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크의 ≪통치론≫ 읽기 (1)

근대를 대변하는 이념은 ‘자유주의(Liberalism)’입니다. 물론 ‘자유’라는 단어는 고대와 중세에도 존재하였지만, 그 의미는 근대와 상당히 달랐습니다. 고대 아테네와 로마에서 자유는 일반적으로 ‘노예가 아닌 상태’, 즉 노예 신분으로부터 벗어난 상태를 의미하였습니다. 중세에서 자유는 군주나 봉건영주의 조세, 통행료, 사법권으로부터의 ‘면제’를 의미하였습니다. 중세의 그것은 일반적․보편적 성격을 특징으로 하는 자유라기보다는, 그와 정반대로 귀족이나 자치도시만 갖는 ‘특권’의 성격이었습니다.

근대적 의미의 자유 관념 혹은 자유주의는 신분적․계급적 차이를 불문하고 모든 개인들이  그 자신의 사적 영역에서는 마음대로 사유하고 처신하고 추구할 자유를 지니고 있다고 보고, 그러한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신념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는 것은,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본다는 도덕적․윤리적 선언을 포함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떠한 정치적 또는 경제적 제도․질서․정책․실행에 대한 최고의 평가기준이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고 촉진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근대적 자유 관념은 16-7세기경부터 성립되기 시작한 것이지만, 자유주의라는 용어 자체는 1810년대 절대왕정에 대항한 스페인의 의회파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면서 시작된 것이고, 1830년대 영국 휘그파내 급진적 정치세력이 또한 자신들을 그렇게 부르면서 보편화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근대적 자유 관념을 최초로 체계화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전회에 살펴본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비록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전제로부터 자신의 정치철학을 시작하지만, 종국에는 지독히 反자유적인 절대권력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최고의 가치를 갖는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고 촉진하기 위하여 어떠한 이념․가치․제도․정책․관행 등이 필요한가라는 문제를, 정치학적으로 혹은 경제학적으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명료하게 정리한 사상가는 바로 오늘 살펴볼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와 다음 회에 살펴볼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입니다.

존 로크.

홉스와 로크, 너무나 다른 운명

로크는 홉스보다 1-2세대 후의 인물입니다. 그도 홉스처럼 영국의 왕당파와 의회파간의 분쟁과 내전을 몸으로 겪었습니다. 홉스가 왕당파에 비교적 가까웠다면, 로크는 명백히 의회파 소속이었습니다. 그런 그도 홉스처럼 내전의 영향으로 6년간 네덜란드에서 망명생활을 하였고, 홉스의 ≪리바이어던≫처럼 그러한 강요된 은둔생활은 ≪통치론≫이라는 걸작을 낳았습니다.

1652년 망명지 프랑스에서 영국 정계의 눈치를 살피며 남몰래 귀국한 홉스는, 그 이후에도 그 직전에 출간된 ≪리바이어던≫으로 인하여 왕당파와 의회파 모두로부터 계속적으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에 반하여 의회파였던 로크는 1688년 명예혁명으로 의회파가 최종적으로 승리한 이듬해, 새로운 국왕인 메리 공주를 수행하여 함께 영국으로 귀국하는 영광을 누렸고, 그 이후에도 명예혁명과 그 이후의 새로운 질서를 대변하는 인물로 정계와 학계에서 영예로운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명예혁명과 로크는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통치론≫의 주요내용은 명예혁명 이전에 왕당파와 의회파간의 대립 국면에서 의회파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집필되기 시작한 것이지만, 그것이 출간된 것은 명예혁명 바로 이듬해이고, 그 스스로 책을 출간하며 그 서문에 “위대한 복원자인 현재의 윌리엄 왕(명예혁명후 부인인 메리 공주와 함께 공동으로 왕위에 오름)의 왕위를 확립하고……국가가 예속과 파탄의 위험에 빠졌을 때 이를 구한 영국 인민들을 세상에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수정 보완을 거친 완성본으로서의 ≪통치론≫은 명예혁명의 결과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영국의 지식인들은 전통적으로 지극히 세속적․실용적․타협적․보수적인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평가가 맞을 수도 있고 다소 과장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러한 영국적 지적 전통에 비추어보면 가장 돌연변이 같은(非영국적인) 정치사상가는 홉스일 것입니다. 그는 ≪리바이어던≫에서 지극히 사변적․연역적 추론을 하고, 최종적․극단적 해결책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에 반하여 많은 이들은, 그러한 영국적 지적 전통을 가장 잘 구현한 사상가와 책으로 로크와 그의 ≪통치론≫을 꼽습니다. ≪통치론≫에서 보이는 그의 학문방법은 복잡하고 난해한 추론과 분석이 아니라, 일반인의 상식 수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는 상식적 수준에서 누구나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하는 가정들은 그냥 받아들여 자신의 전제로 삼을 뿐이지, 그 전제의 진위여부를 논리적으로 입증하려 하지도 않고 그것의 형이상학적 연원을 구태여 묻지도 않습니다. 그가 내놓은 해결책도 당시 영국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극단적이지 않고 지극히 현실타협적이고 심지어 보수적이기까지 합니다. 

절대권력을 옹호한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절대주의라는 구질서가 몰락함에 따라 설 자리를 잃어갔고, 오직 조롱과 풍자의 대상으로 인용되는 처지로 전락하였습니다. 그와 정반대로 로크의 ≪통치론≫은 그로부터 1백년 후 전개되는 혁명의 시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책이 됩니다. 미국과 프랑스의 엘리트들은 ≪통치론≫을 돌려 읽으며 혁명정신을 키웠고, 로크가 ≪통치론≫에서 제시하는 바를 혁명 이후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지도 원리로 삼았습니다. 비록 ≪통치론≫이 이미 완성된 혹은 완성되어 가는 영국적 현실을 정당화하는 상식적․보수적인 책에 불과할지라도, 그 속에 내재된 새로운 이념과 질서에 대한 이야기만큼은, 아직도 구질서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폭발력과 영향력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로크가 ≪통치론≫에서 말하는, 위와 같은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새로운 이념과 질서는 무엇이었을까요? 

네덜란드의 5개주의 통치자였던 오렌지공 윌리엄은 영국 의회로부터 자신들의 국왕인 제임스 2세를 내쫓고 왕위에 올라달라는 제안을 받고 1688년 11월 5일 군사 2만명을 이끌고 영국에 상륙하였습니다. 그는 영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그림), 다음 해 2월 아내인 메리와 함께 공동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미 전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제임스 2세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프랑스로 도주하였습니다. 명예혁명 과정에서 일어나 유일한 유혈극은 도주하던 제임스 2세가 솔즈베리에서 코피를 흘린 것뿐이라고 합니다.

“자연상태는 방종의 상태가 아니다”

로크는 ≪통치론≫의 첫부분에서 “정치권력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것을 그 기원으로부터 도출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인간이 자연적으로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가를 고찰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로크도 흡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정치사회가 수립되기 이전의 상태, 즉 자연상태를 먼저 분석함으로서 정당한 정치사회는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규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로크가 주장하는 자연상태는 어떠한 상태일까요?  

그러한 상태(자연상태)란 사람들이 타인의 허락을 구하거나 그의 의지에 구애를 받지 않고, ‘자연법의 테두리 안에서’(따옴표 강조는 필자) 스스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규율하고 자신의 소유물과 인신(人身)을 처분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의 상태이다.

로크에게 자연상태는 ‘자연법’의 지도하에 있는 상태입니다. 자연법의 지도하에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자연법(自然法, natural law, lex naturalis) 관념은 고대 아테네의 소포클레스(BC 496∼406)의 비극《안티고네》에서 유래합니다. 여기서 주인공 안티고네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왕의 명령에 반항하였다가 죽었습니다. 자연법이란 단어는 고대 아테네의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근대의 홉스, 로크, 루소 등 거의 모든 정치사상가들이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대체로《안티고네》처럼, 실정법(實定法, 국가의 법이나 왕의 명령)에 대비되는,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이성’에 따른 명령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이 정치사회나 실정법에 의하여 규율을 받기 이전인 자연상태에서도 자연법의 구속을 받는다는 로크의 주장은, ‘인간’이란 본래적으로 감정적이고 이기적인 동물임을 넘어 버젓한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 그러한 인간에게 ‘자유’란 자기 마음대로 하는 방종의 상태가 이성에 의하여 규율을 받는 상태라는 것, 그러한 자유로운 인간이 모인 ‘자연상태’란 홉스식의 만인 대 만인의 투쟁상태인 전쟁상태가 아니라 일정한 규율과 상호간의 의무에 의하여 지배되는 상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크의 이러한 결론은 홉스의 인간, 자유, 자연상태와 현저히 다른 것입니다.

자연상태는 ‘자유의 상태(state of liberty)'이지, ’방종의 상태(state of licence)'는 아니다……자연상태에는 그것을 지배하는 자연법이 있으며 그 법은 모든 사람을 구속한다. 그리고 그 법인 이성은 조언을 구하는 모든 인류에게 인간은 모두 평등하고 독립된 존재이므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명, 건강, 자유 또는 소유물에 위해를 가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친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상태와 전쟁상태 간의 명백한 차이를 인식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 차이를 혼동하기도 하였지만, 두 상태는 평화, 선의, 상호부조 및 보존의 상태와 적의, 악의, 폭력 및 상호파괴의 상태가 서로 다르듯이 현저히 다른 것이다.

자유롭고 평화롭다면 왜 사회계약을?

자연상태가 그처럼 자유로우면서도 자연법의 지도하에 평화롭기까지 한 상태라면, 도대체 왜 인간들은 자연상태를 떠나 정치사회를 결성하는 사회계약으로 나아갈까요? 反사회적인 인간, 자유, 자연상태를 전제한 홉스에게는 사회계약의 ‘불가능성’이 문제였다면, 완전히 사회적인 인간, 자유, 자연상태를 전제하는 로크에게는 사회계약의 ‘불필요성’이 문제가 됩니다.

이에 대하여 로크는 자연상태에서는 공동의 재판관이 없기에 자연법에 대한 해석이 개인간에 다를 수 있고, 자신의 자연적 권리에 따른 합당한 정의를 효과적으로 집행할 수 없는 등 여러 불확실함과 불안함이 있기에, 사람들은 자연상태를 떠나 정치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사회계약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합니다. 

만약 자연상태에 있는 인간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토록 자유롭다고 한다면……도대체 그는 왜 그러한 자유와 결별하는 것일까? 왜 그는 이 같은 지배권을 포기하고 자신을 타인의 권력의 지배와 통제 하에 복종시키려고 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는, 자연상태에서 그는 그러한 권리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 향유가 매우 불확실하고, 끈임없이 다른 사람이 침해할 위험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답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모두 왕이며, 그들의 대부분이 형평과 정의의 엄격한 준수자들은 아니므로, 그가 이 상태에서 가지고 있는 재산의 향유가 매우 불안하고 매우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로크가 명확히 분별하지는 않았지만, ≪통치론≫을 읽다보면 마치 두 개의 계약이 존재하는 것처럼 읽힙니다. 맞습니다. 그는 공동체(시민사회)를 생성시키는 개인간의 계약과 공동체와 정부간의 위임계약이라는 두 개의 계약, 그리고 이러한 두 개의 계약에 따라 각자가 자연권을 가진 자연상태 → 공동체 생성을 위한 사회계약 → 공동체로부터 위임받은 입법권 → 입법권하의 집행권이라는 4단계를 암묵리에 상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2개의 계약, 4개의 단계?

더불어 로크는 위 4단계중 제 1단계에 최대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고, 그 이후의 단계로 갈수록 제한적 가치만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1단계의 자연상태에서 갖는 각자의 자유와 권리는 이후의 단계에서도 계속적으로 보호되어야 하고, 이후의 단계는 1단계의 각자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거나, 이후의 3․4단계에서는 다수결 원칙이 적용될 수 있지만 2단계에서는 1단계의 각자의 자유와 권리를 완벽히 보장하기 위하여 만장일치가 필요하다거나, 3․4단계의 위임은 언제나 철회되어 2단계의 공동체로 회수될 수 있고 다만 그 철회 중 3단계의 철회는 보다 엄격한 요건이 필요하다거나, 3단계의 입법권에 최고의 정치권력이 있고 4단계는 3단계에 종속된다는 로크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인식에 기반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갖고 ≪통치론≫을 다시 읽으면 보다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고 독립된 존재이므로, 어떤 인간도 자신의 동의 없이 이러한 상태를 떠나서 다른 사람의 정치권력에 복종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자연적 자유를 포기하고 시민사회의 구속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도는 재산을 안전하게 향유하고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자들로부터 좀 더 많은 안전을 확보하면서, 그들 상호간에 편안하고 안전하고 평화스러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결성하기로 합의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회에 들어갈 때 그들이 자연상태에서 가졌던 평등, 자유, 집행권을 사회의 선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입법부가 처리할 수 있도록 사회의 수중에 양도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모든 사람이 그 자신, 그의 자유 및 그의 재산을 더욱 잘 보존하려는 의도에서 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이성적 피조물도 현재보다 더 나쁘게 만들 의도로 그의 상태를 변화시키고자 한다고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의 권력 또는 사회에 의해서 구성된 입법부의 권력이 이러한 공동선을 넘어서까지 확대된다고는 결코 상상할 수 없다.

국가에는 단일의 최고의 권력, 곧 입법권이 있는데, 거기에 여타의 모든 권력이 종속되어 있고 또 종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입법권은 일정한 목적을 위해서만 활동할 수 있는 단지 신탁된 권력이므로 입법부가 그들에게 맡겨진 신탁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이 발견될 때 입법부를 폐지하거나 변경할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은 여전히 인민에게 있다……그 권력을 회수한 인민은 자신들의 안전과 안보를 위해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곳에 그 권력을 새롭게 맡길 수 있다. 

누가 군주나 입법부가 그들의 신탁에 반해서 행동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재판관이 될 것인가?……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인민이 재판관이라고 답변하겠다. 수탁자 또는 대리인이 그에게 맡겨진 신탁에 따라 잘 처신하고 있는지는 대리를 위임한 사람, 곧 위임하였기 때문에 그가 신탁에 반해 행동하면 그를 해임할 권력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판단하겠는가?

로크의 이러한 관념, 즉 개개인이 1단계의 자연상태에서 갖는 자유와 권리는 그 자신이 ‘동의’하는 경우 외에는 이후의 단계로 절대 양도되지 않는다는 것, 이후의 단계의 정당성의 근거는 오직 개개인의 ‘동의’에만 있다는 것, 이후의 단계는 자연상태의 불확실함과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것에 파생물에 불과하다는 것, 나중의 단계는 前단계의 위임을 받은 것에 불과하여 위임의 목적에 위배될 때는 언제라도 그 위임은 철회될 수 있다는 주장 등은, 홉스의 주장과 현격히 다릅니다.

전회에 살펴본 것처럼, 홉스의 사회계약에서 계약의 당사자는 인민들일뿐, 주권자는 계약의 당사자도 아니고 또한 그러한 사회계약으로 성립된 공동체로부터 정치권력을 위임받은 자도 아니고, 오히려 주권자는 모든 인민들이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사회계약 이후의 황무지 위에 새롭게 등장한 점령군 불과하기에, 그 주권자는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 국가에서 인민의 자유와 권리는 어떠할까요? 홉스는 “인민의 자유는 법의 침묵에 달려있다. 즉 주권자가 그에 대한 별도의 법을 정하지 않은 경우에만 인민은 자기의 재량에 따라 행동할 자유를 가질 뿐이다. 따라서 인민의 자유는 주권자가 자신이 편리하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서 다르다”라고 말합니다.

로크의 <<통치론>>.

나는 물론 내 조상도 그런 계약을 한 적이 없다?

통치론(정확히는 제2론)의 제목은 ‘시민정부의 참된 기원, 범위 및 목적에 관한 에세이’입니다. 로크의 주장은, 앞서 이야기한 1․2단계를 거쳐(인민들의 동의나 공동체의 위임) 정부가 탄생된 것이고, 정부는 그러한 ‘기원’을 갖기에 그것의 권력과 기능은 그것에 선행하는 1․2단계에서의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범위’와 ‘목적’내로 제한된다는 것입니다.

로크의 이러한 논리의 최대 딜레마는 바로 전자에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당대를 보아도 인민들이 로크가 말하는 동의나 사회계약 혹은 위임계약을 한 적이 없고, 가사 어느 때에 그러한 동의나 계약을 하였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직접적으로 동의를 하거나 계약에 참여하지 않은 후손들에게까지 구속력을 미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는 18세기 초 영국의 철학자 흄(David Hume, 1711∼1776)이 제기한 로크의 사회계약론에 대한 비판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비판은 로크도 미리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반론에 대하여 그는 정치권력이 너무나 오랫동안 지배-복종의 관계를 유지해와 역사적 사료가 멸실되거나 부족하여 그렇지, 실제 원초적인 정치권력의 시작은 인민의 동의나 계약에서 비롯되었다고 강변합니다. 둘째 반론에 답변하기 위하여, 그는 ‘묵시적 동의’ 개념을 도입합니다. 그는 훨씬 이전의 조상들이 맺었던 원초적 계약에 자신이 명시적으로 동의하는 절차를 밟지 않거나 또는 스스로 당대에 새롭게 계약을 맺지 않았더라도, 국가의 영토내의 재산의 일부를 상속, 구입, 허가 등의 방식으로 향유하거나 향유하고자 하는 사람은(심지어 그는 이를 그 국가에 일시적으로 머무르는 사람에게까지 확장하기도 합니다) 묵시적으로 그 국가의 존재와 권력행사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은 본래 자유로우며, 그 자신의 동의를 제외한 그 어떤 것도 그를 지상의 권력에 복종시킬 수 없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한 인간을 어떤 정부의 법률에 복종하는 신민(臣民)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동의의 선언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는지 고려해 보아야 한다. 보통 동의는 명시적 동의와 묵시적 동의로 구분되는데, 이것은 현재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이 문제에 대하서 나는 어떤 정부의 영토의 일부분을 소유하거나 향유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럼으로써 묵시적 동의를 한 셈이며, 적어도 그러한 향유를 지속하는 동안, 그 정부하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정도로 그 정부의 법률에 복종할 의무를 진다고 말하겠다. 그런 향유가 그와 그의 상속인을 위한 영구적인 토지 소유이건, 단지 1주일 동안 머무르는 것이건, 단순히 대로상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것이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상 그 정부의 영토 내에 어떤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에게 복종의무가 미친다고 할 것이다.

로크의 묵시적 동의 관념은 너무 조작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사실 묵시적 동의 관념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의 자연권․자연상태․동의․사회계약․위임계약 등 기본적 전제 모두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조작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근대에 유행한 자연상태와 사회계약론은 모두 이러한 기본적 한계가 있었고 그러하기에 이후 벤담 등의 공리주의자들의 비판에 의하여 그 기초부터 완전히 허물어지게 되지만(그들은 자연상태와 사회계약이라는 추상적 원리를 버리고 인간 본연의 쾌락추구와 고통회피를 근간으로 자유주의 원리를 정당화하였습니다), 이러한 한계는 당시의 반대파인 왕당파들도 이미 이를 알고 있었고(그들은 그러한 한계를 집요하게 공격하였습니다), 심지어 로크 자신도 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기본적 한계를 갖는 자연상태와 사회계약론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크가 계속 고수한 것은, 그것이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자유주의’를 옹호하는데 가장 유효한 이론적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로크, ‘자유적’을 넘어 ‘민주적’인가?

로크에게서 그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제약할 수 유일한 근원은 그 자신의 ‘동의’뿐입니다. 로크식의 정치에서 ‘동의’는 인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근간인 동시에 나아가 정치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근간이 됩니다. 그러면 그러한 동의를 정치적으로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인민들의 동의를 정치적으로 현실적으로 제대로 구현하는 방법은, 인민들이 집단으로서 직접 중요한 정치권력을 보유 행사하고 그 대표를 무작위 추첨으로 선출하여 공직의 수행을 맡기는 고대 아테네적 방식을 제외한다면, 그 유일한 방법은 인민들의 ‘대표’가 정치권력을 보유 행사토록 하고, 그 대표의 선출은 동의라는 관념에 비교적 부합하는 ‘선거’라는 절차를 취하고, 행여 그 대표가 전제적 권력을 도모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여러 대표에게 권력을 적절히 ‘분할’하는 것입니다. ≪통치론≫에서 로크가 대의제도, 선거제도, 입법권과 집행권의 분립제도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 것처럼, 로크도 이러한 논리적 귀결 과정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논리적 귀결을 끝까지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통치론≫은 이러한 원리에 대한 추상적 수준의 설명에 그칠 뿐, 모든 인민의 동의를 제대로 구현하는, 모든 인민의 평등․모든 인민의 보통선거에 의한 대표기관의 구성․정기적인 선거에 의한 대표의 교체․인민에 의하여 선출되지 아니한 현실적 세습 대표(예컨대 군주나 귀족 의원)의 제한 등의 문제에 대하여 끝까지 추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비록 그 스스로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인민과 정치과정은 자신의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백인 남성의 유산자(有産者)계급으로 한정되어 있는 것이고, 노동자와 빈민 등 무산자(無産者)계급은 제외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앞서와 같은 온전한 민주적 절차만이 정치권력을 정당화시키기에 충분한 근원이 된다고 생각하지 아니하였고, 더불어 그는 선출되지 아니한 세습 군주와 세습 귀족의 대표성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통치론≫에서 인민주권, 자유의 최우선성, 인민의 저항권, 다수결 원칙, 대의제도, 의회의 우선성, 입헌주의, 국가내 권력분립, 국가권력의 범위와 기능의 제한 등 근대적 자유주의의 핵심적 교의를 누구보다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명료하게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그는 명백히 ‘자유주의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명백한 ‘민주주의자’는 아닙니다. 물론 위와 같은 자유주의적 교의들은 민주주의를 위한 교의가 되기도 하지만, 로크 자신의 핵심적 전제였던 ‘인민의 동의’에서, 스스로 ‘인민’과 ‘동의’ 모두에서 위와 같이 애매모호하게 제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명백한 민주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를 위해 변명을 한다면, 그 이후도 100여년 넘게 온전한 민주주의자는 없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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