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전쟁을 회상함

―역사상 대 재앙이었던
민족상잔의 6·25전쟁.
휴전 67년에 통일은 요원한 채 
오늘도 갈등은 여전히
전쟁을 손짓 합니다―

꽝! 하고 뒤통수를 한 대 맞았습니다. 무슨 일인가는 벌일 것으로 예상은 했지만 그처럼 한순간에 허를 찌르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순진했던 것입니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간의 역사적인 평양 6·15선언이 있은 지 꼭 20년 되는 바로 다음 날, 북한이 개성공단의 공동연락사무소를 일거에 폭파한 사건은 또 한 번 남북관계의 복잡 미묘한 불확실성을 다시 한 번 행동으로 보여 준 폭거였습니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는 단순한 건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민족의 숙원인 통일이라는 대업(大業)을 향해 가는 과정의 상징물로서 ‘희망의 증거’였습니다. 기대대로 제대로만 발전됐다면 그것은 후일 통일의 기념탑이 될 수도 있는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흔적조차 없이 한순간 폭파해 없앴다는 것은 그동안 남과 북이 하고많은 신경전을 벌이며 쌓아 온 공든 탑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려 도로아미 타불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 남북관계는 급속 냉각되어 살벌하던 과거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동안 통일을 향해 가던 ‘남북시계’의 초침은 뒤로 방향을 바꿔 거꾸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재작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두 손을 잡고 의기투합하던 4·27 판문점 선언, 아니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역사적 6·15선언을 한 2000년으로 다시 되돌아갔습니다. 온갖 장애를 무릎 쓰고 정성을 들인 공에 비하면 솔직히 허무한 심정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25일은 6·25전쟁이 일어 난지 70년이 되는 날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소련제 야크 전투기와 T34탱크 242대를 앞세운 북한 인민군이 38도선을 넘어 남쪽으로 공격을 개시해 옴으로서 우리 민족사의 최대 비극이 된 동족상잔의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탱크와 장갑차도 없이 정찰용 경비행기와 국민성금으로 구입한 훈련용 비행기 10대에 몇 대의 화포, 사병들의 칼빈 총과 M16소총이 주 무기였던 우리국군은 총탄마저 충분하지 못한데다 그나마 15일간 전투를 할 수 있는 보급품이 전부였습니다. 2년 전 정부는 수립됐으나 이념 간 대립이 심해 사회가 혼란했고 마침 주말을 맞아 장병들이 외박을 나간 데다 북한이 남침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기에 처음부터 전투는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날은 마침 일요일이었고 장병들은 전 날 절반이 주말외출을 나가 단꿈에 젖어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작은 충돌은 있었으나 전쟁이 터지리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않았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대로 된 중무기도 없이 빈약한 무기뿐이던 국군은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인민군에 제대로 한번 맞서 보지도 못하고 후퇴를 거듭했습니다. 말이 후퇴이지 소총을 거꾸로 메고 피난민과 함께 남으로 내려가던 풀죽은 국군의 모습은 패주(敗走), 바로 그것 이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지 사흘째 되던 27일 밤 인민군은 이미 서울 동북쪽 미아리고개까지 다다라 수도 서울 함락이 촌각을 다투는 위급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때 KBS라디오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담화가 발표되었습니다. “지금 국군이 적군을 반격 중이니 국민 여러분은 안심하시오.”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에 국민들은 안도했지만 사실 이대통령은 인민군 남침 보고를 받고 이미 측근들을 데리고 재빨리 서울을 떠나 대전으로 피신해 있으면서 녹음 방송으로 국민들을 속였던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 밤중에 단 하나 뿐인 한강 인도교를 군에 의해 폭파한 것입니다. 다리를 건너 던 수 십대의 자동차와 500여명의 시민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 날벼락을 맞았습니다. 당시 서울시 인구는 180만 명. 봇짐을 싸던 시민들은 강을 건널 수가 없어 대부분 피난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결국 국군은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 해보고 피난민과 함께 남쪽으로 후퇴하기에 바빴습니다.

어린 아이를 업은 소녀가 탱크를 배경으로 서있다. 이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 전쟁은 인류의 공적(公敵)이다. /자료사진

긴급 소집된 유엔안보리는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일본에 진주해 있던 미군을 급거 파병해 오산 근처에서 방어선을 쳤지만 속수무책 밀려났고 대전에서는 24사단장 딘 소장이 인민군에 생포당하는 어이없는 일마저 일어났습니다.

물밀듯이 밀고 내려오던 인민군은 7월 말 낙동강에 최후 방어선을 친 유엔군과 국군에 막혀 진격을 멈추었으나 전라남북도까지 모두 적의 손에 들어간 상황에서 이제 남은 것은 대구, 포항, 경주, 부산뿐이었습니다. 국운이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그나마 미 공군의 제공권 장악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간 가운데 영국 캐나다 호주 등 유엔참전 16개국의 병력이 속속 도착하고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장군의 지휘아래 261척의 군함이 대규모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면서 전세는 반전돼 급기야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게 됩니다.

보급로가 끊긴데다 퇴각로 까지 막힌 인민군은 유엔군과 국군의 공세로 전 전선에서 후퇴를 거듭합니다. 이번에는 유엔군과 국군의 총반격이 이어졌고 38선을 넘어 10월 19일 평양에 입성합니다. 국군이 26일 북·중국경인 압록강에 다다라 만세를 외치는 그때 강 건너에서 물밀 듯이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오는 것이 아닌가. 유엔군과 국군의 진격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당시 중공군은 자그마치 28만 명. ‘인해전술(人海戰術)’로 새카맣게 밀려오는 중공군의 총 공세에 유엔군과 국군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다시 지옥 길과 다름없는 혹한 속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51년 1월 4일, 유엔군과 국군은 이날 또 한 번 서울을 내 주고 수원까지 빼앗깁니다. 소위 ‘1·4후퇴’였습니다. 다시 전국의 도로는 피난민 행렬로 아비규환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제공권을 장악하고 화력을 집중시킨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으로 다시 서울을 되찾았고 지금의 휴전선까지 밀고 올라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급기야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체결함으로써 피비린내 나던 전쟁은 포성을 멈추었습니다. 3년 1개월 2일 만이었습니다.

6·25전쟁은 너무나 큰 상흔을 남겼습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한국은 군인 전사 14만9천명, 민간인 사망 37만4천600명, 부상, 실종 등 총 189만 8천480명의 사상자를 냈고 미군은 3만7천명이 전사했으며 부상, 실종도 9만6천명이 나 되었습니다.

북한도 군인 전사 29만4천명, 민간인 사망 40만6천명 등 7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총 332만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중공군도 전사11만6천명, 부상자도 21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또 남쪽에서만 20만 명의 전쟁미망인과 10만 명의 전쟁고아,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남과 북 모두 국토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6·25전쟁은 핵무기를 제외한 살상무기가 총 동원된 전쟁이었습니다. 전쟁 중 미군은 폭탄 46만톤, 네이팜탄 3만2천400톤, 로켓탄 31만4천발, 연막로켓탄 5만6천발, 기관총탄 1억7천만발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 엄청난 폭탄은 1차 세계대전 때 전 세계에서 사용한 것과 맞먹는 양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것은 휴전협정 조인식에는 미국과 중국, 북한만이 참석을 하였고 정작 당사국인 우리 대한민국은 제외됐다는 사실입니다. 이유는 당시 이승만대통령이 북진통일이라는 허황된 주장을 고집하며 끝까지 휴전을 반대해 미국이 제외시켰기 때문입니다.

6·25때 태어난 아이가 올해 70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때 총을 들고 싸웠던 이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거나 살아있다 해도 80이 훨씬 넘은 노쇠한 노인들이 되어 있습니다.

휴전이 된지 67년 만에 다시 맞은 6월, 남과 북은 통일은커녕 시시콜콜한 문제들을 놓고 목청을 높여 여전히 신경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전쟁은 항상 작은 것이 불씨가 되어 확대되는 속성이 있습니다. 오늘 북한의 지도자들은 제발 이성을 잃지 말고 냉철한 판단으로 난국을 피해가야 합니다. 이 땅에 다시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전쟁은 모두가 공멸하는 최후의 길입니다.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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