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포도 익는 계절

―80년 전에도 들리던
7월의 청포도 익는 소리,
백가쟁명이 된 오늘
우리 귀에는 내우외환으로
그 소리 들리지 않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 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청포도’

 

해마다 7월이 되면 우리는 이 시를 생각합니다. 중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 시 ‘청포도’를 읽으며 청소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인 이육사(李陸史)는 1904년 5월 18일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에서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대구의 도산공립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웠습니다.

1925년 20대 초반 형제들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1927년 10월 일어난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형, 동생 과 함께 잡혀가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경찰에 잡혀가 풀려나기를 거듭했고 그때마다 고초를 당했습니다.

7월이란 시기는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자 이육사에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이끄는 시기이며 청포도가 익어간다는 것은 자신이 바라는 평화로운 삶의 세계가 형성되어 감을 뜻합니다. ‘내가 바라는 손님은’ 민족을 구원하고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초인적 존재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고달픈 몸’은 암울한 역사적 현실 속에서 이상을 실현하고자 겪는 괴로운 삶이라고 해석됩니다.

이는 이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많은 고난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이라는 표현에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정성스런 자세가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손님이란 ‘평화로운 이상세계의 실현을 위해 푸른 도포를 입고 찾아오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청포도를 먹게끔 마련된 식탁에서 시인이 정성스럽게 맞이할 손님은 청포를 입고 고달픈 몸을 이끌고 오는 귀한존재이자 육사가 끝없이 기다리는 염원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이 시는 작자의 조국을 향한 끝없는 향수와 기다림의 대상에 대한 염원을 주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육사가 ‘청포도’를 발표한 것은 일제의 탄압이 한창이던 1939년 문장지에서 입니다. 그는 이 시를 통해 일제로부터 독립이 되어 새날이 오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습니다.

원래 그의 본명은 이원록(李源祿)이고 필명은 여러 가지로, 몇 가지 일화가 전해집니다. 영원한 이름이 된 이육사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받은 수인(囚人) 번호 ‘264’의 음을 딴 ‘二六四’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필명을 이활(李活)과 육사(戮史), 육사(肉瀉)를 거쳐 육사(陸史)로 여러 번 고쳤습니다.

이육사는 1929년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한 후 요양을 위해 사촌 형인 이영우의 집이 있는 포항으로 가서 머문 적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이영우에게 “戮史란 필명을 쓰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말은 ‘역사를 찢어 죽인다’라는 의미였습니다. 당시 일제가 한국 문화를 말살하려던 때 였으니 일제를 찢어 죽이겠다, 즉 일본을 패망시키겠다는 의미가 분명했습니다. 이영우는 “표현이 너무 과격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온건한 ‘陸史’를 쓰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청포도 익는 마을이 어디인가. 대형마트에는 외국에서 수입해 온 씨 없는 청포도가 먹음직스럽게 쌓여 있다. / NEWSIS

또 ‘肉瀉’라는 이름은 고기를 먹고 설사한다는 뜻으로 당시 일제 강점 상황을 비아냥거리는 의미라서 피했다고 합니다. 이육사의 필명이나 호를 순서대로 정리하면 李活(1926~1939), 大邱二六四(1930), 戮史(1930), 肉瀉(1932), 陸史(1932~1944)로 이어집니다.

이육사는 항일 독립운동을 하면서 시를 쓴 까닭에 후세에 남겨진 시는 30여 편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시작활동에 대한 생각은 ‘계절의 오행’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가을에도 아예 유언을 쓰려고는 하지 않소. 다만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이육사는 숱한 고난을 겪으며 1943년 중국에서 잠시 귀국했다가 체포되어 베이징(北京)으로 압송되었고 다음해인 1944년 1월 16일 일본 총영사관의 차디찬 감옥에서 3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짧은 일생이었습니다.

이육사가 청포도를 쓴지 올해로 80년이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 민족이 염원했던 것은 오로지 조국 광복, 그 하나였습니다. 1939년은 일본 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긴지 29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라는 되찾았고 자유는 얻었지만 사회는 시끄럽고 어수선 합니다. 자고 나면 사건 사고요,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마다 중구난방(衆口難防), 백가쟁명(百家爭鳴)입니다. 흡사 17세기 토머스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연상시키는 지리멸렬의 상황입니다.

남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판문점에서 깜짝 이벤트로 국민들을 즐겁게 하는가 싶더니 이내 온갖 불미한 일로 짜증을 안겨줍니다. 제주도 전남편 살해사건이 국민들을 경악시키고 이번에는 베트남 아내를 폭행해 갈비뼈를 부러뜨려 낯 뜨거운 일로 난리입니다. 국제적인 망신입니다. 국회는 검찰총장 청문회로 아우성이고 살인피의자가 아파트 옥상에서, 군인이 한강에서 투신을 해 목숨을 끊습니다.

영원한 숙적 일본은 강제 징용 판결에 앙심을 품고 첨단부품의 수출 금지로 이 나라의 목을 조이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내우외환(內憂外患)입니다. 모두가 모두 ‘네 탓’타령이요, ‘너 때문에’소리만 들립니다. 지금 우리는 폭염 속에 포도가 익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국권을 빼앗기고 핍박받던 시절에도 들리던 청포도 익는 그 소리 말입니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에도 듣고 보던 청포도의 싱그러운 기억이 이제는 한낱 전설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난국을 극복해야합니다. 모두가 모두 정신을 가다듬고 내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하나로 모아 이 어려운 국가적 시련을 이겨 내야합니다. 곧 장마가 끝나고 더위가 물러가면 수확의 계절, 가을이 옵니다. 지금 7월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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