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수 교수의 청주 인물 이야기

2015년 4월 17일 청주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된 묵정영당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관정리 산3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초기의 묵정영당은 고종 25년(1888)에 그의 후손들이 지었는데 영조 때 원본을 모사한 신숙주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곳이다.

고령 신씨(高靈申氏) 문중에서 윗대의 조상인 순은(醇隱) 신덕린(申德隣. 1330∼1402), 호촌(壺村) 신포시(申包翅, 1361∼1432), 엄헌(嚴軒) 신장(申檣, 1382∼1433), 용졸재(用拙齋) 신식(申湜, 1551∼1623), 하은(霞隱) 신통(申通, 1560∼1631), 종산(鍾山) 신집(申潗, 1623∼1688) 등의 위패를 모시려고 세운 사당이며, 매년 음력 3월 16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지금의 사당은 1971년에 세운 건물로  솟을대문을 세우고 시멘트와 자연석으로 담장을 두르고 기와를 올렸으며 이맛돌에는 ‘묵정사원(墨井祠院)’이라고 쓰여 있고 ‘사제문(思齊門)’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내부의 건축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 기와집인데 내부는 칸이 막히지 아니하고 통하여 하나가 된[통간(通間)] 마루방에 3개의 쌍문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으며 ‘육현사(六賢祠)’라는 편액을 걸었다.

*신덕린(申德隣, 1330∼1402)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서화가이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불고(不孤), 호는 순은(醇隱)이다.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성용(成用)의 4대손이다.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등과 친교가 있었고 고려가 망한 뒤에는 광주(光州)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해서·초서·예서에 모두 능하여 당대에 이름이 높았으며, 특히 예서의 한 종류인 팔분체(八分體)로 많은 글을 썼다고 한다.

그의 필체는 독특하여 당시 사람들이 덕린체(德隣體)라고 불렀다. 그의 그림으로는 구덕수궁미술관 소장인 「산수도(山水圖)」가 있으나 양식 면으로 볼 때 조선 후기의 남종화(南宗畫)와 유사점이 많이 보이는 작품이므로 그 진위여부를 알기 힘들다.

그의 서체의 모간(模刊)은 ≪고금법첩(古今法帖)≫에 전한다. 두문동 72현의 한사람으로 고령의 영연서원(靈淵書院)에 배향되었다.

*신포시(申包翅, 1361∼1432)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고령(高靈), 검교군기감사(檢校軍器監事) 신성용(申成用)의 현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사경(申思敬)이고, 아버지는 전서(典書) 신덕린(申德隣)이다.

1383년(우왕9)에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조선 개국 후 좌사간 등 언관의 직임을 수행하면서 불교배척, 양천의 분별에 관한 주장을 펼치는 등 개국 초창기에 있어서 문물제도의 설행에 유교 이념적 언론활동을 하였다. 뒤에 벼슬이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이르렀고, 죽은 뒤에는 찬성(贊成)의 벼슬이 내려졌다.

*신장(申檣, 1382∼1433)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제부(濟夫), 호는 암헌(巖軒)이다. 신사경(申思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의판서(典儀判書) 신덕린(申德隣)이고, 아버지는 공조참의(工曹參議) 신포시(申包翅)이며, 어머니는 김충한(金忠漢)의 딸이다. 아들은 신숙주(申叔舟), 신말주(申末舟)이다.

1402년(태종2)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상서녹사(尙書錄事)가 되었다. 다음 예조정랑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춘추관동지사로서 ≪정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뒤에 중군도총부총제(中軍都總府總制)·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거쳐 공조 좌참판에 이르렀다.

대제학(大提學)을 오래 맡아, 당시 유학에 통달한 권위 있는 학자로 추앙을 받았다. 뒤에 영의정(領議政)의 벼슬을 내렸다.

*신식(申湜, 1551∼1623)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숙지(叔止), 호는 용졸재(用拙齋)이다. 신숙주(申叔舟)의 5대손이며, 신광윤(申光潤)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신서(申漵)이고, 아버지는 신중엄(申仲淹)이며, 어머니는 유엄(柳渰)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76년(선조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 있을 때 정여립(鄭汝立)의 일파로 탄핵되어 유배당하였다가 1592년 다시 집의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경상도안무어사(慶尙道按撫御史)로 활약하였다.

그 뒤 동부승지·좌부승지·좌승지 등을 역임하고 대사간과 부제학을 거쳐 도승지·동지중추부사·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1599년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호조참판·대사헌이 되었다.

광해군 즉위 후, 충청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다가 또 다시 사은사로 명에 가서 왜의 실정을 알렸다. 말년에는 지중추부사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청주의 쌍천서원(雙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의례고증(疑禮攷證)≫, ≪가례언해(家禮諺解)≫ 등이 있다.

*≪가례언해(家禮諺解)≫는 1632년(인조10) 신식(申湜)이 ≪가례≫를 언해한 책이다. 언해의 방식을 설명한 범례, 가례도언해(家禮圖諺解), 가례서언해(家禮序諺解), 본문, 한문으로 된 발문(跋文)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발문에는 ‘아버지가 만년에 언해한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발문과 서두의 ‘숭정임신(崇禎壬申: 1632년) 원성개간(原城開刊)’이라는 간기(刊記)에 의하여 강원도 원주에서 관찰사로 있던 신식의 아들 신득연(申得淵)이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연세대학교 소장본과 서울대학교 가람문고본의 두 이본이 있으나 10권 4책의 목판본, 사주쌍변(四周雙邊), 유계(有界, 10행 24자), 상하화문어미(上下花紋魚尾)의 판심(版心), 간기, 내용, 글자체 등이 똑같으나, 판 크기는 전자가 크다.

그리고 후자에는 발문 끝에 ‘득연신참판식계자(得淵申參判湜季子)’가 붓으로 쓰여 있고, 제10권의 47·48면은 완전히 훼손되어 있다. 본문은 10권으로 짜여 있다. 제1권은 통례(通禮)·사당(祠堂), 제2권은 통례·사마씨거가잡의(司馬氏居家雜儀), 제3권은 관례(冠禮)·관(冠), 제4권은 혼례(婚禮)·의혼(議婚), 제5권은 상례 일(喪禮一)·초종(初終), 제6권은 상례 이(喪禮二)·성복(成服), 제7권은 상례 삼(喪禮三)·조석곡(朝夕哭)·전상사(奠上食), 제8권은 상례 사(喪禮四)·천구(遷柩)·조조(朝祖)·전부(奠賻)·진기(陳器)·조전(祖奠), 제9권은 상례 오(喪禮五)·우제(虞祭), 제10권은 제례·사시제(四時祭)·발문(跋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주대 교수 겸 청주학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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