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거인의 죽음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던 이건희 회장.
그의 변화와 혁신의지는 
오늘의 삼성을 이루었고
그것은 곧 신화가 되었습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향년 78세를 일기로 영면(永眠)에 들어갔습니다.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쓰러진지 6년 5개월의 긴 투병 끝에 눈을 감은 것입니다.

이 회장은 아버지인 이병철 선대회장이 1938년 대구 서문시장에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내 걸고 ‘별표국수’로 시작한 사업체를 오늘 날 세계적인 초일류 거대기업으로 성장시킨 불세출(不世出)의 인물입니다.

아버지로부터 경영 수업을 받던 이건희 회장이 기업을 물려받아 전면에 나선 것은 1987년입니다. 삼성은 그 보다 훨씬 앞선 1969년 삼성전자를 설립해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등 가전제품을 생산했으나 그저 그런 국내 기업이었을 뿐 당시 삼성의 주력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이었습니다.

경영 일선에 나선 이건희 회장은 미국 뉴욕의 백화점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삼성은 국내 제일의 대기업이긴 했지만 해외로 수출한 가전제품들은 싸구려라는 소비자들의 외면 속에 매장 한구석에 먼지가 덮인 채 놓여있는 그런 수준을 면치 못했습니다.

급기야 이건희 회장은 1993년 6월 7일 독일의 국제적인 금융도시 프랑크푸르트의 캠핀스키호텔로 비상회의를 소집합니다. 삼성의 역사를 바꿔 놓은 이른바 ‘신경영선언회의’에는 한국에서 온 사장단, 임원 등 최고경영진 20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건희 회장은 “20세기를 보내고 새로운 21세기를 앞둔 중차대한 시점에서 시대의 흐름에 앞서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 한다”고 절박한 위기론을 역설하면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고 ‘폭탄선언’을 합니다.

회의장은 순식간에 차가운 분위기에 휩싸였고 이 회장은 “개인의 생각도, 습관도 바꾸고 회사의 규정도, 관행도 바꾸고, 그 밖의 모든 것, 기업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자”고 결연한 의지를 천명합니다.

당시 국제정세는 세기말적인 긴장감속에 국가 간의 ‘경제전쟁’은 더욱 치열해지는 급박한 변혁의 시기를 맞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같은 위기의 징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회장은 “현실에 안주해 이대로 가다가는 삼성의 미래는 없다”면서 “앞으로 10년 내 세계 일류기업으로 성장하지 못 하면 나부터 회장 자리를 물러나겠다”고 폭탄선언을 합니다.

신경영회의의 핵심 내용은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자기반성을 통해 변화의 의지를 갖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양(量)위주에서 질(質)위주의 경영을 실천해 궁극적으로 인류사회에 공헌하는 세계 초일류 기업이 되자는 것을 지향점으로 삼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날 회의의 핵심화두는 ‘변화,’ 즉 ‘혁신’이었습니다.

한국 경제를 이끌고 있는 삼성타운의 한 빌딩에 삼성 사기가 펄럭이고 있다. 서울 강남구 강남역 네 거리에 있는 삼성타운에는 1만 명의 삼성맨들이 근무하고 있다. /Newspim

삼성은 먼저 조기 출퇴근제인 ‘7·4제’를 도입하는 한편, 각종 차별을 철폐하고 능력 위주로 임직원을 배치, 평가하는 새로운 인사제도를 실시합니다. ‘7·4제’란 오전 7시에 출근해서 오후 4시에 퇴근하는 조기출퇴근제를 말하는 것으로 번잡한 러시아워를 피해 일찍 출퇴근을 함으로써 직원들의 불편을 덜어줌은 물론 가족과 저녁시간을 함께 보내게 하고 남은 시간을 활용해 개인의 자기 발전을 위한 기회로 활용케 하자는 획기적인 시도였습니다. 국내의 모든 기관, 단체, 기업이 헌법처럼 준수했던 출퇴근시간의 변경은 당시로서는 혁명이나 다름없는 파격적인 발상이었습니다.

또한 불량품이 발생하면 생산라인을 멈추는 ‘라인 스톱제’를 도입하여 제조부문에 혁신의 바람을 일으킵니다. 통상 수십, 수백 번의 조립공정을 거듭하는 전자회사에서 한번 라인을 세울 경우 매출과 생산성 손실이 클 수밖에 없었지만 “질을 위해서는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무조건 공장가동을 멈추라”는 것이 이 회장의 복안이었습니다. 근본적으로 불량률을 낮추지 않으면 세계시장에서의 승부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1994년 삼성전자 무선사업부의 제품 불량률은 11.8%였습니다. 100대의 제품을 만들면 12대의 불량품이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그때만 해도 소비자들은 제품을 구매하고 불량품을 만나도 “재수가 없다”고 울며 겨자 먹듯 불평을 할뿐이었습니다.

이 회장은 “삼성에서 수준 미달의 제품을 만드는 것은 ‘죄악’이다. 회사 문을 닫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시정해야 한다”며 “불량품을 모두 회수하고 소각하라”고 엄명을 내립니다.

2년 뒤인 1995년 3월9일 오전 10시, 경북 구미의 공장 운동장에는 ‘품질은 나의인격이요, 자존심’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건 가운데 애니콜전화기, 카폰, 팩시밀리 등 15만대의 불량제품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2000명의 임직원이 지켜보며 제품화형식을 거행합니다. 먼저 ‘품질 확보’란 머리띠를 두른 10여명이 건장한 직원들이 쇠망치로 제품을 때려 부수고 이내 불을 질러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앞서 이 회장은 명절 선물로 삼성 임직원들에게 2000여대의 휴대폰을 돌렸는데 “통화가 안 된다”는 불만이 나오자 이를 전해들고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이 회장은 “돈 받고 팔 상품을 불량품으로 만들다니, 고객이 두렵지도 않느냐”고 대노(大怒)했습니다. 당시 불태운 15만대는 시가로 500억 원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7년 뒤인 2002년 삼성전자는 휴대폰 4500만대를 팔아 3조원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뒤에 삼성관계자는 “1995년 당시 회사 전체 이익의 5%를 한 순간에 불태운 과감성이 결국 직원들의 투지에 불을 지폈고, ‘애니콜 신화’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삼성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달라졌습니다. 1993년 29조원이었던 매출은 2012년 380조원으로 13배 늘어났고, 세전이익은 8000억에서 38조원으로 48배, 수출은 107억 달러에서 1572억 달러로 15배, 종업원은 14만 명에서 42만 명으로 불어났고, 총자산은 41조원에서 543조원으로, 납세는 1조6000억 원에서 13조2000억 원으로, 시가총액은 7조6000억원에서 338조원으로 탈바꿈했습니다. 그를 통해 삼성은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초일류 세계적 기업으로 우뚝 섰습니다.

그처럼 삼성이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급성장한 것은 현실의 문제점을 직시한 이 회장의 미래에 대한 탁월한 예지(叡智)에서 비롯된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떠듬떠듬 말투는 어눌했지만 이따금 뱉어 내는 한마디, 한마디는 경제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경종(警鐘))이 되어 울렸고 그대로 매스컴의 주요 기사가 되었습니다. 그 중의 백미(白眉)는 너무나도 유명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는 다 바꿔라”입니다.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는 독설은 백년하청으로 정쟁을 일삼는 정치권을 향한 거침없는 충고로 국민의 공감을 자아냈습니다.

“디지털 시대 1년의 변화는 아날로그 시대 100년의 변화에 맞먹는다,” “천재 한명이 10만 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가 올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위해 투자하라. 투명한 영혼은 천년 앞을 내다본다,” “장사꾼이 되지 말라. 경영자가 되면 보이는 것이 다르다,” “돈의 노예로 살지 말라. 돈의 주인으로 기쁘게 살아라,” “있을 때는 겸손 하라. 그러나 없을 때는 당당 하라.” 모두가 선현들의 명언을 뺨치는 금언들입니다. 2010년 3월 일시 퇴진했다 복귀하면서는 사상 초유의 흑자를 기록했음에도 “지금이 진짜 위기다”라고 사원들의 자만심을 경계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영웅호걸의 일생에도 영욕이 있고 훼예포폄(毁譽褒貶)이 있듯 이건희 회장, 그에게도 ‘검은 그림자’가 없지 않았습니다. 권력자에게 뇌물을 건넨 정경유착, 노조 설립을 방해한 무노조 경영, 온갖 수단을 동원한 불법 승계, 후계를 놓고 벌인 형제 갈등에 그때마다 숨기지 못한 여성 관련 추문 등등, 어두운 면도 있었습니다.

이제 삼성공화국의 이건희 대하드라마는 시대의 명암 속에 긴 그림자를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회장의 타계에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그는 경영자 이상의 큰 사상가(Big Thinker)”였다고 보도했습니다.

이회장이 흙속에 묻히던 날 삼성전자는 3분기 매출 67조원, 영업이익 12조3500억 원의 실적을 올렸다는 뉴스가 떴습니다. 분기사상 신기록이라고 합니다. 이 회장의 저승길이 가벼울 것 같습니다.

저작권자 © 충청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