으로 갈려있고 민족도 둘로 갈라져 서로가 적 아닌 적이 되어 있습니다. 못난 후손들의 전형입니다.

지나간 과거일지라도 역사는 소중합니다. 선조들이 피 흘려 쌓아온 아름다운 역사가 전해져 오늘의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미래 또한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쌓는 이 소중한 역사가 훗날의 척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전염병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오늘 3·1절 노래를 다시 불러 봅니다. 우리 국민가운데 이 노래를 불러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기미년 3월 1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 의(義)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 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여 이 날을 길이 빛내자.― (정인보작사 박태현작곡)

3·1운동은 대한민국의 위대한 민족운동으로 영원히 기억해야 할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 유관순 열사의 고향인 충남 천안시 병천에서는 해마다 그녀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는 횃불전야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3·1절 102주년을 맞아 유 열사가 남긴 마지막 유언이 온 국민의 가슴을 울립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코와 귀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오호(嗚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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