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 Leviathan≫ 읽기 (2)

홉스는 스스로를 공포와의 쌍생아라고 합니다. 홉스가 태어나던 해에 그의 모친은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에 놀라 홉스를 조산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홉스에게 공포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홉스는 평생을 이웃국가와의 전쟁, 종교분쟁, 왕권파와 의회파간의 내전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공포와 함께 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회에 지적한 것처럼, 홉스의 정치철학적 기초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치학적 결론은 리바이어던이라는 절대권력으로 귀결됩니다. 이성을 가진 인민들의 사회계약 혹은 위임에 의하여 공동의 권력이 생겼다면, 공동의 권력은 위 계약 혹은 위임의 목적내로 제한되어야 할 것입니다. 계약을 맺거나 위임을 해준 사람이 자신마저 잡아먹을 괴물을 만든다는 것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홉스는 이것을 어떻게 정당화 시킬까요?

홉스의 전매특허, ‘공포’

이에 대하여 홉스는 사실상 별다른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당대 영국의 경험으로 자신의 논리의 부족과 비약을 벌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의 전매특허와 같은 ‘공포’가 다시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국민들이 그렇게 무한한 권력을 지닌 자들의 정욕과 변덕스런 정념에 좌우된다면 너무 비참하다고……하지만 인간에게 어떤 경우도 불편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그리고 통치형태를 불문하고 일반 인민에게 생길 가능성이 있는 가장 큰 불편도 내란에 따르는 비참함과 끔찍한 재난에 비하면, 또는 법에 대한 복종도 없고 약탈과 복수를 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속박하는 강제력도 없는 즉 지배자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분열 상태에 따르는 비참함과 두려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마치 일제 식민지 지배, 한국전쟁, 가난을 겪어본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가 정치적 자유와 사회문화적 권리를 주장하는 젊은 세대에게 ‘너희들이 전쟁과 가난을 겪어 봤냐’, ‘배가 불러서들 그런다’며 일장 훈계하는 것 같지요? 여하튼 홉스는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고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 무지막지한 리바이어던만이 자신이 경험해 본 무정부나 내란 상태의 공포로 되돌아가는 것을 막아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적인 경험이나 공동체의 역사적 경험만으로 자신의 결론을 정당화 하려 한다면, 그는 위대한 정치인이 될 수는 있어도 결코 평범한 정치사상가 조차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위대한 사상가이며 누구보다도 이론적 일관성을 갖춘 사상가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사회계약으로부터 리바이어던을 만드는 그의 놀라운 주술이 어떻게 이론적으로 가능할까요?

많은 교과서들은 흔히들 홉스의 절대주의와 로크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을 대비하면서, 이것이 양자가 전제하는 인간 본성과 자연상태에 대한 차이에서 비롯된 것처럼 강조하지만(즉 홉스가 최악의 인간과 자연상태를 전제하였기에 이를 충분히 제어하기 위하여 막강한 정치권력을 상정하게 되었다고 설명), 이는 홉스에 대한 만족할 만한 독해가 아닙니다. 전회에 지적하였듯이 홉스도 로크만큼은 아니지만, 인간의 본성의 하나로 본능 이외에 이성 내지 숙려된 이기심을 인정하고 있고, 그 이성으로 자연상태에서 인민들 스스로 평화로운 상태와 공동의 권력을 스스로 창출할 능력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공포로의 회귀를 은유하거나 최악의 전제로 인하여 최악의 대안을 설정한 것이라는 사후의 평가는 홉스가 말하는 자연상태 - 사회계약 - 공동권력 - 리바이어던이라는 가상적 추론을 ‘논리적으로’ 가능케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홉스 자신은 이를 어떻게 논리적으로 가능케 하였을까요? 그 비밀은 홉스가 사용하는 ‘사회계약’에 있습니다. 즉 리바이어던의 등장을 위하여, 홉스는 자신의 사회계약 이론 속에 은밀한 비밀을 끼워 넣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에 대하여는 잘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홉스의 사회계약은 그 구조와 내용에서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영국 내전의 촉발시킨 찰스 1세.

홉스가 사회계약에 끼워 넣은 비밀은?

어떤 이들은 홉스의 사회계약을 인민들과 주권자간의 계약으로 다만 주권자에게만 유리한 일방적 위임계약으로 이해하는데, 이는 명백히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홉스의 사회계약은 오직 인민들 간의 계약이고, 주권자는 이 계약의 당사자가 아니라 외부의 제3자에 불과합니다.

또한 이러한 인민들간의 계약은 주권자에게 권리를 위임하는 계약이 아니라(비록 그가 위임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지만) 인민들의 일방적 권리포기 선언에 불과합니다. 홉스는 이 사회계약을 설명하면서, 권리를 ‘버린다(lay down)’ 혹은 '포기한다(renounce)'는 단어를 자주 쓰는데, 그것이 홉스의 사회계약의 주요 특징입니다.

제2의 자연법은 ‘인간은 평화와 자기 방어를 위해 그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한, 또한 다른 인간들도 모두 그럴 경우에는 만물에 대한 이 권리를 포기하고, 자신이 타인에게 허락한 만큼의 자유를 갖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권리는 포기하거나 또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함으로써 없어진다.……포기나 양도중 어느 한가지 방식으로든 권리를 제거하고 나면, 그로부터 이익을 얻을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하지 않을 의무를 지거나 또는 속박 당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의지에 따른 이 행동(포기나 양도)을 무효화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바로 그의 책무이다. 그런 방해행위는 불의이며, 그럴 권리가 없으므로 권리침해에 해당한다. 그는 방해할 수 있는 권리를 이미 버렸거나 양도했기 때문이다.  

주권자가 지닌 형벌권은 인민의 양보나 증여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다……즉 인민들은 주권자에게 그러한 권리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주권자가 그들 전체의 보존을 위해 적당하다고 판단하는 바에 따라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강화시켜 준 것이다.

결국 홉스에 의하면, 인민들은 인민들간의 사회계약으로 자신들의 모든 권리를 일방적으로 포기하고, 주권자는 계약의 당사자도 인민들로부터 위임을 받은 수임자도 아닌, 인민들이 무장해제한 마당에 등장한 제3자의 점령군입니다. 그것은 치명적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는 이러한 계약구조와 내용을 바탕으로, 인민들은 주권자에게 계약준수를 요구하거나 그에게 책임을 묻거나 심지어 그를 비난할 수조차 없으며, 반면 주권자는 인민들간의 계약 내용에 얽매일 필요도 없이, 독단적으로 법과 정책을 정할 수 있고, 인민의 자유와 소유권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다만 여기서 홉스가 말하는 절대권력을 군주의 것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분명히 찰스1세의 군주제를 훌륭한 정치체제로 선호하였지만, 영국인답게 실용주의적 정치철학을 가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의회 주권도 훌륭한 정치체제일 수 있다고 인정하였고, 의회파인 크롬웰이 집권하자 그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홉스의 기회주의적 태도가 전혀 아닙니다. 자신의 학문적 결론에 따른 태도이기도 합니다.

그는 왕당파들과 달리 왕을 신으로부터 권위와 권력을 부여받은 자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군주가 인민들에게 온전한 안전과 질서를 제공해 줄(인민들을 공포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줄) 힘이 있느냐 여부입니다. 군주가 그 힘을 잃고 반대파나 신민이 반역에 성공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게 되면, 당연히 이전의 군주는 더 이상 주권자가 아니며 그는 모든 권위와 권력을 잃게 됩니다. 그에게는 군주제, 의회제, 민주제 등 어떠한 정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왕의 권위와 권력에 대한 신학적․형이상학적 근원을 버리고, 그것을 한낱 필요에 의한 인위적․계약적 산물로 이해하는 것은 왕당파에게는 상당한 모욕이었고, 그래서 그들의 심한 반발을 불러왔던 것입니다.

황새를 왕으로 옹립한 개구리들의 비극

이솝우화에는 황새를 왕으로 옹립한 개구리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던 개구리들이 왕이 있으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신에게 수차 탄원하여, 결국 우아하고 당당한 황새를 왕으로 얻었는데, 오히려 모든 개구리들이 황새에게 잡아 먹혔다는 우화입니다. 홉스의 정치적 결론을 보면, 자연상태의 공포로부터 탈출하여 보다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다가, 종국에 더 공포스런 괴물을 받아들인 인민들의 처지는 이 개구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1세대 이후의 정치철학자인 로크는 그의 주저인 ≪통치론≫에서 이러한 홉스의 정치적 결론을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홉스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조롱과 반박은 다분히 홉스적 결론을 의식한 것입니다.

로크의 <<통치론>>

이것(홉스의 정치적 결론을 의미)은 인간이, 스컹크나 여우로부터 받을지도 모르는 해악을 피하기 위해서는 조심하면서도,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것에는 만족해하고 안전하다고 느낄 정도로 어리석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민들의 자유와 재산에 대한 불법적인 기도가 행해질 때 혹은 권력자가 자신들에게 맡겨진 신탁에 반하여 인민의 재산을 침해할 때, 인민은 복종 의무가 면제되고 권력자들의 폭력에 대항해도 좋다는 교리에 대하여 이것은 내전이나 내분을 조장하고 결국은 평화를 파괴하기에 허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 있다. 하지만 그럴 바에야 그들은 동일한 논거에서 정직한 인간이 강도나 해적에 대항하면 무질서와 유혈사태를 초래하므로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편이 차라리 더 나을 것이다……만약 정직한 사람이 오직 평화를 위해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으려는 자에게 순순히 양보해야 한다면, 그러한 세계에서 도대체 어떤 종류의 평화가 있을 것인지 고찰해 보길 바란다……어린 양이 아무런 저항 없이 그의 목을 사나운 늑대에게 물어 뜯기도록 내밀었을 때, 누가 그것을 강자와 약자사이에 존재하는 감탄할 만한 평화라고 하겠는가

그와 같이 된다면, 인민은 자연상태보다 더 열악한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상태에서는 타인의 침해에 대해서 그들의 권리를 방어할 자유를 갖고 그것을 위한 힘을 평등하게 갖기 때문이다. 그것과 반대로 그들이 자신들을 절대적이고 자의적인 권력자의 의지에 내맡긴다면, 자신들은 무장을 해제하고 그 권력자를 무장시켜서 기분 내키는 대로 자신들을 먹이로 삼도록 만드는 셈이 된다. - 이상은, 로크의 ≪통치론≫에서

홉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신분적․위계적 정치철학을 비판하며, “자기가 주인이 되기보다 차라리 남의 지배를 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바보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조롱하였는데(전회 참조), 그런 최악의 바보가 바로 홉스 자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현대 정치, 홉스의 화려한 부활

이렇듯 홉스는 근대의 자유주의적 철학을 근간으로 자신의 정치철학을 시작하였지만, 오히려 철저히 反자유주의에 이르는 전혀 비상식적인 정치학적․정치적 결론을 내놓고 있습니다. 개구리들의 우화처럼 그리고 로크의 비유처럼, 홉스의 정치학적 추론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합리적이라 도대체 누가 이를 받아들일 것인가 도무지 상상키 어렵지요? 그러하기에 그동안 정치사상계에서 홉스는 역사속의 사상가로만, 즉 고·중세에서 절대주의를 거쳐 근대의 자유주의 정치사상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과도기적 사상가의 한명으로만 취급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홉스의 정치철학은 20세기말에 오히려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홉스는, 나찌에 부역하였던 독일의 권위주의적인 법철학자인 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와 더불어 현대 정치학계에서 가장 새롭게 주목받는 정치철학자중 한 명입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보편화되고 심화되었다는 현대에 이르러, 지극히 권위주의적이고 反민주적인 홉스의 정치철학이 다시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역설적입니다. 어째서 이러한 일이 발생하였을까요?

칼 슈미트의 대표 저서인 <<정치적인 것의 개념>>, 그는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제도와 형식의 수준에 머물던 정치의 범위 그 이상으로 확대하고, '적과 동지의 구분'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정치를 원초적, 근본적 투쟁으로 환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정치를 홉스의 자연상태와 유사한 투쟁상태로 보고 있습니다.

홉스의 정치철학에서는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개인들과 역으로 리바이어던처럼 우뚝 선 국가권력이 존재할 뿐입니다. 양자의 이미지는 전혀 상반됩니다. 그러나 홉스는 ‘공포’를 통하여 이렇게 철저히 사사화(私事化) 되고 파편화된 개인들이 어떻게 무지막지한 절대권력을 묵인할 수 있는지, 심지어 그것의 창출에 동의하고 기여할 수 있는지 생생히 보여줍니다. 안전과 재산에 대한 무한한 욕망에 빠진 개인들은 서로간의 무한 경쟁속에서 언제 뒤처지고 도태될지 모르는 항상적인 불안과 공포에 휩싸입니다. 항상적인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시민들에게 사회정의나 공동선, 시민덕성이나 서로간의 연대, 공적인 일에의 관심이나 참여에 대한 고민이나 성찰은 비합리적인 일이며 사치일 뿐입니다. 시민들은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시민들의 안전과 사적 욕망 추구를 보호하기만 한다면 그 정부는 최선의 정부라고 받아들입니다. 홉스에 의하면 사사화된 시민들의 욕망과 공포가 리바이어던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홉스식 정치는 여기서 끝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철저히 사사화 된 시민과 통제 받지 않는 절대권력은 이처럼 서로를 유인할뿐더러, 서로를 강화할 수도 있습니다. 절대권력은 시민들의 안전을 명목으로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감시하는 감시체계를 확대하고, 경찰력을 강화하여 시끄러운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자신들의 안전과 이익에 잠재적 위협이 되는 국가나 단체에 대하여 적극적인 군사적 위협과 무자비한 보복을 내세우고, 효율적인 힘의 행사를 위하여 의회와 법원의 합법적인 통제를 거부하고, 언론을 통하여 이러한 무제한적 힘의 행사에 동조할 것을 주문합니다. 또한 시민들의 무한한 사익 추구를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시민들을 무한경쟁의 시장으로 내몰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약화시키고, 재벌과 부유층에 대한 사회경제적 규제를 철폐하고, 시민들의 투기적 행위를 오히려 장려합니다. 괴물은 더 큰 공포스런 괴물이 되고, 시민은 더 공포스런 처지로 전락합니다. 공포의 확대재생산입니다.

이것이 지난 세기말부터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정치경제의 모습입니다. 보다 정확히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 정치경제의 모습입니다(신자유주의는 1970년대부터 부각하기 시작한 경제사상으로, 무한경쟁적인 시장 규율의 확대와 국가의 사회복지정책 축소를 주장합니다. 신보수주의는 1980년대 이후 미국 정계를 주도하는 정치사상으로, 권위와 질서를 강조하고 강력한 군사력과 적극적 경찰력행사를 주문합니다). 이처럼 독단적(일방주의적)․反민주적․反노동적인 국내와 국제 정책을 통하여 오히려 공포의 근원을 더욱 양산하고, 그것을 통하여 시민들의 안보적․사회경제적 불안 심리를 자극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 강화하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신자유․신보수 정치세력들의 기본적 정치전략입니다.

통제받지 않는 거대한 권력 vs 사적 욕망과 그 이면의 공포에 휩싸인 연약한 군중들이라는 역설적 조합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 사회에서,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보여지는 정치의 모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위대한 정치철학자인 홉스를 바보로 만든 ‘욕망’과 그 바로 이면의 ‘공포’는 언제라도 손쉬운 방법으로 우리들마저 바보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욕망과 공포로 바보가 된 정치철학자 이야기는 우리들의 이야기일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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