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대한 소회

―좋은 전통은 이어가고
불합리한 전통은 바꾸는
국민적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사회 지도층의 의식 전환이
반드시 필요 합니다―

“귀성을 자제하세요,” “다섯 사람 이상 자리를 함께 하지 마세요.”라는 정부의 간곡한 당부가 있었기에 범국민적 대사인 설 명절이 전 과는 다른 대로 그럭저럭 지나갔습니다.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코로나19 ‘덕분’에 주부들의 수고가 예전 같지는 않았다는 후일담도 들리니 다행이긴 합니다.

조상에 대한 제사(祭祀)는 천지신명이나 죽은 이의 넋에 제물을 바침으로써 정성을 표하는 살아 있는 후손들의 도리입니다.

우리나라의 가례는 고려 말 중국에서 들어 온 주자가례(朱子家禮)가 기본이 되어 오늘에 행해지고 있습니다. 주자가례란 송(宋)나라의 대학자 주희(朱熹·1130~1200)가 저술한 사대부(士大夫) 집안의 예법과 의례에 관해 저술한 교본입니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은 고려 말기로, 곧이어 개국한 조선이 유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가례는 보통 관·혼·상·제, 네 가지 예법을 이르는 것으로 사람이 태어나 성장하고 살아가면서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를 적은 지침서입니다. 관(冠)은 성년에 이른 사람이 지켜야 할 예를 가리킴이니 오늘 날의 성년식이요, 혼(婚)은 혼인(婚姻)에 관한 내용, 상(喪)은 죽음에 관한 상례(喪禮)와 장례(葬禮), 제(祭)는 제사지내는 예법인데 이 네 가지 가운데 조상을 추모하는 제례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과거 제사를 받드는 조상의 범위는 신분에 따라 달리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문무관(文武官) 6품 이상은 3대인 증조(曾祖)까지, 7품 이하는 2대인 조부(祖父)까지, 일반 평민은 1대인 아버지, 어머니에게만 제사를 받들도록 돼있습니다.

그러나 이 규정과는 달리 또 다른 예법서인 명나라 ‘문공가례(文公家禮)’에 따라 4대인 고조(高祖)까지 봉사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이 반영돼 일부지방에서는 4대를 모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 봉사(奉祀), 또는 봉제사(奉祭祀)라고 하는데 제사를 받드는 사람은 원칙적으로 장자(長子)와 장손(長孫)의 특권이면서 의무로 되어있습니다.

설날 차례는 새로운 해가 밝았음을, 추석은 수확의 계절이 되었음을 조상들에게 고하기 위해 간단한 음식을 차려놓고 인사를 드리는 일종의 의식입니다. 그래서 설날과 추석에는 제사를 올린다고 하지 않고 차례(茶禮)를 올린다고 합니다. 주자가례에선 설 차례 상에 술 한 잔, 차 한 잔, 과일 한 쟁반을 올리고 술도 한 번만 올리며, 축문도 읽지 않는다 하여 무축단헌(無祝單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가정에서 지내는 차례는 상다리가 휜다고 할 만큼 많은 가짓수의 여러 가지 귀한 음식이 푸짐하게 차려집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2017년부터 제례문화 현대화 사업을 위해 예서(禮書)와 종가(宗家), 일반 가정의 설 차례 상 음식을 조사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전통 격식을 지키는 종가의 설 차례 상 역시 주자가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선비의 고장인 경북 안동의 퇴계(退溪) 이황(李滉) 종가에서는 술, 떡국, 포, 전 한 접시, 과일 한 쟁반 등 5가지 음식을 차렸다고 합니다. 과일 쟁반에는 대추 3개와 밤 5개, 배 1개, 감 1개, 사과 1개, 귤 1개를 담았습니다. 주자가례와 비교하면 차를 생략했고, 떡국과 전, 북어포를 추가했습니다.

중국 송나라 대학자 주희가 편찬한 ‘주자가례.’ 이 예법서는 1000년 가까이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다./국립중앙박물관

하지만 일반 가정 차례 상에는 평균 25~30가지 음식이 올라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종가에 비해 대여섯 배나 많은 음식을 차린 것입니다. 과일은 종류별로 별도의 제기에 각각 담았으며, 어류와 육류, 삼색 채소, 각종 유과 등이 추가됐습니다.

명절과 기일에 행하는 차례와 제례는 조상을 기억하기 위한 문화적 관습이자, 오랜 기간 이어져온 전통입니다. 과도한 차례 상 차림으로 가족 간 갈등을 일으키고, 허례허식으로 사회문제를 초래한다면 과감히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한국국학진흥원은 지적했습니다.

제사상을 차리다 보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조율이시(棗栗梨柿)요, 홍동백서(紅東白西)입니다. 조율이시란 대추, 밤, 배, 감을 말하는 것으로 제상 맨 앞줄에 진설하는 순서입니다. 또 홍동백서는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놓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례의 원본인 주자가례에는 조율이시니, 홍동백서라는 용어 자체가 없습니다.

다만 과일을 뜻하는 과(果)와 과자를 뜻하는 과(菓)만 있을 뿐이지 과일이나 과자의 종류를 낱낱이 가리키는 글자는 없습니다. 그런즉슨 조율이시니, 홍동백서니 하는 것은 뒤에 누군가가 만들어 끼운 것임이 분명합니다. 현재의 가정의례준칙 제22조에는 ‘제수는 평상시의 간소한 반상(盤床)음식으로 자연스럽게 차린다’고 되어있습니다.

제례문화는 명절 때마다 신문지면을 장식하는 단골메뉴입니다. 대부분 제례의 번거로움을 지적하면서 간소하게 바꿀 것을 권장하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특히 전문가들은 시대적 환경이 달라진 만큼 제례문화도 현실에 맞게 변화해야한다고 강조합니다.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조상제사가 ‘뜨거운 감자’가 된 이유는 제수음식을 마련하는 번거로움 때문입니다. 문제는 수 십 가지나 되는 음식을 한꺼번에 준비해야하는 주부들의 도를 넘는 심한 노고에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명절이 다가 오면 주부들은 미리 겁을 먹을 수밖에 없고 지나고 나면 심신이 나약해져 ‘제사병’에 시달리는 후유증을 겪게 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가정불화마저 일어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현실이 되어있으니 말입니다.

조상을 기리는 순수한 제사 문화가 이처럼 복잡해진 것은 구한말 매관매직이 성할 때 돈을 주고 ‘감투’를 산 신진세력들이 양반 행세를 하기 위해 제사범위를 멋대로 올려 과장한데서 비롯된 것, 또 일반 평민이 윗대로 제사 범위를 올려 자신의 가문을 과시했던 데서 비롯된 폐습이 원인이 된 것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코미디에 다름 아닙니다.

의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의식의 전환이 무엇입니까. 생각을 바꾼다는 말입니다. 전통은 좋은 것은 지켜 이어가고 불합리 한 것은 폐기하고 간소화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 사회를 끌고 가는 지식인들, 특히 남성들의 생각이 바뀌어야합니다. 옛날 것이라서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맞게 합리적으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가정의례를 간소화 했다고 해서 저승의 조상님들이 “불효자!”라고 호통 치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풍속도 허례허식에 과소비가 되어 국민들이 불편을 느낀다면 새롭게 바꾸는 것이 당연합니다.

1973년 제정된 가정의례준칙에는 선조 제사의 범위를 2대인 조부모까지 한정하였고 제사의 종류도 사망일의 기제(忌祭)와 설날과 추석 차례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엊그제 18일이 우수(雨水)였고 경칩(驚蟄)이 3월 5일입니다. 절기로는 봄에 접어들었는데 한파에 폭설까지 쏟아지니 날씨도 제 정신이 아닌 듯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19, 이제 막 백신 접종이 시작됐으니 제발 완전 종식의 희소식이 기다려질 뿐입니다. COVID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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