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수 교수의 청주 인물 이야기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화창리 산11번지, 옛 이름이 숯골인 이곳에는 인천 채씨(仁川蔡氏) 효부각(孝婦閣)이 자리하고 있다.

2015년 4월 17일 청주시 향토유적 제16호로 지정된 이 효부각은 1729년(영조5)에 광주인(光州人) 정의창(鄭儀昌)의 처 인천 채씨(仁川蔡氏)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이다.

지금의 효부각은 1983년에 다시 지은 건물로 정면 1칸, 측면 1칸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 기와집이고, 사면은 자연석과 시멘트를 재료로 한 담장을 두르고 담장 위에 기와를 올려 마무리했다.

출입문은 돌계단 위에 철제로 된 문을 달았는데 살며시 열어보니 손쉽게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열어 놓았다. 내부에 있는 정려의 사면은 낮은 벽으로 쌓은 뒤 홍살로 막고 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풍판을 달았으며, 안에는 ‘효부학생정의창처인천채씨지문(孝婦學生鄭儀昌妻仁川蔡氏之門)’이라고 쓴 효부문 편액을 걸려 있다.

효부각 입구에는 인천 채씨의 효행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는데 그 내용을 읽어보면 병이 든 시어머니를 치료하였고 지극히 봉양한 효행이 담겨 있다.

안내판(案內板)에 있는 인천 채씨 효부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천 채씨는 한겨울 시어머니가 고사리가 먹고 싶다고 하자 길을 나서 고사리를 찾던 중 햇볕이 비치는 곳에서 고사리를 발견하여 시어머니에게 해드리고 시아버지가 편찮을 때는 단지주혈하고 자신의 젖을 짜서 먹게 함으로 생명을 유지시켰다고 한다. 인천 채씨의 남편인 정의창 또한 단지주혈로 부모님을 섬겼다고 한다.

 

*인천 채씨(仁川蔡氏)는 채선무를 시조(始祖)로 하며 인천광역시 남구 관교동·학익동·문학동에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하였던 성씨이다.

채씨(蔡氏)의 연원에 대해서는 문헌이 부족하여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원전 477년 중국 하남성(河南省)의 채국(蔡國)이 멸망하면서 채씨들이 우리나라에 정착하였다는 설과 춘추 시대에 기자(箕子)를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온 채림(蔡琳)을 시조로 보는 설, 그리고 내물왕(奈勿王)의 부마였던 채원광(蔡元光)을 시조로 하는 설이 있다. 한편 채원광을 채보한(蔡輔漢)이라 전하는 기록도 있다.

한편 인천 채씨의 시조인 채선무의 선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평강 채씨(平康 蔡氏)의 시조 채송년(蔡松年)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채선무는 고려 때 동지사(同知事)를 지내고 동지추밀사(同知樞密事)에 추증되었는데, 그가 인천에 세거하여 채씨 일문을 이루었기 때문에 후손들이 인천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편 인물조(人物條)에 의하면 채선무의 아들 채신징(蔡愼徵)은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3세손 채보문(蔡寶文)은 고려 의종(毅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 추밀원사(樞密院事), 예부 상서(禮部尙書), 태자빈객 지제고(太子賓客知制誥),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였고, 금성백(錦城伯)에 봉해졌다.

한편 인천 채씨는 12세손에 이르러 채기(蔡耆)로부터 직장공파(直長公派)가, 채륜(蔡倫)으로부터 필선공파(弼善公派)가, 채우상(蔡遇祥)으로부터 판서공파(判書公派)가, 채승(蔡昇)으로부터 참의공파(參議公派)가, 채징(蔡澄)으로부터 군수공파(郡守公派)가, 채연(蔡淵)으로부터 생원공파(生員公派)가, 채호(蔡灝)로부터 배천공파(白川公派)가, 채이(蔡怡)로부터 복순공파(福順公派)가 분파되었다.

≪청주대 교수 겸 지역가치창출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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