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강문(晉州姜門) 충효각(忠孝閣)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덕유리 산89-6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2015년 4월 17일 청주시 향토유적 제44호로 지정되었다.

이 충효각은 진주 강씨(晉州姜氏) 3인의 효행과 충렬을 함께 기리고 있는 정려이다. 1544년(중종23) 매곡(梅谷) 강서(姜瑞, 1510~1540)의 효행을 기리어 세운 효자각,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경기도사(京畿都事)로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의 벼슬을 받고 충렬공(忠烈公)의 시호를 받은 아들 사명정(沙明亭) 강수명(姜壽男, 1552∼1592)의 충렬을 기리고자 1712년(숙종38)에 세운 충신각, 1803년(순조2)에 효행으로 교관(敎官)의 벼슬을 받고 나라에서 내린 강수남의 6대손인 강응명(姜應明)의 효자각을 함께 모시고 있다.

이 충효각은 원래 상당구 미원면 금관리에 세웠었는데 1980년 문의면 덕유리로 이전하여 다시 세운 건물로 정면 1칸, 측면 1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 기와집이다.

정려의 사면은 철제울타리로 두르고 출입문도 철제로 만들었으며 사면은 홍살로 막아 보호하고 있다. 안에는 ‘효자성균관진사강서지문(孝子成均館進士姜瑞之門)’, ‘충신증자헌대부이조판서겸지경연의금부춘추관사홍문관제학세자좌빈객오위도총부도총관행통훈대부병조정랑겸춘추관편수관증익충열공강수남지문(忠臣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弘文館提學世子左賓客五衛都摠府都摠管行通訓大夫兵曹正郎春秋館編修官贈謚忠烈公姜壽男之門)’, ‘효자성균진사증조봉대부동몽교관강응명지문(孝子成均進士贈朝奉大夫童蒙敎官姜應明之門)’이라고 쓴 3인의 편액을 걸려있다. 또한 중수기(重修記) 기문판도 함께 걸려 있다. 그리고 중수기(重修記) 기문판이 있다.

 

*강서(姜瑞, 1510~1540)는 조선 전기 효자이다. 자는 숙규(叔圭)이고, 호는 매곡(梅谷)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박사(博士) 강계용(姜啓庸, ?~?)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청풍군수(淸風郡守) 강혜(姜徯), 할아버지는 감찰공(監察公) 강효정(姜孝貞), 어머니는 의천군(義泉君) 이승은(李承恩)의 딸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부인은 대사헌(大司憲) 성세순(成世純)의 아들 참봉(參奉) 성수근(成守瑾)의 딸이다. 형은 모암(慕庵) 강우(姜瑀)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37년(중종32)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갑자기 당한 부친상에 예를 다하여, 자리 거적이 모두 닳아 없어질 때까지 시묘 살이를 하다가 여막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에 앞서 형 강우는 1517년(중종12)에 모친상을 치른 후 시묘 살이를 하다가 피를 토하면서 생을 마감하였다. 사후에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1544년(중종39)에 정려가 내려졌다. 이러한 사실은 스승 남명(南冥) 조식(曹植)이 쓴 묘표(墓表)와 창설(創雪) 권두경(權斗經)이 쓴 효문기(孝門記)를 통해서 전해지고 있다. 슬하에 아들로 충신이자 효자로 이름난 강수남(姜壽男)을 두었다.

경상남도(慶尙南道) 의령군(宜寧郡) 동동(東洞) 소입 마을에 ‘진주강씨칠정문(晉州姜氏七旌門)’이 있는데, 그 칠정문 중에 강우, 강서와 함께 강서의 아들 강수남도 포함되어 있다.

 

*강계용(姜啓庸, ?~?)은 고려 시대의 문신으로, 진주 강씨(晉州姜氏) 박사공파(博士公派)의 파조(派祖)이다.

문과에 급제한 후 국자박사(國子博士)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1274년(원종15)에는 통신사(通信使)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원나라가 일본을 공격할 때 서장관으로서 길잡이 역할을 하였는데,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까닭에 이후에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후에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청주대 교수 겸 청주학연구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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