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영당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가양리 44-4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2015년 4월 17일 청주시 향토유적 제14호로 지정된 전통 건축물이다.

1898년(광무2)에 진천(鎭川) 양호사(陽湖祠)에 봉안했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영정을 옮겨 모신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사당으로, 매년 음력 3월 15일과 9월 9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가장 앞쪽에 홍살문이 있고 안으로 조금 들어가 보면 솟을대문을 하고 ‘영모문(永慕門)’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며 둘레에 자연석을 품고 기와를 얹은 담장이 둘러져 있다.

‘수락영당(水落影堂)’이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는 지금의 영당은 1971년에 다시 지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 기와 건축물이다.

내부는 통간 마루방에 분합문을 달아 여름에는 통풍을 겨울에는 보온에 주의를 기울였고, 앞마루를 놓아 실내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확대했다. 또한 마당에는 ‘서운이필영유적비(西雲李苾榮遺蹟碑)’가 세워져 있다.

모셔진 영정(影幀)은 1319년(충숙왕6)에 원(元)나라의 오수산(吳壽山)이 그린 이제현의 초상화를 후대에 다시 그린 것이다. 선비 복장을 한 반신상으로 그렸으며, 가로 93cm, 세로 177cm로 먹으로 바탕을 그린 그림[설채견본(設彩絹本)]이다.

이 영정은 원나라 화가가 그린 것이지만 구도가 안정되고 인물 묘사가 뛰어난 우수한 작품으로 우리나라 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인정하고 있다. 영정의 윗부분에는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쓴 제기(題記)가 있는데, 이것은 이제현이 1350년(충정왕2)에 지은 자찬문(自贊文)을 옮겨 쓴 것이다.

*이제현(李齋賢,1287∼1367)은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문인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이지공(李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이다. 고려 건국 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 이금서(李金書)의 후예로 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이진(李瑱)이다.

1301년(충렬왕27) 성균시(成均試)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어서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해에 당시 대학자이자 권세가였던 권보(權溥)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를 거쳐, 1308년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선발되고 다음해에 사헌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1311년(충선왕3)에는 전교시승(典校寺丞)과 삼사판관(三司判官)에 나아가고, 다음해에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에 선발되었다. 1314년(충숙왕1) 상왕(上王)인 충선왕(忠宣王)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에 머물게 됨으로써 원나라 생활이 시작되었다.

충선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원나라에 있으면서 만권당을 짓고 서사(書史)를 즐겼다. 이때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문인들을 드나들게 했는데, 그들과 상대할 고려 측의 인물로서 이제현을 지명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이제현은 만권당에 출입한 요수(姚燧)·염복(閻復)·원명선(元明善)·조맹부(趙孟頫) 등 한족(漢族) 출신 문인들과 접촉을 자주 갖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1320년(충숙왕7)은 이제현의 생애에 있어 또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주로 만권당에 머물며 활동하는 동안에도 때때로 고려에 와서 관리로 복무해, 성균좨주(成均祭酒)·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선부전서(選部典書)를 역임하였다.

이해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면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재하였다. 1324년 밀직사를 거쳐 1325년 첨의평리(僉議評理)·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전임됨으로써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해 새로운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1353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서 두 번째로 지공거가 되어 이색(李穡) 등 35인을 등과자(登科者)로 선발하였다.

1356년(공민왕5) 기철(奇轍) 등을 죽이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가 다음해에 치사(致仕)하였다. 그 뒤에도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서는 자문에 응했으며,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에도 남쪽으로 달려가 상주에서 왕을 배알하고 호종(扈從)하였다.

저서로는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다. 흔히 이것을 합해 <익재집(益齋集)>이라 한다. 경주의 구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1376년 공민왕(恭愍王)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역옹패설(櫟翁稗說)>은 고려 말기 1342년에 이제현이 지은 수필집이다. 역사책에 나오지 않은 이문(異聞)ㆍ기사(奇事)ㆍ인물평ㆍ경론ㆍ시문ㆍ서화 품평 따위를 수록하고, 자신의 시문 약간과 책 끝에 이색의 묘지명을 붙였다. 대부분이 시에 대한 논의로, 일종의 시 비평서라 할 수 있다. 조선 숙종 19년(1693)에 허경(許熲)이 간행하였으며, 4권 1책이다.

*<익재집(益齋集)>은 고려 말기의 학자 이제현(李齊賢)의 시문집이다. <익재난고 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櫟翁稗說> 4권, <습유(拾遺)> 1권으로 되어 있다. <익재집>은 1432년(세종14)에 왕명에 의하여 원주에서 중간하였다. 다시 1600년(선조33)에 그의 11대손인 경주부윤 시발(時發)이 간행하였다. 1693년(숙종19)에 역시 경주부윤으로 있던 허경(許熲)이 선본(善本)을 구하여 다시 중간하였다. 이시발(李時發)이 중간한 간본에는 유성룡(柳成龍)의 발문(跋文)이 들어 있다. 허경이 중간한 간본에는 연보, 묘지명, 시문의 습유 들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이 판본도 판목이 낡아 1814년(순조14)에 경주에 거주하던 후손들이 연보 일부를 덧붙이고 습유를 첨가하여 간행하였다. 이 간본에는 김노응(金魯應)의 지(識)를 붙였다.

<익재집>은 1911년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파한집>·<보한집>·<아언각비 雅言覺非>·<동인시화 東人詩話>와 합책하여 간행하였다. <익재집>은 1979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대동문화연구원 영인본을 대본으로 하여 원문을 영인하여 수록하고 번역문과 함께 합본하여 국역총서로 간행하였다.

2책으로, 제1책에는 <익재난고> 권1∼8이 실렸다. 제2책에는 <익재난고> 권9·10, 그리고 <역옹패설> 전집과 후집, 습유가 수록되었으며, 부록으로 연보 등이 실려 있다. 번역문의 책머리에 장덕순(張德順)의 해제가 있다.
<청주대 교수 겸 지역가치창출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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