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수 교수의 청주 인물 이야기

세심정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옥화리 137-1에 위치하고 있으며, 2015년 4월 17일 청주시 향토유적 제21호로 지정된 전통 건축물로 1646년(인조24)에 주일재(主一齋) 윤승임(尹承任, 1603~1688)이 세운 파평 윤씨(坡平尹氏)의 정자이다.

지금의 모습은 1966년에 다시 세운 건축물로 건물을 살펴보면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주춧돌 위에 8각 돌기둥과 나무기둥을 세웠으며,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의 형태인 목조 기와집이다.

내부는 통간 콘크리트 바닥에 사면 중 한 칸을 빼고 나무로 다듬어 만든 긴 막대기를 끼워 돌렸다. 정자 안에는 1865년(고종2)에 송근수(宋近洙, 1818~1903)가 짓고 송우인(宋右仁)이 쓴 ‘세심정중건기(洗心亭重建記)’와 1868년(고종5)에 김술현(金述鉉)이 쓴 ‘세심정중건기(洗心亭重建記)가 걸려 있다.

또한 내부에 1800년(정조24)에 송환기(宋煥箕, 1728~1807)가 쓴 ‘세심정(洗心亭)’이라고 쓴 현판이 있다.

*송근수(宋近洙, 1818~1903)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근술(近述), 호는 입재(立齋)·남곡(南谷)이다. 대전시 회덕 출신이다. 송시열(宋時烈)의 8대손이며, 송흠학(宋欽學)의 아들로 송흠락(宋欽樂)에게 입양되었다.

송근수의 형 송달수(宋達洙)와 함께 송치규(宋穉圭)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하여 이이(李珥)→송시열(宋時烈)→한원진(韓元震)으로 이어지는 기호 학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송능상(宋能相)→송환기(宋煥箕)→송치규(宋穉圭)로 이어지는 송시열의 가학을 전수하였다.

1848년(헌종1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한 뒤, 대사헌·공조판서·병조판서·이조판서·좌찬성·우의정·좌의정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좌의정이 된 뒤 1882년(고종19) 5월 정부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교섭에 반대하여 사직소를 올렸다. 1884년(고종21) 갑신변복령(甲申變服令)으로 의제변개(衣制變改)가 발표되자 「청환수의제변개지령소(請還收衣制變改之令疏)」를 올리고 사직하여 낙향하여 ‘재상산림(宰相山林)’이란 칭호를 얻었다.

1890년(고종27)에는 당시의 시폐(時弊)를 논의한 상소를 올려 당시 백성들이 안고 있는 조세의 부담과 당오전(當五錢)의 폐해 등을 지적하여 조세정책을 시정하고 개선할 것을 주장하였다. 1895년 단발령이 공포됨에 단식하여 이에 항의하였으며, 1895년 9월 문석봉(文錫鳳)의 유성 의병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퇴직 후에는 봉조하(奉朝賀)가 되었으며, 저서로는 ≪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가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송치규(宋穉圭, 1759~1838)는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기옥(奇玉), 호는 강재(剛齋)이다. 송시열(宋時烈)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환명(煥明)이며,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사덕(思德)의 딸이다.

1798년(정조22)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한용화(韓用和)의 천거로 영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원자궁강학청료(元子宮講學請僚), 1800년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와 호조좌랑, 1801년(순조1) 사헌부지평 등에 잇따라 임명되었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1804년 군자감정(軍資監正), 1805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1812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공조참의(工曹參議), 1815년 시강원찬선(侍講院贊善)·공조참판(工曹參判), 1816년 대사헌(大司憲)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당대의 거유로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72세가 되던 1830년 왕의 간곡한 부름을 받아 세손의 시강원찬선(侍講院贊善)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을 지냈고, 이듬해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가 1838년(헌종4) 80세의 수직(壽職)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의 벼슬을 받았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저서로는 ≪강재집(剛齋集)≫이 있다.

*송환기(宋煥箕, 1728~1807)는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이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자동(子東), 호는 심재(心齋)·성담(性潭)이다. 송시열(宋時烈)의 5대손이며, 인상(寅相)의 아들이다.

1766년(영조42) 진사가 되고 1772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799년(정조23) 사도시주부(司䆃寺主簿)가 되고,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군자감정(軍資監正)을 거쳐 진산군수가 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1807년(순조7) 형조참의(刑曹參議)·예조참판(禮曹參判), 1808년 공조판서(工曹判書), 1811년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올랐다. 저서로는 ≪성담집(性潭集)≫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청주대 교수 겸 지역가치창출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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