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세상’을 돌파하다

누군가는 아무도 가지 않은 낯선 길을 간다. 자신이 선택했든 선택 당했든, 내딛는 모든 발걸음이 ‘최초’로 기록되는 삶을 지켜보는 건 흥미롭다. 특히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이유로 사회적 자원을 박탈당하거나 다른 이들과 동등한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최초’의 영예를 차지하는 이야기는 더욱 그러하다. 흑인 여성에 대한 전형적이고 정형화된 상상력을 깨뜨린 데오도르 멜피의 <히든 피겨스>(2016)와, 인상적인 여성서사로 남다른 클래스를 새삼 과시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더 포스트>(2017)가 주는 감흥은 묵직하고 깊다.

물차가 또 말썽이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으로 출근하던 캐서린(타라지 P. 헨슨), 도로시(옥타비아 스펜서), 메리(저넬 모네이)는 길가에서 차를 이리저리 살피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는 듯하다. 때마침 경찰이 나타나지만, 어쩐 일인지 셋의 표정은 달갑지 않아 보인다. 때는 1960년대 초반, 여전히 피부색으로 사람들을 구분하는 인종차별의 시대였다. 수학과 과학 말만 들어도 머리에 쥐가 나는 사람들에게는 자못 경외감이 들게 할 만한 능력자들이었지만 셋은 그저 평범했다. 잘못한 일 없어도 조심 또 조심해야 하고, 잘한 일 있어도 내세워 득 될 게 없음을 뼈저리게 학습하고 내면화한 흑인이고, 또 여성이었던 것이다.

<히든 피겨스>는 소련과의 이데올로기 경쟁이 우주를 향해 가열되던 1960년대 초반 나사의 우주 탐사에 초석이 된 세 흑인 여성의 실화를 영화화했다. 어린 시절부터 수학천재로 불렸던 캐서린은 나사 최고의 항공역학자들이 모인 랭글리 센터에서 ‘우주 임무 그룹’의 임원이 된다. 백인남성들의 외면과 질시를 뚫고 그는 미국 최초의 우주 궤도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혁혁한 공을 세운다. 번번이 진급심사에서 누락되던 도로시는 남몰래 공부한 결과 IBM 컴퓨터 실행의 기반을 마련하는 나사 최초 흑인 여성 책임자가 된다. 메리도 흑인에게는 아예 봉쇄됐던 기술교육의 기회를 싸워서 얻은 뒤 나사 최초의 흑인 여성 엔지니어가 된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부재’의 자리에서 ‘최초’라는 영예의 자리에 몸을 드러내기까지 분투를 그려내는 <히든 피겨스>에서 수학 천재 캐서린이 봉착하는 결정적 장애는 뜻밖에도, 가장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이다. ‘자연이 부를’ 때마다 눈과 비를 뚫고 800미터를 달려야 한다는 것. 우주라는 저 먼, 미지의, 초월적 세상을 동경하고 탐사·도전하는 새로운 인류사적 국면에서 직면한 장애가 고작! 놀랍게도! 제 때 소변을 보기 힘들다는 우스꽝스러운 사실은 ‘차별’이라는 사회적 현상의 본질을 일깨우는데 효과적이다. 우주개발에 주력하던 그때로부터 한참 멀어져,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마저 교란되는 작금의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아 여전히 세계적으로 만연한 차별의 어이없음을 적절히 환기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히든 피겨스>의 인물들은 흑인과 여성이라는 중첩된 타자성으로 인해 이중으로 배척되고 소외당하는 현실에 끝내 주눅 들거나 위축되는 대신 가볍고 능란하게 이를 뛰어넘는다. 타고난 천재성과 놀라운 의지를 바탕으로 한 그러한 낙관성과 경쾌함은 인종차별의 현실을 고발하는 종전 영화들과는 다른 새로운 상상력이라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그리고 차별의 타자성을 공유하는 여성들이 함께 웃고 울며 어깨를 겯고 나아가는 인상적인 장면들은 타자성을 우정과 협력의 자원으로 바꾸는 자매애적 연대로 각인된다는 점에서 젠더 차별 해소에 관한 영화적 상상력의 전범적 사례 또한 될 만하다.

백인남성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캐서린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대형 칠판에 수학 공식을 거침없이 써내려간다. IBM 컴퓨터를 몰래 공부했던 도로시는 우물거리는 남성들 사이에서 입력 값을 정확하게 뽑아낸다. 야간 수업 참여를 요구하며 메리는 단단한 논리로 판사를 꼼짝없이 설득한다. 인물의 능력과 카리스마가 극대화됨으로써 극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이런 장면들은 종전까지 주로 백인/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각 잡힌 양복 대신 치마 입은 여성들, 한 가지 피부색 말고 다른 인종의 얼굴들에서도 그와 동일하거나 더욱 강렬한 영화적 감흥이 나온다는 것을 체감하는 순간은 충분히 인상적이다. 흑인/여성을 영웅화하는 서사가 안겨주는 그 영화적 전율을 오래 기억하라고 <히든 피겨스>는 힘주어 말한다.

 

서린 그레이엄(메릴 스트립)은 워싱턴포스트를 창업한 아버지로부터 남편 필에게로 넘어갔던 회사를 남편 자살 이후 떠맡는다. 1남1녀를 키우는 가정주부로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던 그녀는 미국 최초의 여성 언론사주라는 막중한 사회적 지위를 갖게 된다. 그래서 깊게 잠들지 못한다. 경영악화에 시달리는 지역지로서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주식 상장을 결정하고 매일 관련 자료를 숙지하지만 정작 중요한 회의에서는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릴 뿐 제대로 입을 떼지 못한다. 누구에게도 싫은 내색하지 않으면서 원만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탁월한 그녀지만 낯선 용어와 숫자 가득한 세계에 적응하기는 만만치가 않은 것이다.

각종 회의와 이런저런 파티 등으로 캐서린이 번잡스러운 시간을 지내는 동안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은 미국의 운명을 가를 중대한 사건에 직면한다. 캐서린이 임명한 편집국장 벤(톰 행크스)은 베트남전쟁의 비밀을 담은 ‘펜타곤 페이퍼’의 뉴욕 타임스 특종보도를 만회하기 위해 어렵게 입수한 보고서의 보도를 준비하지만 미국 정부는 뉴욕 타임스 등의 관련 보도를 금지시킨다. 정부 방침에 맞서 보도를 강행한다면 일련의 법적 처분을 감수하는 것은 물론, 투자자들에게 거래 취소 사유가 돼 회사의 존립 자체가 위험해진다. 딱히 직업을 가지려는 생각도 없었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시대’를 살아온 중년의 여성으로서는 특히 쉽지 않은 선택이 캐서린 앞에 놓인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이어질 1971년 ‘펜타곤 페이퍼’ 사건을 다룬 스티븐 스필버그의 <더 포스트>에서 남성들과 함께 할 때의 캐서린은 여성들과 함께 하거나 파티를 주재할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캐서린이 일을 망치지 않는다는 보장을 원한다”, “구매자들이 캐서린의 수익 창출 의지에 의구심 갖는 게 당연하다”는 등의 이야기가 쉽게 귀에 들려오는 환경 속에서 그녀는 늘 남성들 사이에 포위돼 옴짝달싹 못하거나 위축된 것처럼 보인다. 워싱턴포스트지 회장으로 각종 대외적 활동을 하면서도 여전히 캐서린은 자신이 속했던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저녁식사 후 바닷물 갈라지듯 ‘숙녀들’과 ‘신사들’의 세계로 나뉠 때 자연스럽게 여성들과 담소하던 그는 뉴욕 타임스 특종을 귀띔하는 맥나마라의 호출을 받고서야 그 세계로부터 빠져나온다.

<더 포스트>는 펜타곤 페이퍼를 보도했던 워싱턴포스트의 결단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낸다. 민주주의 국가 제4의 권력으로 불리는 언론의 중차대한 의미를 되새긴다는 점에서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앨런 J. 파큘라, 1976)의 프리퀄적 위치에 놓이면서 <스포트라이트>(톰 맥카시, 2015)의 영화적 성과를 잇는다. 하지만 일당백의 막강한 포스를 과시하는 메릴 스트립의 존재감에 힘입어 <더 포스트>는 평생을 헌신했던 삶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 미국 현대사의 중대 국면에 개입하는 한 여성의 성장서사가 된다. “그런 건 내 일이 아니에요”, 보고서 사본을 입수해달라는 벤의 요구를 맥나마라와의 친분을 이유로 거절했던 캐서린은 오랜 친구에게 정보를 요구하지 않는 태도 이상의 무언가 필요한 자리에 자신이 서 있음을 각성한다.

원고를 식자실로 보내기 2시간 전, 여러 대의 전화를 통해 이어지는 격렬한 논쟁 장면에서 카메라는 공중에서 메릴 스트립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돈다.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눈동자에서는 곧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금방이라도 바닥에 쓰러질 것처럼 보이는 캐서린을 카메라가 클로즈업하면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나온다. “하, 합시다. 내 버려요. 그, 그냥 해요...기사 내요.” 그렇게 해서 윤전기는 돌아가고, 역사는 가야 할 길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자격이 안 된다, 넌 제대로 못한다, 네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계속 들으면서 ‘무시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는 사람 취급당했던’ 여성이었다.

“나는 그들의 성취에 걸맞은 웅대한 서사, 라이트 형제나 우주 비행사들, 알렉산더 해밀턴과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누리는 것 같은 미국 역사의 한 자리를 그들에게 주고 싶었다.” 나사 출신 아버지에게 들은 여성 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들로부터 <히든 피겨스>를 쓴 원작자 마고 리 셰털리의 말은 <더 포스트>를 만든 스티븐 스필버그의 제작 취지 또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두 편의 영화는 ‘백인 남성 위주로 쓰인 미국 나사/언론의 역사를 새로운 판본으로 서술’하는 인상적인 성취를 나눠 갖는다. 특히 두 영화는 백인 남성들로 가득 찬 공간에 이물질처럼 끼어있거나, 발언의 권력을 행사하는 남성들에게 겹겹으로 포위된 여성을 보여주는 장면들을 통해 ‘최초’가 발원했던 환경의 억압을 주목함으로써 그 명예가 갖는 역설적 힘과 가치를 부각시킨다.

서류에 이름이 적히는 것조차 불허되거나 있어도 없는 것처럼 간주되던 <히든 피겨스>와 <더 포스트>의 ‘투명인간’들은 평범함을 뛰어넘는 특출한 능력과 성실한 태도, 과감한 결단으로 문제를 해소한다. 그럴 때 문제적인 것은 두 영화 속 남성 인물들이다. 여성이거나 흑인이라는 절대적 타자성을 딛고 ‘최초’라는 명예로운 자리의 주인임을 공식화하기 위해 <히든 피겨스>에는 시대적 비합리에 맞서 합리적 판단을 내리는 상관 엘(케빈 코스트너)이 필요하다. <더 포스트>에서 편집장 벤은 적절한 압박과 협력을 통해 올바른 결정을 이끌어내며, 캐서린을 보며 미소 짓는 프리츠의 얼굴에는 죽은 캐서린 아버지와 남편이 겹쳐진다. 궁극적으로 백인/남성들의 ‘인정’을 경유하는 서사에서 연대하는 조언자이자 여성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그들의 지위는 이중적이다.

두 영화가 남기는 질문은 이것이다. ‘그냥 그런 시대’에서 그리 멀지 않았던 그때로부터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중요한 사람’이 아니어서 역사가 주목하지 않았던 여성 전체를 환유하던 인물들-펜타곤 보고서를 워싱턴포스트에 가져다준 히피 여성, 캐서린을 몰래 격려하던 여성 공무원, 주식거래소 밖 계단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비서들, 법원 밖에서 눈으로만 지지를 표하던 익명의 여성들은 제 이름을 찾았을까. 여전히 남성들에 포위된 채 개인의 열정과 헌신으로만 돌파해내야 하는 고난도의 개별 미션에 짓눌리고 있지는 않은가. 1960년대와 70년대를 돌아보며 백인/남성들만의 견고한 체계가 균열되는 최초 혹은 그 즈음의 순간을 포착하는 <더 포스트>와 <히든 피겨스>의 시선은 그렇게 오늘에 닿는다.

P.S> 참, 그러고 보니 <히든 피겨스>의 엔딩 크레딧에서 캐서린 존슨이 ‘연애와 결혼에 성공했다’는 자막도 생뚱맞다. 여성/영웅에 대해 관객들이 반드시 기억했어야 할 사실이 꼭 ‘결혼생활’이어야만 했을까.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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