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대기근

―자연재해는 막을 수 없어도
대비를 잘 하면 피해는
줄일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국민적
지혜가 필요합니다―

50일이 넘는 기록적인 긴 장마에 이어 8호 태풍 바비(BAVI), 9호 태풍 마이삭(MAYSAK)에 다시 10호 태풍 ‘하이선(HAISHEN)’이 뒤따라 와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마구 피해를 안겨주면서 지금 한반도는 복구 작업으로 한바탕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그것도 열흘 남짓한 짧은 기간에 몇 개의 태풍이 꼬리를 물고 잇달아 오다니, 코로나에 장마에 “눈 위에 서리 온다”는 설상가상(雪上加霜)이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기나긴 역사를 돌아보면 재난을 만나 백성들이 수난을 당한 사건이야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첫 손가락에 꼽을 재앙이라면 단연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을 첫 번째로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신대기근은 조선 18대 왕 현종(顯宗) 11년 경술년(庚戌年·1670)과 12년 신해년(辛亥年·1671)에 걸친 전대미문의 기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 서기(西紀)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였기에 육십갑자로 경술년과 신해년의 앞 글자를 따서 경신대기근이라 이름 붙여졌습니다.

얼마나 흉년이 심했기에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는가는 ‘조선실록’에 조목조목 기록되어 전해 오고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라서 노인들은 “전쟁도 이 보다는 낫다”고 탄식을 할 정도였습니다.

불길한 징조는 새해 벽두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670년 설날 아침, 속은 붉고 겉은 푸른 햇무리가 관측되고 밤에는 달무리가 나타나자 “아무래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귀엣말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궁중에서조차 뒤숭숭한 공기가 감돌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밤이면 여기저기서 유성(流星)이 떨어지는 모습이 목격됐고 전라, 경상, 펑안, 충청도에서는 땅을 흔드는 지진이 자주 일어나 백성들을 불안하게 했습니다. 가뭄이 지속돼 파종을 못하는데다 해충들마저 들끓고 전염병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때 충청 감사가 첫 번째로 조정에 보고한 것은 513명이 역병에 걸렸다는 것이었고 전라도에서도 598명이 감염되어 43명이 사망했다는 내용이 전해졌습니다.

꽃이 펴야할 봄철 서울에는 눈이 내렸고 우물과 개울물도 말라 버렸습니다. 때 아닌 서리가 내려 그나마 작물들을 죽였습니다.

5월 들어서도 여전히 가뭄이 이어졌으며 때아닌 우박이 내려 어린아이가 맞아 목숨을 잃는가 하면 가축들도 수난을 당했습니다. 날씨가 이변을 일으키자 한 중신은 “이 재난은 보통 재난이 아닌 듯합니다. 나라의 존망이 달려있으니 의당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시켜야 합니다”하고 임금에게 상소를 했습니다.

황충(蝗蟲·메뚜기)이 떼가 창궐하여 온 들판을 뒤덮고 마구 작물을 갉아먹어 농사를 망치게 했습니다. 전라도에 큰비가 내려 논들이 온통 시내가 되었고 경상도에서는 산사태가 일어나 선비 일가족 6명이 떼죽음 당하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비가 필요할 때는 가뭄이 들어 씨도 뿌리지 못했는데 뒤늦게 비가 너무 많이 와 수해를 입혔습니다.

7월에는 강풍과 폭우가 일시에 몰아 닥쳐 바람과 큰물로 피해를 입었습니다. 제주도와 경상도에는 남쪽 바다에서 초대형 태풍이 몰려 와 휩쓸었습니다. 특히 제주도가 피해가 심했는데 해일로 인해 짠 바닷물이 산과 들로 밀려들어 와 작물들은 소금물에 절어 말라죽었습니다. 짠 소금물로 농작물은 고사하고 풀뿌리 하나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당시 제주도의 인구는 4만2700명이었는데 굶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제주목사는 절박한 심정으로 조정에 양곡지원을 요청해 놓고 항구에 나가 배를 기다렸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시행 중인 서울 광화문 일대 도로가 텅 빈 모습을 보이고 있다. / NEWSPIM

그 판국에 구제역이 창궐합니다. 황해도에서만 7월 한 달 폐사한 소가 897마리나 되었습니다. 팔도에서 그렇게 죽은 소는 총 2만2165마리나 됐습니다.

조선시대에 큰 인명피해를 준 사건을 꼽자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많은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왜군과 호군이 아닌 지구의 기상이변이 초래한 대기근이었습니다. 1670~71년, 단 2년간의 기근으로 인구의 10%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 인구는 2,000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그중 200만 명이 사망한 것입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현종은 “아, 가엾은 우리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허물은 나에게 있는데 어째서 재앙은 백성들에게 내린단 말인가”하고 탄식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경술년 5월 2일에 적고 있습니다.

경신대기근은 소빙기(小氷期)로 인한 17세기의 범세계적 기상이변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20여년 뒤 숙종 재위기인 1695년의 을병대기근 때 다시 심각한 피해를 입힙니다.

얼마나 다급했기에 부모들이 아이들을 버리고 도망을 가고 무덤을 파헤쳐 시신의 수의를 볏겨 입고, 양식이 있는 집은 강도를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구호소에서 주는 죽을 받기 위해 같이 서 있던 남편이 숨을 거두었는데도 울음소리를 내기는커녕 죽을 먹고 나서야 곡을 한 아내도 있었고, 어린자식의 인육(人肉)을 먹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당시 조선은 생지옥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조정에서는 연일 당파싸움으로 조용한 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난민 구호소인 진휼청(賑恤廳)의 식량도 금세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조정은 이름을 적지 않은 백지임명장인 공명(空名帖)을 팔아 경비를 조달하려 했지만 공명첩을 사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전라도 영암, 영광에서 대문과 창문이 흔들리는 지진이 있었고 경기도 교동과 통진에서, 경상도 안음과 거창에서, 5월에는 황해도 풍천, 7월에는 경상도 동래, 충청도 대흥에서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8월 대기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 여기저기서 강력한 지진이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350넌 전 조선 팔도는 아비규환, 그대로였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그렇게 고난과 싸웠고 살아남았습니다. 시대가 좋아져 이제는 쌀이 남아도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먹을 것은 넘쳐나도 국민들의 삶은 여전히 불안합니다. 코로나라는 괴질로 온 국민이 고통을 당하고 있고 그것은 언제 끝날지 앞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이 위기를 극복

하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국민적 의지와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잘 하고 있는 것인지, 모두가 돌아 봐야합니다. 모두가 냉정을 잃지 말자는 말입니다.

20일이 추분(秋分), 저 남쪽 바다에는 또 11호 태풍 ‘노을(NOUL),’이, 12호 태풍 ‘돌핀(dolphin)’이 대기 중이라고 합니다. 자연재해는 막을 수 없어도 대비를 잘하면 피해를 줄일 수는 있습니다. 만반의 대비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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