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종지부는 없다

―아베총리가 광화문 광장에
엎드려 “잘못 했습니다”
사죄하는 것만이
위기의 한・일관계를
쾌도난마로 풀 것입니다―

 

1970년 12월 7일 오전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자멘호파 거리에는 초겨울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곳 유대인 위령탑 앞에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1913~1992)가 섰습니다.

유대인 집단거주지인 그곳 ‘게토’는 1943년 바르샤바의 유대인들이 나치에 항거해 봉기했다가 5만 6000여명이 학살 현장으로 보내져 참살 당한 비극을 기념하기 위해 위령탑이 세워진 곳이었습니다.

잠시 고개를 숙여 의례적 참배를 한 브란트가 위령탑 앞 젖은 돌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았습니다. 순간, 이 역사적인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는 수많은 기자들이 미친 듯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습니다. 그날은 서독이 폴란드와 관계 정상화를 맺는 날이었습니다. 브란트는 그렇게 나치 독일의 잘못을 피해자인 폴란드에 온몸으로 사죄한 것입니다.

나치 강제 수용소 생존자인 유제프 치란키에비치 폴란드 수상은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브란트를 끌어안고 오열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용서합니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습니다.(Forgivable, but Unforgettable)” 이 소식은 기자들에 의해 전 세계에 타전(打電)됐고 세계는 브란트의 진정한 참회에 경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브란트 총리가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한 폴란드 여성은 독일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 독일과 폴란드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눈물을 흘렸다고 언론이 보도했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브란트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침에 길을 나설 때 진심을 전달할 수 있을 무언가는 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일의 숨길 수 없는 악행의 역사를 증언하는 장소에서 나치에 목숨을 잃은 수많은 영령들을 대하는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이다.” 그 뒤 폴란드인들은 바르샤바에 ‘브란트 광장’을 만들어, 무릎을 꿇은 브란트의 모습을 새긴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나치 독일은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습니다. 1945년 9월 2일까지 6년 동안 계속된 전쟁에서 군인 2400만 명, 민간인 4900만 명, 총7300만 명이 전 세계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대미문(前代未聞), 인류의 대재앙이었습니다.

2015년 5월 3일 앙겔라 메르켈(1954~ ) 독일 총리가 최초의 나치 집단 수용소인 독일 바이에른주 다하우 수용소를 찾았습니다. 메르켈 총리는 추도사에서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우리는 희생자들과 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를 위해 이를 기억 하겠습니다.”

메르켈은 전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년에 맞춰 공개한 메시지에서 “역사에 종지부는 없다”고 선언한 터였습니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기념일을 하루 앞둔 1월 26일 베를린 연설에서는 “나치의 만행을 기억해야하는 것은 독일인의 영원한 책임”이라고 엄숙히 말했습니다.

반세기 전 브란트 총리가 이미 사죄하고 용서를 빌었지만, 독일은 사죄와 반성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 또한 홀로코스트(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기억을 멈추지 않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성찰과 반성이란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 준 역사적인 사건들입니다.

1970년 12월 7일 브란트 서독 총리가 폴란드의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에서 무릎을 꿇고 과거 나치 독일의 잘못에 대해 사죄하고 있다. /자료사진

그 뒤에도 독일 정치인들의 사죄는 이어졌습니다. 헤어초크, 요하네스 라우, 호르스트 쾰러 대통령, 슈뢰더 총리 등이 과거사를 뉘우치고 반성했습니다. 그것은 폴란드의 요구 때문이 아닌 자발적인 사죄였습니다.

당연히 독일은 말로만 사죄를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부와 기업은 ‘기억・책임・미래재단’을 설립해 보상을 했습니다. 전쟁 당시 나치가 강제로 동원했던 유대인과 일반 노역자 13만 명에 보상금을 지급했습니다. 재원은 미리 조성된 6조 원의 강제노역보상기금에서 마련했습니다. 나치정권과 독일 대기업들이 강제 노역자들을 각종 공사판과 군수공장에서 노예처럼 부린데 대한 위로금이었습니다.

브란트 총리의 이날 사건을 두고 한 신문은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고 압축해 표현했습니다. 또 다른 언론은 “나치와 싸웠던 빌리 브란트 총리는 그 곳에서 무릎을 꿇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총리는 실제 무릎을 꿇어야 함에도 용기가 없어 꿇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무릎을 꿇었다”고 극찬했습니다. 브란트는 과거 청산과 동방정책 공로로 197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8월의 찌는 듯한 무더위가 한창입니다. 장마와 태풍이 지났지만 올 여름은 아베 일본 정부의 무역보복으로 국민들이 느끼는 체감 온도와 불쾌지수는 훨씬 심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독일과 일본은 같은 2차 대전의 전범국입니다. 또한 오늘 날 누가 먼저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선진국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전후청산에는 하늘과 땅이라고 할 만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 대한 일본의 무역 보복 행태가 바로 그 실증입니다.

독일의 정치 지도자들이 잔혹했던 과거를 솔직히 인정하고, 반성하고 사죄하는 반면 일본의 지도자들은 적반하장(賊反荷杖)으로 경제보복을 서슴지 않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으니 어찌 천인공노할 일이 아니겠는가.

일본은 1965년 체결된 한일국교를 말합니다. “비준을 했으니 국가 간의 약속 아니냐”고. 일리 있는 말이긴 합니다. 그러나 더 큰 대의명분이 있습니다. 국제 인권법 규범에는 ‘가해국과 피해국 정부가 피해자의 동의 없이 그 피해에 대해 합의할 수 없다’고 명백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도주의입니다. 그 어떤 이념도 인도주의를 우선하지는 못합니다. ‘일리(一理)’는 ‘열 가지 이치’가운데 하나 일 뿐입니다. 일본은 그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아베총리가 역사에 기록되는 정치인으로 남고 일본을 도덕적 국가로 만들려면 광화문 광장에 엎드려 “과거 저희 선조들이 한국에 나쁜 짓을 많이 했습니다. 후손인 제가 용서를 빕니다”라고 사죄한다면 모든 것은 쾌도난마(快刀亂麻)처럼 풀릴 것입니다. 오늘 위기에 처한 한・일 두 나라의 화해를 위해서는 그것 말고는 없지 않을까, 우둔한 생각을 해 봅니다. 부질없는 망상이었습니다.

*이 글은 2015년 8월 22일자 뉴욕중앙일보, 12월 30일자 한겨레에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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