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망령
―“‘빨갱이’낙인은 친일잔재,
100년 묵은 혐오의 굴레 벗자.”
‘색깔론’의 상징 정면 언급
혐오·분열 넘어선 사회 통합 강조.
문대통령, 3·1운동 기념사 작심발언―
지난 1일 문재인 대통령이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에서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적 경쟁 세력을 비방하고 공격하는 도구로 ‘빨갱이’라는 말이 사용되면서 변형된 색깔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며 “빨갱이는 우리가 하루 빨리 청산해야 할 대표적인 친일 잔재”라고 언급하자 야당 일각에서 “전형적인 편 가르기이며 역(逆)색깔론”이라고 반발하고 있습니다.
문 대통령은 친일 잔재 청산에 대해 “친일은 반성해야 할 일이고, 독립운동은 예우 받아야 할 일이라는 가장 단순한 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역설하면서 ‘빨갱이’라는 표현이 해방 전 후 좌우 이념 대립과 냉전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일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며 이 단어를 대표적인 친일 잔재라고 규정했습니다.
문대통령은 “친일 잔재 청산은 너무나 오래된 숙제”라며 “이런 색깔론을 넘어서야 새로운 100년이 열릴 수 있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특히 문 대통령은 “빨갱이라는 일제의 잔재가 현대사의 고비마다 우리 사회를 굴곡지게 한 족쇄로 작용했다”며 “해방 뒤에도 친일 청산을 가로막고 양민학살과 간첩조작,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에도 국민을 적으로 모는 낙인으로 사용됐다”고 말했습니다. 문대통령은 “해방된 조국에서 일제 경찰 출신이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아 고문했다.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로 규정돼 희생되고 가족과 유족들은 사회적 낙인 속에서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다”고 했습니다.
문대통령은 “현재까지도 ‘빨갱이’라는 증오와 혐오의 단어가 사회통합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하며 “우리 마음에 그어진 ‘38선’은 우리 안을 갈라놓은 이념의 적대를 지울 때 함께 사라질 것이고, 서로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버릴 때 우리 내면의 광복은 완성될 것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최근 일부 자유한국당 의원들과 극우인사들이 ‘북한 특수부대 투입설’ 등을 주장하며 5·18 민주화운동을 폄훼한 것을 에둘러 비판한 것으로도 풀이됩니다. 또 지난 날 대선과 총선, 남북관계 등 주요 사건마다 어김없이 등장해 극심한 국론분열을 일으킨 색깔론의 폐해를 거듭 우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빨갱이’를 다섯 번이나 언급하며 우리 안의 혐오와 분열을 정면으로 겨냥했습니다. “빨갱이는 비극적 한국 현대사가 낳은 문제적 단어이기도 하지만, 현재까지도 국민을 가르는 대표적 표현으로 사용되는 만큼 이를 넘어서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빨갱이’는 1940년대 해방 공간에서 생겨 난 비극적인 이름입니다. ‘빨갱이’라는 단어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애당초 ‘빨갱이’는 정당의 당원을 뜻하는 파르티잔(partisan)에서 유래된 말로 그러니까 파르티잔→빨치산→빨갱이(Red)로 변했고 그 빨갱이는 공산주의자를 통칭하는 것으로 굳어졌다는 설과 2차 대전이 끝나고 세계가 자유세계와 공산주의로 양분될 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의 상징인 깃발이 빨간 색이였던 데서 유래했다는 설 등 몇 가지가 있으나 어느 것이 적확한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6·25전쟁 뒤 우리나라에서는 북한은 빨갱이집단이라는 인식 때문에 빨간색은 금기(禁忌)가 되었습니다. 빨갱이는 단순히 공산주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미 군정과 친일파 반대,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에 씌우는 주술(呪術)이 된 것입니다. 친일파 청산을 거론해도, 외세배격을 주장해도 그때마다 빨갱이라는 굴레가 씌워져 탄압받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실 빨강은 여러 가지 색 가운데 가장 강렬하고 자극적인 색입니다. 그러기에 그 용도 또한 다양합니다. 금지나 경고를 나타내는 표지, 위험물의 표지, 정지신호, 출입금지, 경고표시등에 쓰이는 것은 색이 강렬하고 눈에 잘 띄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의 공통적인 교통신호기의 정지 신호로, 소방차 및 소방관서의 기본색상으로 쓰이기도 하고 철도나 버스, 지하철의 상징 표시로 애용되기도 합니다.
빨간 색의 상징은 피와 결부되어 폭력과 잔인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하며 피나 심장과 결부되어 생명, 정열, 사랑의 상징으로 쓰입니다.
특히 중국에서는 빨간색의 상징성이 돋보입니다. 중국에서 빨간색은 온갖 좋은 의미를 거의 다 담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즐거움, 경사 등의 의미가 있고 인기, 유행, 혁명, 혼인, 돈, 행운 등의 의미를 지닙니다.
빨간색은 색깔 자체의 강렬함으로 해서 전 지구적 사랑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한국에서만은 불행하게도 사상이 의심되는 금기의 색이 되었습니다. 우리 현대사에서는 힘을 가진 권력자들이 상대를 제거할 때 예외 없이 씌우는 덫이 ‘빨갱이’ 였습니다.
자유당 정권이던 1959년 이승만대통령은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이던 조봉암후보가 평화통일을 주장했다하여 ‘빨갱이’ 죄를 씌워 ‘형장의 이슬’이 되게 했고 1961년 5·16 쿠데타 세력은 민족일보를 창간한 언론인 조용수씨를 북한과 내통했다하여 사형대에 세웠습니다. 또 1974년 유신체제에 반대하던 민청학련의 젊은이 180여명은 불온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로 구속됐고 그중 8인은 무참히 사형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빨갱이’ 혐의로 시대의 희생자가 된 이들은 2000년대 들어 와 민주화가 되자 재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아 억울한 누명을 벗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빨간색의 금기를 깬 것은 2002년 월드컵 때입니다. 축구도 잘 해 4강에도 올랐지만 빨강 티셔츠로 통일한 수 만 명의 ‘붉은 악마’응원단은 공포감을 느낄 정도의 일사분란한 응원으로 국위를 선양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또 2012년 박근혜씨가 당대표에 취임하면서 새 누리당의 당색(黨色)을 아주 빨강으로 바꾸어 점퍼도 빨강, 모자도 빨강, 플래카드도 빨강 일색으로 통일해 빨강 콤플렉스 해소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아마 진보 쪽에서 그렇게 했다면 ‘빨갱이’라고 또 한 번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같은 민족이라도 서로 다른 체제로 남북이 적과 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특수한 상황에서 공산주의자를 용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평소 진보적인 성향을 가졌거나 체제에 비판적이라고 해서 ‘빨갱이’로 몰아 색깔을 덧씌우는 일은 해서는 안 됩니다. 지난 날 우리는 그런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아왔습니다.
1928년 11월 29일자 동아일보 사설란에는 광주학생사건 관련 학생들에게 공산주의자들의 사주(使嗾)를 받아 저지른 행위라는 기사가 나옵니다. 일본 경찰은 나이 어린 학생들의 패싸움에서 발단된 학생 시위를 놓고 공산주의 사주 운운하는 ‘억지춘향’의 덫을 씌운 어이없는 작태를 보인 것입니다. 기가 막힐 일입니다.
아마도 문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빨갱이’를 언급한 것은 우리 현대사에 배어있는 악취를 씻어 내고자 한 작심 발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뜻이 그러하다면 ‘빨갱이’발언에 너무 과잉 반응을 보일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전두환(88) 전 대통령이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사자(死者)명예훼손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기위해 광주로 가는 모습을 생중계를 통해 온 국민들이 지켜봤습니다.
한때 광신론자들의 등에 업혀 ‘민족의 태양’이라는 과잉 찬사를 들으며 천하를 얻은 듯 기세등등하던 호기어린 모습 대신, 화면에 비친 그의 늙고 일그러진 모습은 인간적으로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딱했습니다. 한때의 잘못된 탐욕이 천추의 한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