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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없는, 그러나 모두가 꿈꾸는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Utopia)≫ 읽기 (2)
최용현 | 승인 2015.08.24 09:19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는 모어에게 사유재산제도가 폐지되어야만 인류는 착취와 갈등의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어는 그러한 세상을 상상할 수 없으며, 오히려 사유재산 제도를 폐지하면 인류는 나태와 약탈의 나락으로 빠질 것이라고 우려합니다.

라파엘, “사유재산이 있는 곳, 그리고 돈으로 모든 것이 평가되는 곳에서 국가가 정의롭고 번성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사유재산 제도가 완전히 폐지되지 않는 한, 재화의 공정한 분배는 이루어 질 수 없고, 사람들은 행복해 질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사유재산 제도가 존속하는 한, 인류 가운데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선량한 사람들이 빈곤과 근심이라는 무거운 짐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어, “저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곳에서 인간의 삶이 좋아지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이득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없어지면, 그는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고 나태해질 수밖에 없지요. 또한 궁핍을 벗어나기 위해 일을 하려 해도 자기가 일해서 얻은 것을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다면 끈임 없는 유혈과 난동이 뒤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 1518년 출간된 <<유토피아>>에 실려 있는 그림, 아래 손을 들어 설명하고 있는 사람이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입니다.

사유재산 제도 vs 사회주의

이러한 모어에 대하여, 라파엘은 자신이 가 보았던, 사유재산 제도가 폐지되었지만, 오히려 사유재산 제도가 폐지되었기에 누구보다도 훌륭한 사회를 이룩한 유토피아 섬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라파엘이 이야기하는 그 섬은 과연 어떠한 곳일까요?

유토피아 섬은 중앙부의 폭이 200마일에 이르는 초승달 모양의 섬입니다. 이 섬은 54개의 도시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모두 제도와 풍습이 같다고 합니다. 이 섬은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정치체제를 보면, 모든 시민이 신분상 차이가 없이 평등한 지위를 갖고, 통치자(종신직이며 전제정치를 기도한 혐의를 받지 않는 한 면직되지 않음)는 시민에 의해서 선출된 공무원(임기는 1년)에 의하여 선출(간접선거)됩니다. 당대의 유럽이 엄격한 신분상의 차별이 존재하고, 절대군주와 귀족․봉건 영주들이 지배하던 시절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만으로도 ≪유토피아≫의 구상은 획기적입니다.

종신직의 통치자가 있으나 다분히 의례적인 것으로, 실질적으로 섬 전체의 문제는 각 도시에서 뽑힌 3명씩의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한 자들로 구성된 원로원에서 통치자, 공무원, 시민들과 협의하여 결정한다고 합니다. 이게 끝입니다. 정치와 민주주의를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유토피아 섬의 정치 제도와 운용 방식에 대하여 더 자세히 알고 싶지만, 라파엘의 설명은 더 이상 없다고 할 정도로 단편적이고 애매모호합니다.

비록 그렇지만, 저에는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고대 아테네를 통하여 유토피아의 정치를 상상한 모어(라파엘은 “유토피아의 도시나 관직명에서 그리스어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그리스인의 후손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라고 말합니다)는, 그러나 고대 아테네와 같은 인민자치적 민주주의를 채택하지 않고 오히려 선거에 기초한 대의제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고대 아테네와 같은 인민자치적 민주주의의 장점과 현실적 가능성에 대하여 회의적인데, 비록 가상적이지만 가장 이상적인 유토피아에서조차 선거와 대의제도가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제게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 1518년 출간된 <<유토피아>>에 실려 있는 그림, 54개주, 섬을 가르는 커다란 강, 강을 건너는 아치형 돌다리 등 모어는 유토피아 섬의 많은 묘사를 당시의 잉글랜드에 빗대고 있습니다.

유토피아마저도 대의제를

더욱 획기적인 것은 그 섬의 경제 구조입니다. 그 섬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받는’ 완벽한 사회주의를 실현하고 있습니다. 모든 토지와 학교․식당․병원 등 주요시설은 공동으로 소유 관리합니다. 모든 시민들이 번갈아 가며 농사에 종사하고, 공동의 농사일 이외에 각자는 자신에 맞는 별도의 생업을 갖고 있는데,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자(착취자)가 없어 1일 6시간만으로도 그 섬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생산할 수 있고, 각 가정은 항상 필요한 물품을 필요한 만큼 받을 수 있고, 6시간의 노동 시간 이외의 나머지 시간은 정신적 자유와 교양의 함양, 오락과 예술 활동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유토피아인들을 24시간 중 6시간만을 일할 시간으로 배정합니다. 정오까지 3시간 일하고 점심 후 2시간을 쉬고 다시 3시간 일합니다……6시간만 일한다고 어쩌면 생필품의 공급이 부족할 것이라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다른 나라들에서는 전체 인구 중 아무 일도 않고 지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 중 정말로 긴요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조금밖에 없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돈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곳에서는 오직 사치와 방탕을 위해서 아무런 의미도 없고 쓸모도 없는 많은 부류들이 꼭 있게 마련입니다……현재 무익한 일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을 유익한 일에 종사케 하고, 놀고 먹는 사람들을 생산적 일에 종사케 한다면, 인간들에게 필요하고 편리한 모든 물건을 만들어내는데 얼마나 짧은 시간으로도 충분하가는 쉽게 깨달을 겁니다 

각 도시는 4개의 구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 구의 한복판에 모든 종류의 물품들을 갖춘 시장이 있습니다. 각 가구에서 만들어내는 것들이 이곳에 운반되어 창고에 보관되는데, 각 물품마다 정해진 장소에 놓여 있습니다. 각 가구주는 여기에서 자신과 자기 집에 필요한 물품을 찾아서 돈을 지불하거나 어떠한 보상을 하는 것 없이 그냥 가져갑니다. 모든 물건이 풍부하고, 아무도 자기에게 필요한 이상으로 더 많이 가져가지 않을까 하고 염려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물품이 부족하게 되는 일이 절대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데, 자기가 필요한 이상으로 가져갈 사람이라고 의심받으려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유토피아인들은 나머지 빈 시간들을 지적 활동에 이용되는데……각자의 취향에 따라 이 강의 저 강의를 들으러 가기도 하고, 지적 활동이 적성에 맞지 않는 사람들처럼, 이런 나머지 시간에 자신의 일을 더 하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은 나라에 유익한 사람으로 칭송을 받기도 합니다……저녁을 먹고 나면 1시간 동안 오락으로 보내는데, 여름에는 정원에서 겨울에는 공회당에서 즐기고, 거기서 그들은 음악을 연주하거나 담소를 나누며 즐겁게 지냅니다……그들이 국가체제를 구성한 주요 목적은, 모든 시민들이 나라에서 꼭 필요로 하는 일 말고는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시간을 육체적 봉사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그래서 정신적 자유와 교양의 함양에 전념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거기에 삶의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라파엘의 마지막 이야기는 이상적 사회주의 세계에 대한 마르크스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장(사실 이 문장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차용한 것이지만)을 연상케 합니다.

아무도 하나의 배타적인 활동의 영역을 갖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으며, 사회가 전반적 생산을 규제하여,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오늘은 이일을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며 저녁 식사후에는 비평을 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평가로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 마르크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중

“아침에는 사냥하고 점심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비평을”

라파엘은 이러한 유토피아의 사회주의적 정의관에 빗대어 당대 유럽의 사회정의에 대하여 혹독하게 비판합니다. 누군가는 토지와 시장을 소유하고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평생을 놀고먹고, 누군가는 평생을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생계를 걱정하고 그러한 지위마저 대물림할 수밖에 없고, 가진 자들의 탐욕을 더 없이 높아만 가고, 사적 이익을 위하여 인간을 수단으로만 취급하고, 그러한 세상이 정의로운 세상이라고 선언하고 강제하는 당대 유럽에 대한 비판은, 바로 현재의 우리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이 나라야말로 최상의 나라일 뿐만 아니라 참으로 나라라는 이름을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입니다……딴 곳에서는 설령 나라가 번성해도, 각자가 자신을 위해서 별도의 준비를 해 놓지 않고서는 영락없이 굶어 죽게 마련이지요. 이 같은 절실한 필요성 때문에 각 개인은 국민 즉 다른 사람들의 이익보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모든 사람의 소유인 이곳에서는 공동의 창고가 가득 차 있는 한, 아무도 자기가 사용할 물건이 모자라지나 않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이곳에서는 아무도 무엇 하나 가진 것은 없지만, 누구나 다 부유합니다.

귀족이나 대금업자, 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나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그 밖의 다른 자들이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데, 한편에서는 노동자, 마부, 목수, 농부는 짐을 나르는 짐승들조차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일을 계속하는데, 이게 무슨 놈의 정의인가요?……(오히려) 짐승들은 장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일꾼들은 지금 보수도 소득도 없이 죽도록 일할 뿐만 아니라, 늙어서 무일푼이 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지경입니다. 그들의 하루 품삯은 당장 목숨을 부지하는데도 부족하니, 노후를 위하여 저축할 여유조차 전혀 없어요.

더 나쁜 것은, 부자들이 몇 푼 안 되는 그들의 품삯의 일부를 날마다 뜯어가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속임수뿐만 아니라, 공적인 법의 힘으로 그러는 거예요……이런 잘못된 처사를 이제 정의라고 왜곡해놓았습니다……부자들이 나라를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이런 수단 방법들을 준수해야 한다고 말하게 되면, 곧바로 그것들은 법이 되는 겁니다. 그렇지만 이들 탐욕스럽고 간악한 자들은 모든 국민이 쓰기에도 충분한 물품을 자기들끼리 나누어 가지고도, 돈뿐만 아니라 돈에 대한 탐욕까지도 없앤 유토피아 공화국에서 누리고 있는 것과 같은 행복은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어요

“이게 무슨 놈의 정의인가요?”

유토피아의 사회문화는 소박하고 경건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모두가 검약하여 누구나 허름한 망토 1벌로 만족하고, 술집도 사창가도 없으며, 화폐․귀금속과 화려한 의복에 전혀 가치를 부여하지도 않고(오히려 귀금속은 범죄자나 노예의 사슬 등으로 쓰인다고 합니다), 모든 이들이 정직한 심성을 소유하여 사건을 조작하거나 궤변을 일삼는 변호사들도 없다고 합니다. 지혜나 덕성은 팽개치고, 육체적 쾌락과 물질적 화려함에만 빠져 있는 우리들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가 라고 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의 섭리는 우리가 그것 없이는 살기 어려운 그런 기능을 금은에 부여하지 않았어요. 어리석은 인간들이 단지 그것이 드물다고 값진 것으로 만들어 놓은 겁니다. 너그럽고 한량없는 어머니와 같은 자연의 섭리는 공기, 물, 땅과 같은 그녀의 최상을 선물을 외부에 드러내놓고 쓸모없고 무익한 것들은 눈에 띄지 않는 먼 곳에 감추어 둔 것이죠……그들(유토피아인들)은 요강이나 그 밖의 아주 천한 기물들은 모두 금은으로 만듭니다. 또한 노예들을 묶는 사슬과 족쇄 그리고 범죄자들을 표시하기 위하여 금으로 만든 가락지와 사슬 등을 채웁니다……그들은 별 또는 태양까지 바라볼 수 있는 처지에 조그마한 보석 따위의 돌이 시원찮게 반짝거리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 의아해 합니다. 그들은 또 유난히 가늘고 고운 양모 옷을 입어대서 자기가 더 고상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의 미친 짓을 이상하게 여깁니다. 양털실이 아무리 가늘고 곱더라도 전에는 양이 입고 있던 것이며, 또 그 양은 여전히 양일뿐이라는 겁니다.

실제로 어디에 쓸 목적도 없이 다만 바라보고만 있기 위해 돈을 쌓아놓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말해야 할까요?……금을 감추어 놓고는 다시 쓰지도 않고 아마 다시 보지도 않는 그런 사람들에 대하여 무어라고 말해야 할까요? 그들은 그걸 잃지 않으려고 마음 졸이고 있는 가운데, 실은 그걸 잃어버리고 있는 거지요. 왜냐하면 그걸 땅 속에 감추어둠으로써 자기 자신도 못쓰고 다른 사람들도 못쓰게 한다면, 그건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무엇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보물을 감추고 나면 마치 모든 근심에서 벗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좋아 죽을 듯합니다. 누군가가 그걸 훔쳐 갔는데, 훔쳐 간 줄도 모르고 십년 후에 죽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십년 동안, 그 돈이 도둑맞았다거나 그대로 있거나, 그것이 그 사람에게 무슨 상관이 있었습니까?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로 아무 쓸모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들에게는 법률이 아주 조금밖에는 없습니다. 그 정도만 있어도 충분할 만큼 그들은 잘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들이 다른 나라들에게서 보게 되는 큰 결점은, 그처럼 수많은 법률서와 주석서로도 아직 불충분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법률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 다 읽을 수도 없고, 너무 모호해서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법률체계로 사람들을 얽매는 것은 전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사건을 조작하고 궤변을 일삼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무리들인 변호사를 한명도 두고 있지 않습니다. 각자가 자기의 주장을 진술하고 자기 변호사에게 했던 말을 재판관에게 그대로 말하는 것이 제일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그들은 종교에는 관대하다고 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와 같은 유일신 관념이 없이, 대체로 영혼은 불멸하고 이승에서의 선악의 행동에 따라 내세에서 보상과 처벌을 받는 종교 관념을 갖고 있었고(이러한 내세에 대한 인식은 모든 인간의 기본적 심성인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내세관도 이와 유사합니다), 다른 종교라도(비록 기독교라도) 그것이 조용하고 온건하고 이성적 방식에 따르기만 하면 관대하게 대우하였다고 합니다.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유토피아인들도 다른 사람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막지 않고, 그들을 비방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그곳에 있는 동안 우리 기독교를 따르는 사람중 제지를 당한 사람이 꼭 1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분별없는 열정으로 기독교가 다른 모든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넘어, 다른 모든 종교는 불경스러운 것이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은 모두 지옥의 불꽃으로 떨어질 사악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식의 전도가 계속되자, 마침내 유토피아인들이 그를 체포했는데, 그들의 종교를 모욕했대서가 아니라, 치안을 문란케 했다는 죄로 재판을 받았지요. 누구도 자신의 종교 때문에 처벌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들의 가장 오래된 규정 중의 하나였으니까요……누구나 자기가 선택한 신앙의 교세를 키울 수 있고 열심히 전도를 할 수 있지만, 다만 조용하고 온건하고 이성적인 방식을 따라야 하며, 다른 종교를 비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축재(蓄財)로 자기 뱃속을 채우고, 그것도 모자라 목회직 조차 세습시키고, 다른 종교인들에 대하여 저주와 조롱으로 열변을 토하는 대형 교회 목사님들과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섬뜩한 문구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일부 맹신도들이 정말 들어야 할 이야기로 보입니다.

▲ 2009. 12. 25. 서울신문 만평.

놀랍게도 모어가 말하는, 유토피아인들과 같은 종교적 자유와 관용의 정신은 그로부터 1-2세기가 지난 후에나 유럽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보편화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읽기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자유와 관용의 정신은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나 칼뱅(Jean Calvin, 1509∼1564)으로 인하여 촉발된 광기(다른 종교에 대한 탄압과 학살)와 광풍(종교전쟁)이 유럽을 한차례 휩쓴 후 그에 대한 반성적, 성찰적 결과로 발현된 것입니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유토피아인들의 종교와 그 자세에 대하여 모어가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어는 철저한 카톨릭 신자입니다. 그는 종교개혁을 주장하는 루터를 반박하는 글을 직접 쓰기도 하고, 대법관 시절에는 종교개혁을 주장하는 루터의 책을 판매한 상인을 사형에 처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죽음을 불사하고 자신의 카톨릭을 지킨 인물이었습니다. ≪유토피아≫에서의 그의 관용적 태도는, 아마도 이성과 관용을 중시하던 당대의 기독교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비록 가혹한 현실에 묶여 어쩔 수 없었지만, 그의 진정한 바램은 종교적 자유와 관용이 있는 세상이었을 것입니다. 

≪유토피아≫에는 이와 같은 종교적 자유와 관용의 정신이외에 사형제도에 대한 반대(대신 노예로 속죄케 함), 불치의 병에 걸린 환자의 안락사, 전쟁에서의 인도주의적 원칙, 동물 학대에 대한 반대 등 현대에 이르러서야 논의되고 인정된 여러 진보적인 사고의 단초를 볼 수 있는 반면, 거주 이전의 자유에 대한 제한, 성적 자유에 대한 제한, 노예와 용병제도의 인정, 가부장적 가정 운영 등 모어 자신의 前근대적인 인식의 한계도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헬렌 켈러, 아인슈타인, 피카소, 존 레넌의 공통점은 ?

장애를 이겨낸 헬렌 켈러(Helen Keller),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현대 미술의 거장 피카소(Pablo Picasso), 영국의 대중가수 존 레넌(John Lennon), 프랑스의 국민배우 이브 몽땅(Yves Montand), 미국 흑인인권운동가 마르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역사적 유명 인사들이라는 점 이외에,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모두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그것도 스스로 사회주의자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하여 각자의 분야에서 열렬히 투쟁하였던 위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든 차별과 억압에서 해방되어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행복한 사회주의 사회는 모든 인류의 ‘이상’이자 ‘미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에게는, 사회주의는 종북(從北)과 별반 다르지 않은 ‘위험’하고 ‘낙후’된 사상일 뿐입니다. 우리는 사회주의의 근간인 ‘사유재산의 폐지’를 상상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정신은 이미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선입견이나 ‘그것의 결과는 최악의 암흑사회일 것이다’는 강박관념에 포획되어 있을 뿐입니다. ≪유토피아≫ 1편의 마지막부분에서 라파엘이 “당신(모어)이 그런 관념을 지닌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당신 마음에 그런 나라에 대한 아무런 상(象)도 지닌 게 없거나 아니면 그릇된 상만 지니고 있으니까요”라고 한 것처럼. 모어의 ≪유토피아≫는 사유재산의 폐지와 사회주의에 대한 그러한 선입견과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상상의 나래를 편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유재산이 폐지되고 모두가 함께 모든 것을 공유하는 사회주의 세상은 허무맹랑한 이야기거나, 사악하고 저주받을 이야기에 불과할까요? 우리 인류는 5백년 전까지만 해도 귀족이 없는 세상을, 3백년 전까지만 해도 해도 노예가 없는 세상을, 1백년 전까지만 해도 국가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인류는 4백년 전까지만 해도 노예․신대륙의 원주민․여성은 말하는 짐승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고, 2백년전까지만 해도 노동자․빈민에게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면 세상은 그들의 무지와 약탈로 가득찰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귀족․노예․국가가 없어져도, 원주민․여성․노동자․빈민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인정해도 세상이 파멸하거나 나락으로 떨어지기는커녕 세상은 더욱 정의롭고 풍요로워졌습니다. 착취와 갈등의 근원인 사유재산 제도가 폐지되고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한 사회주의 세상도 바로 그와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회주의는 말 그대로 유토피아, 즉 이 세상에서는 영원히 불가능한, 단지 꿈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꿈(상상)만으로도 현실에서 커다란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상상은 우리에게 토마스 모어와 같은, 인간에 대한 애정과 인류․자연에 대한 연대의식을 가지라고 북돋고, 현실의 부정의에 대하여 고민하고 사회정의에 대한 열정을 가지라고 끈임 없이 상기시키기 때문입니다. 

▲ 존 레넌, 영국 출신의 대중 가수로 4인조 밴드 비틀즈의 멤버.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고, 오직 위에 하늘만 있다고 상상해 봐요. 노력해보면 어려운 일이 아니예요. 오늘 하루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상해 봐요 / 국가라는 구분이 없다고 상상해 봐요. 어렵지 않아요. 서로 죽이지도 죽을 일도 없고, 종교도 없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을 상상해 봐요 / 소유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봐요. 당신이 상상할 수 있을까요. 탐욕을 부릴 필요도 없고, 굶주릴 필요도 없고, 인류애가 넘쳐나요. 사람들이 세상을 함께 공유하는 것을 상상해 봐요 / 날 몽상가라고 부를지도 몰라요. 하지만 나 혼자만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니예요. 언젠가 당신도 우리와 같이 모두가 하나가 되는 세상을 생각할 것예요 - 존 레넌의 '이매진(Imagine)‘

최용현  choiyh6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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