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수 교수의 청주 인물 이야기

곽재기(郭在驥, 1893. 2. 7.∼1952. 1. 10.)는 충청북도 청주 강외면(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상봉 출신으로 항일운동가(抗日運動家)이다. 활동 당시 김광삼(金光三), 김재만(金在萬)이라는 다른 이름을 사용했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字)는 경(敬)으로 곽지엽(郭芝燁)의 아들이다.

서울의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청주 청남학교(靑南學校)의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을 가르쳤다. 1909년 교사로 재직할 당시 항일비밀단체인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의 당원이 되면서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

의열단원 멤버 사진(오른쪽 두 번째 곽재기). /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발췌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태극기를 제작하여 적극 시위 운동에 참가하였고 이 일로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바로 풀려났다. 그 해 7월에 고향에 부인 윤씨와 두 아들(大鉉, 壽鉉)을 남겨둔 채 동지 김기득(金奇得), 윤소룡(尹小龍), 황상규(黃尙奎) 등과 함께 만주 길림성 동녕현(東寧縣) 소수분(小綏芬)으로 망명하였다. 도착 후 그곳에서 활동 중인 김원봉을 만나게 되었고, 11월 10일에 의열단이 조직되자 참여하여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곽재기는 의열단원으로 황상규(黃尙奎) 등과 함께 길림(吉林)에서 폭탄의 제조 방법을 배우고 그는 김기득(金奇得)과 함께 상해로 가서 폭탄 구입에 힘썼으나 자금 관계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길림에 돌아왔다.

1919년 11월 말 다시 상해로 가서 이성우(李成宇)와 함께 폭탄 3개와 필요한 물품을 구입한 다음, 조현상(趙賢尙)과 운반 방법을 의논하고 임시정부 외무차장 장건상(張建相)에게 의뢰하였다.

장건상은 우편으로 안동현(安東縣) 세관에 있는 영국인 ‘S·포인’에게 보내주었다. 그는 즉시 안동으로 와서 소포를 찾은 뒤 그곳에서 윤소룡(尹小龍), 황상규(黃尙奎)와 상의하고 동지 이낙준(李洛俊)의 손을 거쳐 경남 밀양청년단장 김병환(金鉼煥)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는 거사를 실행하기에 폭탄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다시 상해에서 폭탄 13개·탄피·약품·부속품 등과 권총 2정 및 탄환 100발을 구입한 후 짐짝을 만들어 안동현, 이병철을 통해 창원 미곡상회 주인 강석원에게 보내고 국내로 비밀리에 잠입하였다.

1920년 3월에 국내로 들여온 폭탄의 소재와 투척자들의 신원을 확인한 뒤 실행하기로 준비하였으나, 활동 자금 부족으로 중지되었다. 4월 서울에서 동지들과 거사를 실시하려고 하였으나, 이수택이 아파 계획을 연기하였다. 동년 6월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폭탄을 비밀리에 숨겨놓고 폭파 대상의 정황을 파악하던 중 의열단원의 활동을 경기도 경찰부(京畿道警察部)가 알게 되었다. 5월 8일에 밀양 김병환의 집에 숨겨 놓은 폭탄 3개가 압수되고, 6월 16일 서울에서 윤세주 등 동지가 체포되었다.

곽재기는 부산 복성여관에 은신 중 체포되었는데, 의열단의 국내 조선 총독의 처단과 일제 식민지의 주요 통치기관 폭파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경상남도 경찰부로 이송되어 극심한 취조를 받고 1920년 7월 31일에 서울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21년 6월 21일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치범 및 폭발물취체 위반으로 징역 8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7년 1월 22일 경성감옥 마포 유치소에서 출옥하였다.

곽재기 출옥 후 가족사진, 양부 곽지엽, 아들, 곽재기, 모친 차씨./ 동아일보 1927년 1월 23일자

이후 3년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에스페란트어를 연구하고 귀국하여 청주 일정목 김현태(金顯泰)의 집에서 강습소를 운영하였다.

1932년 9월 22일에는 아내 윤태근(尹泰根)을 살해하고 자수하였는데, 오랜 감옥 생활로 정신 이상이 발생하여 벌어진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이 일로 인하여 1933년 징역 12년을 언도받았다. 1952년 1월 10일에 한국전쟁 중 피난지에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소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다.
≪ 청주대 교수 겸 청주학연구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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