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읽기

정치고전들은 수천,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다시 새롭게 번역되고 해석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정치고전 중에 대표적인 것이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의 ≪군주론(Il principe)≫입니다. 어느 출판사에 따르면 ≪군주론≫은 현재 우리나라에 27종이나 번역 출간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군주론≫은 상업성과 대중성도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군주론≫과 그의 정치사상 보다 많은 번역서와 해설서를 가진 정시사상가는 아마도 마르크스 밖에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왜 그간 수도 없이 번역되고 해설되었을 그의 ≪군주론≫을 학자들은 다시 번역하고 거기에 자신만의 해석을 덧붙이기를 반복할까요? 왜 수많은 독자들은 5백년이나 지난 낡아빠진 ≪군주론≫을 지금도 밤새워 읽고 그의 식견에 다시 감탄할까요? 

▲ 마키아벨리.

마르크스에 버금가는 그에 대한 관심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15세기 후반의 유럽은 중세적 질서가 서서히 무너지고,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서유럽 국가에서는 절대군주가 등장하여 중앙집권화를 적극 추진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이탈리아는 로마교황청, 나폴리 왕국,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공국, 피렌체 공화국으로 5개 소국가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이들 간에 대립과 주변 외세의 간섭으로 끈임 없이 혼란과 전쟁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집안은 귀족은 아니었지만, 피렌체에서는 공직자를 다수 배출할 정도로 상당한 비중을 가진 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날 무렵에는 가세가 기울어 법률가였던 그의 부친은 부채자로 피렌체 정부의 문서에 등재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다만 공화주의에 대한 신념과 인문학에 대한 열정만큼은 남달랐던지, 마키아벨리는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공화주의와 인문학에 대한 지식을 충실히 터득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29세에 피렌체 공화정부의 서기관직에 올라 그는 주로 외교 업무를 맡았는데, 그의 능력이 얼마나 출중하였는지 계속적으로 주변 4개국과 프랑스, 독일 등 여러 국가에 특사로 파견되어 외교적 담판과 적정(敵情) 탐색 업무를 맡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마키아벨리는 절대국가로의 세기적 전환과 그와 정반대로 치닫는 이탈리아의 한계, 그리고 냉철한 현실 판단력과 담대한 이상을 가진 정치지도자의 중요성을 명확히 목도할 수 있었고, 이는 그의 ≪군주론≫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화국 이전의 옛 지배자였던 메디치(Medici)家가 스페인을 등에 업고 18년만에(1512년) 피렌체에 복귀하면서, 마키아벨리의 수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바로 공직에서 추방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반역 음모에까지 연루되어(쿠테타 주도자들의 쿠테타 성공시 영입할 유명인사 명단에 그의 이름도 적시되어 있었습니다) 수차 고문을 받고 투옥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메디치家의 일원이 교황으로 즉위함에 따라 바로 특별사면 되어 석방되었지만, 그에게 이전의 공직과 안락한 생활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피렌체의 교외에 칩거하며, 역사서를 읽으며 고대 로마의 공화주의(제정 이전의 로마공화정체를 의미합니다)를 연구하고, 가끔씩 공화주의자들의 모임에 참석하기도 하고(그의 또 하나의 대표적인 저서인 ≪로마사 논고≫는 이 과정의 산물이라고 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공직에 다시 진출하기 위하여 책을 저술하고 심지어 노래까지 작곡하여 메디치家에 헌정하고(≪군주론≫도 그런 헌정의 하나였습니다), 주위의 유력자에게 이를 도와달라고 청탁을 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 눈물겨운 노력을 펼치기도 합니다.

그런 노력의 결과였는지, 그는 메디치家로부터 몇 번의 임시 임무를 위임받고 은사금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그는 메디치家의 하수인으로 낙인찍혀, 그의 말년에(1527년) 피렌체에서 메디치家가 쫓겨나고 공화정이 복원 되었을 때 그는 다시 공직에 복귀할 희망에 부풀었지만, 공화정부로부터 냉대만 받게 되고 낙담한 나머지 1달도 못되어 쓸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 <<군주론>>.

기회주의 vs 이행의 문제

이처럼 당대의 피렌체가 왕정(메디치家)과 공화정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한 것처럼, 마키아벨리의 대표적 저서인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 사이에도 심각한 간극이 존재합니다. 그는 ≪군주론≫에서는 절대군주정을 옹호하고 있는 반면, ≪로마사 논고≫에서는 오히려 공화정(反군주정)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역사상 어느 정치사상가도 이렇게 상반된 정치체제에 똑같은 비중의 관심과 애착을 표현한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그의 상반된 태도에 대하여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데, 대체로 두가지 해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는 그의 기회주의적 태도를 반영한 것으로, 그는 본래 공화주의자였지만 군주의 환심을 사기 위한 필요에서 ≪군주론≫을 저술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1513년 메디치家에 공직을 구걸하고자 ≪군주론≫을 저술하여 이를 헌정하며(마키아벨리는 1513년 단 4개월만에 ≪군주론≫을 완성하였는데, 이를 실제 메디치가에 헌정하였는지, 헌정하였다면 그가 헌정의 대상으로 지목한 로렌초 메디치가 이를 읽었는지 여부는 불분명합니다. ≪군주론≫이 출간된 것은 그의 사후인 1532년입니다), 마키아벨리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군주의 총애를 구하는 이들은 그들이 가진 것들 중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나 군주가 가장 기뻐할 것을 가지고 군주에게 접근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군주는 말, 무기, 금박 입힌 천, 보석 그리고 군주의 위엄에 적합한 장신구들을 종종 선물로 받곤 합니다. 저 또한 전하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무언가 드리고 싶지만, 제가 가진 것 중에서는 최근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경험과 고대사에 대한 공부를 통해서 배운 위대한 인물들의 행위에 대한 지식만큼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저는 그러한 것들에 대한 오랜 기간의 성실한 성찰의 결과를 한 권의 소책자로 만들어 전하께 바치려고 합니다.……그리고 전하께서 그 높은 곳에서 어쩌다가 여기 이 낮은 곳에 눈을 돌리시면, 제가 엄청나고 지속적인 불운으로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 아시게 될 것입니다.

또 다른 해석은, 양자를 서로 차원이 다른 국면의 문제로 해석하는 것으로, ≪군주론≫은 1인의 강력한 리더십을 통하여 강력한 신생국가를 건설하거나 공화정체에서의 일시적 위기국면을 타개하는 단계를, ≪로마사 논고≫는 그 이후의 안정된 국가의 정상적인 운영 단계를 서술한 것으로 이해하는 입장입니다.

일반 법칙으로 어떠한 왕국이나 공화국도 한 인물에 의해 조직되지 않는다면, 완벽하게 조직되거나 철저히 개혁되는 경우란 거의 없다. 어떤 나라에서도 개혁의 형식을 결정하는 것은 단 한 사람이어야 하며, 그 한 사람의 정신에 의하여 그 조직이 좌우되어야 한다……(그러나) 계속해서 그 한 사람이 그 무거운 짐을 떠맡는다면 그 국가는 오래갈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의 수호자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그 존속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그 국가는 영속할 수 있다. - ≪로마사 논고≫중

정치철학을 연구하는 강정인 교수는 이를, 이상주의자들의 이상 실현을 위한 과도기적 이행의 문제로 설명합니다. 이는 완전한 민주체제인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위하여 전단계로 과도기적 독재(‘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상정할 수밖에 없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패러독스와 유사합니다.

이상주의와 현실주의가 중첩적으로 교차하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어떤 의미에서 이상주의자들이 흔히 간과해 온 이른바 ‘과도기’의 문제를 마키아벨리가 예민하게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마키아벨리는 ‘최선의 정치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떤 전략과 전술을 채용해야 하는가’라는 이행기의 방법론적 문제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런 실천적 감각은 현실 정치에 대한 냉정한 분석을 통해 ‘신생 군주에 의한 강력한 국가의 건설’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이처럼 강한 국가를 건설하는데 필수적인 도구가 바로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가 제시한 신생 군주라는 영웅……이었다. - 강정인, ‘니콜로 마키아벨리, 서양근대사상의 탄생’ ≪서양 근대 정치사상사≫

▲ 지난 2013년은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저술한 지 500년이 된 해였는데, 이를 기념하여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사진은 당시 열린 학술대회의 한 장면입니다.

꾸로 선 정치학을 바로 세우다

그러나 ≪군주론≫이건 ≪로마사 논고≫건,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은 고․중세부터 내려오던 지배적인 정치사상에 대한 혁명적 전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고․중세에서 정치 혹은 정치학은 다른 어떤 것의 부수물이거나 종속적인 것이었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학이란 윤리학의 일부 혹은 그의 연장에 불과하였고, 그들은 정치를 정의, 좋음의 이데아, 훌륭한 삶 등의 실현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중세에는 정치학이란 신의 계시에 탐구하는 신학의 부수물에 불과하였고, 정치란 신의 계시의 실현이고, 정치제도나 질서는 종교적 제도나 질서의 하부구조로만 인식되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이러한 윤리와 종교에 구속된 정치 혹은 정치학의 독립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이전의 고․중세의 정치관, 즉 철학적 원리나 종교적 가르침부터 정치를 추출하는 사고에 반대하고, 윤리적 목적이나 종교적 가치를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의 정치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는……이론이나 사변보다는 사물의 실제적인 진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현실 속에 결코 존재한 것으로 알려지거나 목격된 적이 없는 공화국이나 군주국을 상상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것을 행하지 않고,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고집하는 군주는 권력을 유지하기 보다는 잃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군주에 관한 환상적인 이야기들은 밀쳐두고 실제로 일어나는 것들을 고려하겠습니다.

정치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마키아벨리에게는 정치를 ‘권력’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키아벨리 정치사상의 제1 특징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새로운 정치관에 따라(이러한 정치관이 그의 저서에서 명백히 표현되지는 않았습니다) ≪군주론≫에서는, 군주에게 윤리적․종교적 규범에 구애받지 않고, 또한 일시적 충동이나 정념에서 벗어나, 권력의 획득․보전․확대의 관점에서 합리적․계산적 숙려에 따라 정치를 운영할 것을 충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군주는 여우의 교활함과 사자의 용맹함을 동시에 가져야

신중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권력기반을 파괴할 정도의 악덕으로 인해서 악명을 떨치는 것을 피하고, 가사 정치적으로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악덕일지라도 가급적 피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그러나 악덕 없이는 권력을 보존하기 어려운 때에는 그 악덕으로 악명을 떨치는 것도 개의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견 미덕으로 보이는 일이 오히려 자신의 파멸을 초래하고, 일견 악덕으로 보이는 일이 오히려 결과적으로 자신의 안전과 번영을 가져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군주는 모름지기 짐승의 방법(힘에 의지하는 것)과 인간의 방법(법에 의지하는 것)을 모두 이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짐승의 방법중에는 여우와 사자를 모방해야 합니다. 사자는 함정에 빠지기 쉽고, 여우는 늑대를 물리칠 수 없기에, 함정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여우가 되어야 하고, 늑대를 혼내주려면 사자가 되어야 합니다……군주는 특히 신생군주는 좋다고 생각되는 방식으로 처신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명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때론 배신하고, 때론 무자비하고, 때론 비인도적으로 행동하고, 때론 신앙도 무시하도록 강요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운명과 상황이 변함에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그것에 맞추어 자유자재로 바꿀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하며, 가급적이면 올바른 행동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하지만, 필요하다면 악행을 저지를 수 있어야 합니다.

마키아벨리 정치사상의 또 하나의 특징은 ‘결과주의’입니다. 정치 그리고 그것의 수단으로서의 권력의 목적은 ‘군주 혹은 공동체의 안전과 번영’이고, 군주나 정치인의 정치행위는 오직 그러한 목적(결과)에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 으로만 평가받아야 하며, 군주와 정치인은 자신의 도덕․종교․정념보다는 항상 이러한 결과를 먼저 염두에 두고 처신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치는 국가의 안전과 번영이라는 결과로만 평가를 받아야

모든 인간의 행동에 관해서, 특히 직접 설명을 들을 기회가 없는 군주의 행동에 관해서 보통 인간들은 그 결과에만 주목합니다. 군주가 전쟁에서 이기고 국가를 보존하면, 그 수단은 모든 사람에 의해서 항상 명예롭고 찬양받을 만한 것으로 판단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은 외양과 결과에 감명 받기 때문입니다.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왕국이나 공화국을 세우기 위하여 무자비한 행위에 이르더라도, 그것을 비난해선 안된다. 인간의 행위가 실제 나쁘더라도 그 결과만 좋으면 된다. 단 여기에는 같은 무자비한 행위라도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만 대상으로 해야 한다……자기 나라의 안전이 걸려 있을 때 정의냐 부정의냐, 자비로운 것이냐 잔인한 것이냐, 칭찬받을 만한 것이냐 수치스러운 것이냐의 문제는 결코 고려해서는 안된다. 대신 양심의 가책 따위를 일체 무시한 채, 나라의 운명과 자유를 지킬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최대한 따라야 한다. - ≪로마사 논고≫중

그의 이러한 결과주의적 정치관은 베버(Max Weber, 1864∼1920)의 ‘책임윤리(ethics of responsibility)’를 연상케 합니다. 베버는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인의 윤리를 ‘신념윤리(ethics of conviction)’와 ‘책임윤리’를 구분하고, 정치인에게는 자신의 신념도 필요하지만 그러한 신념의 올바름이나 의도의 선함을 강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결과에 대한 신중한 판단과 그것에 대한 책임이 더욱 중요하다며 정치인에게서 그러한 책임윤리의 부재를 죄악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베버는 신념윤리도 정치윤리의 한 축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키아벨리의 결론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군주가 공동체의 안전과 번영을 위하여, 또는 자신의 권력과 영광을 위하여 어떻게 처신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군주론≫에서의 그의 여러 비유는, 만약 이 작은 책자가 위대한 정치고전중 하나라는 포장만 없었다면 훌륭한 처세(處世)지침서로만 받아들일 정도로, 포로노 잡지만큼 노골적이고 적나라합니다. 어쩌면 바로 그러한 측면이 대중을 매료케 하여, ≪군주론≫을 다시 읽게 만드는지도 모릅니다.

▲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

≪군주론≫, 포르노 잡지만큼 노골적인

인간들이란 다정하게 대해주거나 아니면 아주 짓밟아 뭉개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사소한 피해에 대해서는 보복하려고 들지만, 엄청남 피해에 대해서는 감히 복수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려면 그들의 복수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주 크게 주어야 한다 / 인민들은 변덕스럽기 때문에 한 가지 일에 대해서 설득하기는 쉬우나, 그 설득된 상태를 유지하기란 어렵다 / 인간이란 어버이의 죽음은 쉽게 잊어도, 자기 재산의 손실은 여간해서 잊지 못한다 / 가해행위는 모두 일거에 저질러야 한다. 그래야 그 맛을 덜 느끼고 반감과 분노도 작게 일어난다. 반면에 은혜는 조금씩 베풀어야 한다. 그래야 그 맛을 더 많이 느낀다 / 군주는 미움 받는 일은 타인에게 떠넘기고, 인기를 얻는 일은 자신이 친히 해야 한다 / 군주는 선한 것으로 분류되는 성품을 실제로 갖출 필요는 없지만, 갖춘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성품을 갖추고 언제나 실천에 옮기는 것은 해롭고, 단지 갖춘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언제나 유용하다

대부분의 처세술 책자나 포로노 잡지는 젠체하는 신사들이 공개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혼자 방안에서 숨어 탐닉할 만한 것입니다. ≪군주론≫의 운명이 그렇습니다. 마키아벨리 사후에 출간된 ≪군주론≫은 교황청에 의하여 금서목록으로 등재되고 악마의 책으로 치부(프로이센의 계몽군주였던 프리드리히 2세는 ≪군주론≫을 혐오하여 스스로 ≪反군주론≫이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습니다)되었던 반면, ≪군주론≫의 위와 같은 매력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은밀히 숨어서 이를 탐독토록 하여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는 학문적으로는 ‘영광’입니다. 사실 교황청이나 정권에 의하여 금서목록이 되었다는 것은 그 저서가 그만큼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자신의 이름 뒤에 ‘이즘(-ism)'이라는 꼬리표까지 붙은 정치사상가는 겨우 3-4명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마키아벨리즘? 통상 우리는 이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를 희생시키는 처세방식‘이나 ’자신(또는 파당)의 이익과 권력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행태‘를 지칭하는데 사용합니다. 이것이 마키아벨리의 철저한 反도덕적․反윤리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즘이 이러한 의미라면, 마르크스가 자신의 사상이 도식적이고 속물적인 이데올로기로 치닫는 것을 보고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라고 말한 것처럼, 마키아벨리도 “나는 마키아벨리스트가 아니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마키아벨리에게 있어 정치와 권력의 목적은 공동체(군주국가의 경우 군주)의 안전과 번영입니다. 역으로 정반대의 경우, 즉 세속적 마키아벨리즘처럼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과 권력을 위하여 공동체 전체의 이익과 번영을 희생시킬 때, 마키아벨리는 이를 ‘부패’라 명명하고, 이를 강력히 비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마키아벨리즘은 ‘거꾸로 선’ 마키아벨리입니다.

마키아벨리즘, 오히려 ‘거꾸로 선’ 마키아벨리

이처럼 ≪군주론≫은 정치사상적으로는 고․중세부터 내려오던 지배적인 정치관에 대한 혁명적 전환을 내포하는 정치와 정치학의 독립선언서라고 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권력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자 하거나 능숙한 처세의 교훈을 얻으려는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킬 만큼의 대중성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정치사상의 진수는 ≪군주론≫보다는 그의 또 다른 저서인 ≪로마사 논고≫에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군주론≫과 달리 그의 ≪로마사 논고≫를 읽은 일반 독자는 거의 없습니다. ≪군주론≫만큼의 상업성을 의심을 받아서인지, 많은 이들이 그것에 대한 제대로 된(?) 번역본조차 구하기 힘들다고 하소연 합니다. 이제 모든 전문가들이 말하는 ‘진정한’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을 찾아 ≪로마사 논고≫로 들어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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