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산에 오르는가

 

"산은 경외의 대상이지
정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산을
정복하려고 합니다.
비극은 예고되고 있습니다.

 

“당신은 왜, 산에 오르는가?(Why do you go to the mountain?) “거기에 산이 있으니까”(Because it is there). 세계 등반사의 명언이 된 이 유명한 몇 마디는 영국의 산악인 조지 맬러리(George Mallory·1886~1924)가 생전에 기자와 나눈 대화내용입니다.

명문 캠브리지 출신으로 교사였던 맬러리는 1924년 6월 8일 파트너인 앤드루 어빈과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에 나섭니다. 그는 이미 두 차례나 도전에 실패한 뒤여서 이번에는 각오가 달랐습니다.

그때까지 에베레스트는 아무도 오르지 못한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신비에 찬 산이었습니다. 전 세계 알피니스트들의 로망이었던 에베레스트. 하지만 맬러리는 안타깝게도 정상을 눈앞에 두고 안개 낀 산등성이에서 실종되고 맙니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로부터 75년이 지난 1999년 5월 1일 영국의 BBC 다큐멘터리 팀이 수색 원정대를 파견하여 극적으로 절벽에서 추락해 눈 속에 파묻힌 두 사람의 시체를 찾아냅니다. 생명이 끊긴지 오래됐지만 기적이었습니다.

생전 맬러리는 “거기, 산이 있기에 산에 오른다”면서 “에베레스트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기에, 아직 누구도 그 정상에 오르지 않았기에, 그 존재 자체가 도전이라서 세상을 정복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산에 오른다”고 말했습니다.

지구상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은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산입니다. 해발 8,848m. 히말라야에는 8,000m이상의 산이 열 넷, 14좌가 있습니다.

네팔과 중국티베트에 걸쳐있는 에베레스트는 단연 세계의 지붕입니다. 에베레스트라는 이름은 영국의 조지 에베레스트 경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습니다. 에베레스트는 네팔에서는 사가르마타(하늘의 이마)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티베트어 초모랑마(세상의 어머니)를 그대로 차용해 주무랑마봉(珠穆朗瑪峰)이라고 부릅니다.

에베레스트가 역사상 최초로 인간의 발자국을 허용한 것은 1953년 5월 29일 오전 11시30분, 뉴질랜드 원정대의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인 텐진 노르게이에게 였습니다.

그런데 최초의 등정자를 놓고 한때 논란이 일었습니다. 등정 성공을 증명하는 정상에서의 사진이 힐러리가 아닌 노르게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첫 번 째 발을 디딘 사람은 힐러리가 아닌 노르게이가 아니냐는 의문이 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노르게이가 카메라 작동법을 몰라 생긴 오해였다는 힐러리의 해명으로 논란은 정리가 됐습니다.

히말라야에는 8,000m를 넘는 산이 14개가 있습니다. 14좌란 바로 그 14개의 산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굳이 14좌를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발 8,000m부터는 산소 농도가 지상 대비 35%미만으로, 산소량이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기에 이론상 부족해지기 시작하는 고도이기 때문에 정해진 기준입니다. 전 세계 다른 대륙에는 8,000m급의 고산이 없습니다.

1977년 9월 15일 한국산악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고상돈대원이 정상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 한국일보 자료사진

흔히 등산가들이 말하는 ‘산악그랜드슬램.’ ①세계7대륙 최고봉을 등정하고 ②히말라야 8,000m이상 14좌를 모두 오르고 ③남극, 북극, 에베레스트 등 3극점을 밟으면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고 합니다. 산악인 최상, 최고의 명예입니다.

한국인으로 가장 먼저 에베레스트에 오른 사람은 누구일까. 고상돈(1948~1979)입니다. 고상돈은 1977년 9월 15일 낮 12시 50분,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태극기를 꽂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정상, 더 오를 곳이 없다!”고 소리칩니다. 세계 여덟 번 째 쾌거, 에베레스트 등정 성공의 순간이었습니다. 고상돈은 눈을 파헤친 뒤 성경책을 묻고 먼저 간 동료들을 기립니다.

그러나 호사다마일까. 고상돈은 2년 뒤인 1979년 5월 29일 알래스카 매킨리(6,194m) 등정에 성공하고 내려오는 길에 추락하여 31세의 젊은 나이로 목숨을 잃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한국 원정대의 등반사고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71년 김호섭 대장과 동생 김기섭 대원이 마나술루( 8,163m) 등정에 나섰다가 7,600m지점에서 돌풍에 김기섭 대원이 빙하 틈으로 떨어져 숨집니다. 이것은 한국 원정대의 히말라야 첫 조난 사례로 기록됩니다.

이듬해인 1972년 김기섭 대원을 떠나보낸 김정섭, 호섭 형제는 다시 마나슬루 등정에 나섰고 대원 6명과 셰르파 12명으로 구성된 원정대는 6,500m지점에서 눈사태를 만나 15명이 숨지는 대참사를 당합니다. 한국 히말라야 등반의 개척자였던 김정섭, 기섭, 호섭 세 형제가 모두 히말라야에 잠들고 말았습니다.

한국의 등반사는 비극의 연속입니다. 고상돈에 이어 세계최초 그랜드슬램을 달성해 기네스북에도 올랐던 박영석대장(1963~2011)도 안나푸르나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고 한국 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지현옥(1961~1999), “나는 산과 결혼 했다”던 고미영(1967~2009)도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국내 최초로 히말라야 14좌 무산소 등정에 빛나는 김창호 대장의 한국인 원정대 5명이 네팔 히말라야 다울라기리산 구르자히말(7,193m) 원정 도중 폭풍에 휩쓸려 사망하면서 또 한 번 국민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산은 평소 빙그레 웃는 어머니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느 순간 다시는 돌아 올수 없는 실수를 범합니다. “산을 정복한다”고 자랑하는 오만에서 온 업보일까. 산을 정복하다니, 얼마나 가소로운 발상인가.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敬畏)의 대상이라던데.

산악인들의 비보가 잇따르지만 아랑곳없이 산악인들은 계속 산을 향해 가고, 산에 오릅니다. 왜, 일까. “산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등반의 역사는 도전과 극복의 역사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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