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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古來의 ‘보도(寶刀)’를 다시 벼리다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 읽기 (1)
최용현 | 승인 2015.09.07 09:27

동서양을 막론하고 강요된 은둔은 불후의 고전의 훌륭한 탄생 배경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513년 메디치家가 복귀하면서 공직에서 쫓겨나 칩거하게 된 마키아벨리는, 지인에게 메디치家로부터의 재발탁에 힘을 행사해 달라고 탄원하는 편지 속에서, 당시의 자신의 일상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서 서재에 들어갑니다. 들어가긴 전에 저는 하루 종일 입었던 진흙과 먼지가 묻은 옷을 벗고 궁정에서 입는 옷으로 정장을 합니다. 그렇게 단장한 후 옛 선조들의 궁정에 들어가면 그들이 저를 반깁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저만의, 그 때문에 제가 태어난 음식을 먹습니다. 저는 그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며, 그들의 행적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 이유를 캐묻습니다. 그들은 친절하게 답변을 합니다. 네 시간 동안 거의 지루함을 느끼지 않으며, 모든 근심과 가난의 두려움을 잊습니다. 죽음도 더 이상 저를 두렵게 하지 않습니다. 저는 자신을 완전히 선조들에게 맡깁니다.

▲ 스테파노 우시, '서재의 마키아벨리'(1894년).

위 편지에서 그는 이러한 일상에서 ≪군주론≫을 저술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지만, 이러한 일상은 그 후로도 몇 년간 지속되어 ≪로마사 논고≫를 낳았습니다(그는 1513년부터 1519년까지 이를 집필하였는데, 다만 이도 ≪군주론≫과 마찬가지로 그의 생전에 빛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로마사 논고≫는 일본식 작명으로, 이의 실제 제목은 ‘티투스 리비우스의 처음 10권에 대한 강의’(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o)입니다. 결국 ≪로마사 논고≫는 고대 로마의 역사가였던 리비우스(BC59∼AD17)가 지은 총 140권의《로마사》중 그 당시에 발견된 제1권부터 제10권까지 수록된 로마 공화정 시대의 역사적 사례를 재료로 하여, 마키아벨리 나름의 해석과 논평을 덧붙인 것입니다.

‘공화국’ 로마?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는 많습니다. 근엄한 황제와 그를 호위하는 화려한 근위병들, 노회한 정치인들로 가득 찬 원로원, 이민족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강건한 로마군단 등 거의 모든 영화와 드라마는 화려했던 로마 제국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러한 로마가 그 이전에는(여러분이 많이 들어봤던 카이사르나 옥타비아누스가 등장하기 전에는) 제정(帝政)이 아니라 공화(共和)정체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리비우스의 ≪로마사≫도 바로 그 공화국 로마의 역사 이야기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제정 로마에 매료되나, 정치학자나 역사학자들은 오히려 공화국 로마에 더욱 관심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반인들과 학자들의 관심의 차이는, 공교롭게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에 대한 관심의 온도차를 닮았습니다.

고대 로마에서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시작된 것은, 고대 아테네에서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적 개혁이 있을 무렵인 BC 509년입니다. 그러한 로마 공화정체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기구는 집정관(Consul), 원로원(Senatus), 그리고 민회(Comitia)와 민회에서 선출된 호민관(Tribunus Plebis)이었습니다.

집정관은 왕정시대의 군주를 대신한 최고위 행정관직으로 동등한 권한을 가진 2명(임기 1년)으로 구성되었는데, 원로원에서 선출되었습니다. 원로원은 300명 정도의 종신직 귀족들로 구성되었는데, 민회에서 통과된 법령에 대한 재가․고위직 승인․재정 등의 막강한 권한을 가졌습니다. 호민관은 민회에서 2-6명(임기 1년)이 선출되었는데, 그들은 집정관이나 귀족들로부터 일반 시민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평민의 대변 기구였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독특한 임시기구로 독재관(Dictator)이 있었는데, 전쟁이나 내란과 같은 위기적 상황에서 집정관중 1명을 임기 6월의 독재관으로 임명하여 전권을 행사하도록 하였습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로마 공화정체를 고대의 민주정체의 하나로 편재시켜 설명하기도 하지만, 로마 공화정체는 명백히 민주정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당대의 고대 아테네 민주정체와 비교하여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고대 아테네도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상의 구분은 있었지만, 모든 시민들은 그 신분과 상관없이 정치적으로 평등한 지위와 권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공직에 진출할 평등한 기회를 가졌었고, 주요한 정치적 결정권은 모든 시민들의 집합기구인 민회가 보유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 공화정체에서는 집정관과 원로원이 막강한 정치권력을 보유하였는데, 오직 귀족 계급만이 그러한 자리에 임명될 수 있는 정치적 특권을 가졌고, 민회는 소집이나 안건  등에서 집정관과 원로원의 통제를 받았고, 시민들은 민회보다는 자신들의 대변기구인 호민관을 통하여 정치에 관여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고대 로마의 귀족적 성격은 이후 많이 희석되어 부유한 평민들도 공직에 진출할 자격이 주어지고 민회의 자율성도 커졌지만, 아테네의 귀족들이 평민들에게 완전히 정치권력을 내준 것과 달리, 고대 로마에서는 정치에서의 신분상의 차별과 위계의 근간은 여전히 유지되었습니다.    

이러한 로마 공화정체는 도시국가였던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 전체로 그리고 지중해 전체로 성장하면서(한니발 장군으로 유명한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도 로마의 속국이 됩니다) 세계적 군사강국이 되고, 동시에 무역이 확대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빈부격차가 커져 평민파와 귀족파의 대립이 극심해지면서, 마리우스․슐라․카이사르와 같은 군인 실력자가 연속적으로 등장하고(그리스적 용어로 하면, 이들은 ‘참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국에 BC 27년 제정의 시발점이 된 옥타비아누스의 ‘원수정(Principate)’이 시작되면서 공화국 로마는 종말을 맞게 됩니다.

▲ 빈센초 카무치니, '카이사르의 죽음'(1798년), 카이사르(영어명 시저)는 고대 로마공화정 말기의 군인으로 대외 원정으로 얻은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원로원의 공화주의자들은 그가 황제가 되려는 것을 두려워 하여 그를 암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암살이 오히려 로마 제정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로마의 여론은 암살자들의 예상과 달리 숨진 카이사르에 대한 동정론으로 바뀌었고, 암살자들은 모두 자살하거나 처형되었고, 종국에 카이사르가 후계자로 지목하였던 옥타비아누스가 첫 황제의 자리에 올라 제정시대를 열었습니다.

위대한 고대 로마공화국의 원동력은

많은 사람들은 후진적인 일개 도시국가였던 로마가 지속적으로 안정을 이루며 성장하여 종국에 세계제국을 이룩한 것은 제정 로마의 업적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공화정 로마의 업적입니다. 제정 로마는 공화정 로마의 위대한 성취를 물려받아 유지하였을 뿐입니다.

고대 로마인의 후손인 마키아벨리가 이러한 고대 로마공화국의 위대한 성취를 이야기 하려는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5개 소국가로 분열되고 외세의 간섭으로 혼란만 거듭하는 당대의 이탈리아인들에게 자신들의 위대하였던 과거를 알려주고, 그 위대한 성취를 가능하게 하였던 고대 로마공화국의 원동력을 밝혀 그것을 재현하고픈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옛 조각, 법률, 의술 등 따르면서도) 사람들은 공화국의 질서, 국력유지, 군대, 전쟁, 민권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군주나 시민 누구도 옛날의 선례를 따르지 않는다……그들은 역사책을 읽어도 그저 거기에 있는 수많은 사건을 읽는데 재미를 느낄 뿐 그것을 모범으로 삼고 그 선례에 따르는 일은 어렵거나 불가능한 일이라고 미리 단정하고 있다. 이는 역사정신을 무시하고 있는데서 비롯된 것이다……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이러한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를 위해……이 책을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가 보는 고대 로마공화국의 안정과 번영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그 원동력을 고대 로마공화국의 ‘혼합정체’적 정치구조와 ‘공화주의’ 정치이념, 그리고 그가 ‘비르투(virtū)’라고 표현한 특유의 정치문화 내지는 시민정신에서 찾고 있습니다(물론 마키아벨리가 위 3가지로 정리하여 답을 준 것은 아닙니다).

후자의 공화주의와 비르투는 우리에게 너무나 생소하고 난해한 개념입니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회에 살펴보고, 오늘은 혼합정체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합니다. 다만 공화주의와 비르투는 혼합정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그것은 혼합정체 구상에서 비롯된 것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아테네에서 로마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폴리비우스로

이제껏 정치고전 읽기를 보아왔던 독자라면, 공화주의나 비르투와 달리 ‘혼합정체’는 익숙한 개념일 것이고, 바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를 떠올릴 것입니다(후기 플라톤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당대 아테네 민주정체의 쇠락의 원인을 민중의 무지와 부패, 귀족과 평민(혹은 과두파와 민주파)간의 대립의 격화 때문이라고 진단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느 한 계급이나 정치세력에 의한 일방적 권력 독점을 통한 배제와 억압의 정치가 아니라, 서로간의 조화와 통합을 통한 정치로서만 공동체의 안정을 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이상적 대안으로 주요한 정치적 지위와 권한은 귀족들이 보유 행사하고 시민들은 기초적인 공민권만 갖는, 귀족(과두)적 요소와 민주적 요소를 혼합한 혼합정체를 제시합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혼합정체 이상은 실질적으로 고대 로마공화정에서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고대 로마공화정은 모든 시민들에게 기초적인 시민권과 공민권을 부여하되, 모든 시민의 집합인 민회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호민관을 통하여 그 자신들의 권리와 이익을 정치적으로 대변토록 하고, 주요한 정치적 지위와 권한은 귀족들과 귀족들의 집합인 원로원에 부여하였습니다.

이렇듯, 그리스에서 로마로의, 민주정체에서 혼합정체(공화정체)로의 역사적 흐름을 상징하는 인물이 폴리비우스(Polybios BC 200?∼118?)입니다. 폴리비우스는 그리스의 엘리트 이자 장군이었으나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로마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우연히 로마의 실력자인 스키피오의 눈에 띄어 로마의 지성으로 떠오른 인물입니다. 그는 그리스와 카르타고를 정복하고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며 팽창해 나가는 당대의 로마를 보며, 과연 조국 그리스를 몰락케 하고 로마를 세계제국으로 성장케 한 원동력이 무엇일까 고민하였고, 그 결과를 ≪역사≫에 남겼습니다.

폴리비우스의 분석의 토대는 다분히 아리스토텔레스적입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정체를 6개로 분류하고, 이러한 정체들은 그 내부의 분쟁과 부패로 생성과 소멸을 번복하며 순환(왕정→참주정→귀족정→과두정→민주정→폭민정)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단명과 불안정은 그 각각의 정체가 하나의 원리에 의하여 지배되는 단순정체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이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혼합정체가 바람직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혼합정체적 성격을 가장 잘 구현한 것이 당시의 로마이고, 로마가 단기간에 도시국가 수준에서 세계제국 규모의 수준으로 성장한 것은 군주제(집정관), 귀족제(원로원), 민주제(민회)가 혼합된 정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위 세 정치세력이 안정기에는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어 분란과 부패를 방지하고, 위기시에는 서로 협력과 조화를 통하여 모든 구성원의 힘을 모아 낼 수 있어, 로마의 위대한 성취가 가능하였다고 보았습니다.

폴리비우스의 이러한 인식, 즉 단순정체보다 혼합정체가 바람직하고, 로마의 공화정체를 혼합정체로 규정하고, 로마의 영광을 그것에 찾는 논리는 공화정 말기의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키케로(Cicero, BC 106∼43)에게서 거의 그대로 반복됩니다. 다만 폴리비우스가 이러한 로마 공화정의 혼합정체성 속에서 정치세력간의 견제와 균형을 통한 공동체의 견고함과 성장을 강조하는 반면, 키케로는 정치세력간의 견제와 균형보다는 통합과 조화를 통한 안정과 정의의 실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 폴리비우스 동상.

폴리비우스, 마키아벨리의 숨겨진 교사

고대 로마공화국의 안정과 번영의 원동력을 찾으려는 ≪로마사 논고≫에서의 마키아벨리의 인식은 폴리비우스의 그것과 거의 동일합니다. 비록 마키아벨리가 ≪로마사 논고≫에서 자신의 조상이자 당대 로마의 무공을 정열적으로 칭송한 리비우스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그 배후에는 폴리비우스가 막중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정치체제론, 정체순환론, 혼합정체론은 폴리비우스의 그것을 거의 베낀 것입니다. 심지어 마키아벨리가 고대 로마공화정체를 (고대 로마와 같은 혼합정체였던) 고대의 스파르타와 당대의 베네치아를 비교하며 그 우수성을 강조한 부분마저, 로마공화정체를 당대의 스파르타와 카르타고와 비교하며 그 우수성을 분석한 폴리비우스의 태도를 빼어 닮았습니다.

마키아벨리도 폴리비우스와 마찬가지로, 고대 로마공화정은 집정관․원로원․호민관(민회)을 기본으로 하는데, 그것은 각각 군주정․귀족정․민주정의 요소로 결국 로마공화정은 혼합정체를 근간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들 귀족과 민중, 원로원과 민회간의 항시적인 감시와 경계, 견제와 균형을 통하여 내부적으로 시민 전체의 자유를 보호하고 일방의 자의적 지배를 통제하고 부패를 방지하여 정치적 안정을 달성하였다고 보았습니다. 

(기본적 정체로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 있고, 그것의 나쁜 변형으로 전제정 과두정 폭민정이 있음을 언급한 후) 이들 정체는 어느 것이나 동등하게 불리한 점이 있다. 앞의 셋은 영속성을 갖고 있지 않고, 뒤의 셋은 부패의 요소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입법자는 그 각각에 내재된 폐해를 충분히 인식하고 각각의 정체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도록 유의한다……(고대 로마에서 집정관, 원로원, 호민관 제도가 성립된 경위를 이야기한 후) 이로써 로마 공화국은 정치의 3요소가 각각 일정한 권력을 갖게 되어 더욱 공고해졌다. 로마는 이러한 행운 덕분에, 왕정과 귀족정을 거쳐 민주정으로 변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권위를 모두 빼앗아 귀족에게 주지도 않고, 귀족의 것을 빼앗아 민중을 기쁘게 해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세 권력이 균형을 잘 이루어 완전한 공화국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완성에 도달한 원인은 다름 아닌 평민과 원로원의 반목에 있다. 

귀족과 민중의 끈임 없는 싸움을 비난하는 것은, 로마의 자유를 유지한 원인 자체를 비난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그들은 그 싸움에 의해 태어났다는 것과 그럼에도 그것을 낳아준 고마운 결과는 알지 못한 채 고함과 소동 쪽에만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모든 정체에 반드시 두가지 대립 원인, 즉 귀족과 민중의 이익이 존재한다는 것과 자유를 위한 법령은 어떤 것이든 이들 간의 알력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오히려 이러한 대립과 분쟁 덕분에 모든 사람의 자유를 위한 합당한 법령이 태어난 것이다.

근대 이전의 정치사상사에서 혼합정체론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폴리비우스 키케로 등 굵직 굵직한 사상가들의 보도(寶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혼합정체를 통한 계급간의 견제와 균형, 조화와 통합으로 정치적 안정을 기하고, 공동체의 발전을 도모하려고 하였습니다. 즉 평민들에게도 일정한 정치적 지위를 부여하고 권력을 분점시켜 그들의 공동체에 대한 지지와 후원을 이끌어내 정치적 안정을 달성하고, 유능하고 경험 많은 귀족과 엘리트들에게 높은 지위를 부여하고 중대한 권한을 행사토록 하여 대내외적 발전을 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혼합정체 구상은 근대 혁명후 근대 정치질서를 구축하는 정치엘리트들에게도 중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혁명이후 미국과 프랑스에서 구체화된 국가 내 권력분립 제도(예컨대 로크의 2권 분립이나 몽테스키외의 3권 분립), 귀족 중심의 상원과 시민 대표의 하원으로 양분된 양원제 제도, 귀족과 부유층에게만 선거․피선거권 부여 제도는 이러한 혼합정체론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마키아벨리, 古來의 寶刀를 새롭게 벼리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가 ≪로마사 논고≫를 통하여 고래(古來)의 보도에서 새롭게 벼린 내용은 무엇일까요? ≪로마사 논고≫에서의 마키아벨리의 혼합정체 주장에는 이전의 그것과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혼합정체에서 ‘시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것이 고대 로마공화정의 안정과 번영을 가능케 한 특유한 점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학자들은, 마키아벨리의 혼합정체 주장을 그 이전의 고전적 혼합정체 주장과 대비하여 ‘시민적 혹은 민중친화적’이라고 분별하기도 합니다.

이전의 혼합정체론 주장자들은 자신들의 혼합정체에서, 귀족계급이 지적 능력이나 경험 면에서 민중(시민)보다 월등한 자질을 가졌다며 귀족계급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비록 귀족계급이 시민계급보다 뛰어난 역량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욕망과 지배욕으로 인하여 분란의 계기가 되는 경우가 더 많고, 시민계급은 그러한 욕망과 지배욕보다는 ‘자유’에 만족하기에 혼합정체의 안정과 발전의 기반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나라를 세우는 데 있어서 현명함으로 칭송받는 사람들은 대부분의 제도 가운데 자유의 수호역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이 옹호가 잘 되는 경우 민중은 다소 오랫동안 자유를 누렸다. 귀족과 평민 어느 쪽에 자유의 수호역을 맡기는 것이 이를 더욱 확실하게 지켜 낼 수 있을까? 옛날 스파르파인들과 지금의 베네치아인들은 그것을 귀족의 손에 맡겼다. 그런데 고대 로마인들은 평민의 생각대로 움직였다……고대 로마인들을 예를 들면, 귀족은 지배욕에 불타고, 평민은 그 지위 이하로 전락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므로, 전자보다는 후자가 자유를 더욱 간절히 원함을 알 수 있다……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거의 언제나 가진 자들이었다. 가진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일어나면 뭔가를 더 손에 넣으려는 욕심이 생겨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다른 것을 더 보탤 수 있을 때 뿐인 것이다. 한심한 것은, 그들의 끝없는 야심이 소유욕이 전혀 없는 사람들마저 불온한 방향으로 부추기고 있다는 점이다

마키아벨리는 고대 로마공화정이 광범위한 인민의 지지와 후원에 기반한 혼합정체였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또 다른 공화정체였던 고대의 스파르타와 당대의 베네치아를 비교합니다. 그는 이들 공화정체는 지속적으로 평민의 공직 진출을 배제하고 귀족들에게만 정치권력을 맡기거나 외국인에 대하여 폐쇄적으로만 대응하는 ‘저변이 좁은 정체’였지만, 고대 로마공화정은 귀족과 평민의 불화 속에서도 평민의 공직 진출과 정치적 권한을 지속적으로 넓히고 외국인과 외국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저변이 넓은 정체’였기에, 단순한 정치적 안정과 자위(自衛)의 한계를 넘어, 세계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고대 로마의 입법자들이 단지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려고 했으면, 지금의 베네치아인들이 한 것처럼 민중을 동원한 싸움을 하지 않거나 고대의 스파르타인들이 한 것처럼 외국인을 시민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고대 로마인들은 이 두가지 수단을 모두 취했기에 민중의 수와 세력이 증가했고, 그만큼 분쟁의 원인도 배가되었다……그러나 고대 로마인들이 (지금의 베네치아인들과 고대의 스파르타인들처럼) 이러한 분쟁을 근절하려고만 하였다면 스스로 대국이 될 수단을 남김없이 없애버리는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민중과 원로원(귀족)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반목을 로마에 번영을 가져다주는 필요악으로 여기고 간과해서는 안된다.

▲ 마키아벨리 묘비.

‘시민적 혼합정체’는 민주적인가?

마키아벨리가 비록 그 이전의 아리스토텔레스 폴리비우스 키케로와 다르게, 시민 중심의 나아가 저변을 지속적으로 확장하는 혼합정체를 내세웠다고 하여 그를 ‘민주주의’ 주장자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마키아벨리를 포함하여 고대의 정치사상가들의 ‘혼합정체’ 주장은 모두,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동등하다는 민주적 관념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귀족의 계급적․정치적 특권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혼합정체의 시조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2천년 뒤 후계자인 근대 정치엘리트들의 혼합의 의도는 민주주의가 아닌 反민주주의를 위한 것이고, 혼합정체의 이상을 현실적으로 실현한 고대 로마공화정체와 근대의 정치질서도 계급적 차별과 위계에 기초한 것으로 결코 온전한 민주정체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마키아벨리를 포함하여 이들 모두가 말하는 ‘시민’이란 장인․상인․농민 등 공동체의 안위와 번영에 실질적으로 이해관계를 가졌다고 전제되는 계층에 한정됩니다. 그들이 말하는 시민과 정치 과정에서 사회경제적 자립의 수단을 갖지 못한 노동자․빈민․노예․여성 등은 제외되고 배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지금과 같은 민주적 사고를 갖지 않았다고 그를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인민들의 정치적 평등을 주장하는 민주적 사고는 그로부터 300여년이 지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으니까요. 적어도 그가 생존하였던 시대를 고려한다면, 그는 누구보다도 민주주의적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마키아벨리는 고대 로마공화국의 안정과 번영의 원동력을, 그들의 ‘혼합정체’적 정치구조  외에 ‘공화주의’ 정치이념과 그가 ‘비르투(virtū)’라고 표현한 특유의 시민문화에서 찾고 있습니다. 앞서의 혼합정체가 고대 로마공화국에서 골격과 같은 역할을 한다면, 공화주의와 비르투는 그 속에 흐르는 정신과 피의 역할을 한다고 할 것입니다. 이제 그 공화주의와 비르투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최용현  choiyh6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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