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단식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저항의 수단으로 결행하는 단식.
야당대표의 단식에 국민은
불편합니다. 대화를 통한
타협의 정치가 필요합니다―

싯다르타가 도를 깨닫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은 29세 때였습니다. 인도 카필라 왕국(현재의 네팔)의 태자로 태어 난 싯다르타는 부왕의 뜻에 따라 이웃나라의 공주와 일찍 결혼해 아들까지 둔 유복한 젊은이였지만 인간의 삶이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윤회(輪廻)하는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자각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출가(出家)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싯다르타는 성장하면서 진리에 관해서 명상하기를 즐겨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궁전 안의 안락함이 모든 인간의 생활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궁 밖으로 나와 밭갈이 하는 농부를 보고 땀 흘려 수고해야 삶을 영위 할 수 있다는 인간 사회의 고통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새에게 잡혀 먹히는 벌레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쇠약한 노인을 보고는 인생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태어나서 병들어 신음하고 죽어야 하는 생로병사의 운명에 슬픔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싯다르타의 그러한 심정을 눈치 챈 아버지 부왕은 혹시 아들이 다른 많은 젊은이들처럼 출가하지는 않을까, 염려하여 16세의 나이에 골라 왕국의 공주 야소다라와 혼인을 시켰고 곧 아들을 낳았습니다. 부왕은 많은 미녀들을 시켜 자주 향연을 베풀어 아들을 즐겁게 해 주려고 했으나 오히려 그것이 출가를 재촉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싯다르타는 어느 날 밤, “번뇌에서 벗어나려면 깨우쳐야 한다”고 깨닫고 가족에게 무언의 이별을 고한 채 출가하였습니다. 이 출가에는 여러 동기가 함께 작용했지만 가장 중요했던 요인은 “무상한 이 세상의 괴로움을 어떻게 해결 할 것인가?”라는 끊임없는 의문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싯다르타는 백마를 타고 시종을 데리고 성문을 빠져 나갔습니다. 그는 바라문 고행자의 가르침을 받아 단식이라는 마지막 고행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정신을 집중하려고 허리를 땅에 대지 않고 결가부좌(結跏趺坐·양쪽 발을 각각 다른 쪽 넓적다리 위에 엇갈리게 앉는 부처의 좌법)를 유지 하는 등 온갖 고행을 거듭했으나 해탈에 이룰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삭발하고 옷을 갈아입고 구걸하면서 많은 수도자가 모이는 남쪽의 마가다 왕국을 향해갑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만족을 못하자 이번에는 네란자나 강가에서 단식과 불면의 고행을 계속합니다.

싯다르타는 몸을 씻고 마음을 가다듬어 심신을 맑게 한 뒤 마을 처녀가 갖다 준 젖과 죽으로 원기를 회복합니다. 그리고는 우르베라 촌의 보리수 밑에 풀을 깔고 법좌를 정하여 결가부좌를 하고 “깨닫지 못하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조용히 내관(內觀)의 고행을 계속합니다. 이 고행은 마음속에 있는 온갖 욕망을 끊어 없애며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러한 고행은 도를 닦는 마음을 좌절시키려고 달려드는 마귀(魔鬼)와의 싸움이었습니다.

라자그라하를 떠나 서남쪽으로 향한 싯다르타는 고행림(苦行林)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루벨라의 가야산에 있는 고행림은 수행법으로 선택한 수행자들이 찾는 장소였습니다. 고행은 명상과 함께 당시 수행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수행법이었습니다.

숲속에 들어 온 싯다르타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시도해 본 적이 없는 모진 고행을 시작했습니다. 가시덤불 위에 눕기도 하고, 쇠못을 박은 판자 위에 눕기도 했습니다. 거꾸로 매달리기도 하고, 양다리를 엇갈리게 한 후 무릎을 세우고 앉기도 했습니다. 한여름 지글거리는 뙤약볕에 몸을 태우기도 하고, 한겨울 추위 속을 맨몸으로 지내기도 했습니다. 호흡을 멈춘 채 온 몸이 터져버릴 것 같은 고통도 느껴봤습니다.

쇠똥을 먹기도 하고 참깨 한 알과 쌀 한 톨만으로 견뎠습니다. 때론 음식을 전혀 먹지 않는 단식(斷食)도 결행했습니다. 감식과 단식이 거듭될수록 싯다르타의 몸은 쇠약해졌습니다. 피골이 상접했고 정수리에 종기가 생겨 가죽과 살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머리는 부서진 호리병 같았고 눈에는 별이 어른거렸습니다. 몸은 부서진 수레처럼 허물어졌고 엉덩이뼈는 낙타의 다리 같았습니다. 손으로 배를 만지면 등뼈가 잡혔고 등을 만지면 뱃가죽이 잡혔습니다. 피부 색깔은 바래 잿빛이나 검은빛이었습니다. 살아 있으되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나가던 아이들이 콧구멍과 귓구멍을 찔러 보며 장난을 할 때도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 와서 보고는 침을 뱉고 오줌을 누기도 했습니다. 싯다르타는 마음의 흔들림 없이 꿈쩍하지 않고 고행을 계속했습니다. 그렇게 6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단식 당시 부처의 고행상(苦行像). 높이 83cm. 2~4세기 제조된 석불로 시크리에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파키스탄 라호르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싯다르타는 35세 되는 해의 12월 8일 이른 새벽에 드디어 대각(大覺), 즉 큰 깨달음을 얻고 생로병사의 본원을 끊어 없애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번뇌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 정적(靜寂), 즉 열반의 세계를 체현(體現)한 것이며, 올바른 자각을 얻어 눈을 뜬 부처가 된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는 이후 45년간 80세의 고령이 될 때까지 설법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불타는 최후의 목욕을 마치고 숲속으로 들어가 북쪽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누워 발을 포갠 다음 밤중에 제자들에게 최후의 가르침을 폈습니다. 그리고 쉬지 말고 수행에 임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조용히 쿠시나가라에서 입멸(入滅)하였습니다. 기원전 544년 2월 15일. 유골과 사리는 왕후, 귀족들이 분배하여 각자의 나라에 가지고 가서 탑을 세우고 봉양하였습니다.

인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마하트마 간디는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단식 투쟁을 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1918년부터 1948년까지 십 수차례 단식 투쟁을 했습니다. 그는 인도의 독립과 파키스탄과의 분리 독립을 반대하고 이슬람과 힌두교로 나뉘어 싸우는 두 종파의 화해를 주장하며 단식을 했습니다.

현대의 가장 유명한 비극적 단식은 1981년 북아일랜드 교도소에서 있었던 북아일랜드 통일주의자 23명의 수감자들이 자신들을 테러리스트가 아닌 정치범으로 대우할 것을 요구하며 벌인 단식입니다. 급기야 10명이 목숨을 잃은 이 사건은 전 세계의 비탄을 자아냈을 만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우리나라 현대사에도 심심찮게 단식행위를 목격해오고 있습니다. 유명한 정치적 행위로는 1983년 전두환 군사정권에 항의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23일간의 단식, 199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방자치 실시 관철을 위한 13일간의 단식, 2016년 문재인 대통령이 야당인 새정치 민주연합 의원시절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한 10일간의 단식이 있습니다.

2003년 경남 양산 천성산의 KTX터널공사에 반대하여 3년동안 5차례에 걸쳐 200일을 넘긴 지율스님의 단식, 2014년 세월호 희생자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의 46일에 걸친 단식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차가워진 날씨를 무릅쓰고 단식을 결행함으로서 온 국민의 시선을 모았습니다. 황 대표는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종료 반대, 공수처법 철회, 연동형비례제 저지 등 3개 사항을 즉각 수용하라며 극단적인 행동에 나선 것입니다.

황 대표의 단식에 야당은 즉각 ‘황제 단식’, ‘민폐단식’, ‘명분 없는 단식’ 등 곱지 않은 비평을 쏟아 내고 있지만 본인은 “죽음을 각오 한다”는 비장한 결의까지 내 보임으로써 정치권은 물론 국민의 시선을 온 몸에 받았습니다. 정치적인 행위만으로 보면 관심을 집중시키는 데는 일단 성공한 듯 보입니다.

하지만 황 대표의 단식을 보는 국민들의 심정은 불편합니다. 그는 거친 들판에서 자란 정치인이 아니라 꽃길을 걸어 온 정치인입니다. 극단적인 투쟁은 황대표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건강 역시 그래 보입니다.

2600년전 싯다르타의 고행은 인류의 영적 행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라건대 황대표의 단식이 국민을 위한 것이라면 제일 야당의 대표로서 단식이 아닌 대화와 타협을 통해 현안을 풀어 가는 성숙한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주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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