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각(御書閣)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청룡3리 30-4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2015년 4월 17일 청주시 향토유적 제26호로 지정되었다.

이 곳은 1812년(순조12) 고령인(高靈人) 신병권(申秉權, 1737~1816)이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 都摠管)에 오른 아버지 신의청(申義淸, 1692~1792)에게 내린 정조의 어서(御書)를 보관하는 향토 유적이다.

지금의 어서각은 1987년에 다시 지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 기와집으로 마루는 없으며 내부는 통간 콘크리트 방에 분합문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다.

내부에는 안에는 1812년(순조12)에 강화유수(江華留守) 홍의호(洪義浩, 1758~1826)가 지은 ‘어서각기(御書閣記)’와 1925년에 7세손인 신태식(申台植)이 지은 ‘어제각중수기(御書閣重修記)’가 벽면 가득 걸려 있다. 마당 앞에는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홍의호(洪義浩, 1758~1826)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양중(養仲), 호는 담녕(澹寧)이다. 홍만기(洪萬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중효(洪重孝)이고, 아버지는 참판(參判) 홍수보(洪秀輔)이며, 어머니는 박종윤(朴宗潤)의 딸이다. 대사헌(大司憲) 홍인호(洪仁浩)의 아우이다.

1784년(정조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선발되고 지평·집의·응교 등을 거쳐, 동부승지, 호조·예조·공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1802년(순조2)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어 ≪선조심리판부(先朝審理判付)≫ 16권의 글을 지어 임금에게 올렸다.

1803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와 의주부윤·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815년과 1823년 두 차례에 걸쳐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25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저서로 ≪담녕집≫·≪청구시지(靑丘詩誌)≫가 있다. 시호는 정헌(正憲)이다.

*홍수보(洪秀輔, 1723~?)는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군실(君實)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증조부는 홍주문(洪柱文)이고, 조부는 홍만기(洪萬紀)이다. 부친은 홍중효(洪重孝)이고, 생부는 예조판서 홍중후(洪重厚)이다.

1756년(영조32)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62년(영조38) 승지로 재직 중 영조의 명을 받아 예문관 현판(懸板)을 써 붙였다. 집의‧수찬‧필선(弼善)으로 재직 중에 세자를 잘 보필한 공로로 대록비(大鹿皮) 1령(令)이 내려지고 승지로 발탁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정조가 즉위한 후 외직인 경기수군절도사(京畿水軍節度使)로 파견되었다. 1788년(정조12) 경기도관찰사 재직 시절 정조가 화성으로 행차할 때 선창(船艙) 축조(築造)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아 탄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고 정배당하였다. 후에 다시 서용되어 강화부유수‧예조참판‧한성부판윤‧의정부좌참찬등을 역임하였다.

*홍중효(洪重孝, 1708~1772)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원(聖源), 호는 백서헌(栢西軒)·소와(疎窩)이다. 좌찬성(左贊成) 홍탁(洪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주문(洪柱文)이고, 아버지는 우부승지(右副承旨) 홍만기(洪萬紀)이며, 어머니는 이열(李說)의 딸이다.

1740년(영조16) 진사로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성균관전적·병조좌랑·정언·장령·홍문관교리·필선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지내고 1757년 동래부사가 되었다. 뒤이어 대사간·공조참의·호조참판을 지내고, 1763년에 주청사(奏請使)의 부사로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766년 대사헌이 되고 이어 한성부좌윤과 형조 및 예조의 판서를 지냈다.

영조의 사랑과 대우가 두터웠으나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죽은 이후로는 거의 향리에서 떠나지 않은 채 대사헌 이후의 벼슬은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경전에 마음을 쏟으면서도 시(詩)에 뛰어났으며, 만년에 글씨에도 힘을 기울였다.

저서로는 ≪소와집≫·≪학본내외편(學本內外篇)≫·≪이기왕복서(理氣往復書)≫·≪예기강목고이(禮記綱目考異)≫ 등이 있다. 시호는 효민(孝敏)이다.

≪청주대학교 교수 겸 지역가치창출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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