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들은 자라지 못한다"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강력하게 고발하는 사회적 약자들 중 단연 두드러지는 것은 아이들이다. 성장을 거부당하거나 고통에 잠식되는 어린 영혼들에 관한 영화가 크고 작은 전쟁을 배경으로 꾸준히 만들어지는 것은 안타깝지만 바로 그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동정 없는 세상’(에릭 로샹의 1989년 영화 제목)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버텨갈까.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독일 영년>(1948)과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2006)는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끔찍하거나 가슴 아픈 상상력을 제시한다.

쟁은 끝났다. 지축을 흔들며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는 공습의 공포로부터, 포탄에 온 몸이 찢기는 두려움으로부터도 벗어났지만 전쟁은 여전히 계속된다. 어느 것 하나 멀쩡한 건물 없이 폐허가 된, ‘거대하고 완전히 파괴된 도시’ 베를린. ‘하일 히틀러’의 웅장한 외침 대신 연합군의 낯선 영어가 들려오는 그 곳에서의 삶은 차마 삶이라 이름붙이기 힘들다. 이제 고작 열 두 살일 뿐인 금발머리의 소년 에드문트(에드문드 모슈케)에게도. 그래서 에드문트를 소개하는 영화의 첫 장면은 무덤을 파는 공동묘지에서 시작된다.

아버지는 병으로 누워있는데, 누나 에바(잉게트라우드 하인즈)가 클럽에서 미국인과 춤추고 얻어오는 담배 한 개비로는 겨우 감자 서너 알을 구할 수 있다. 나치당원으로 참전했다가 연합군을 피해 숨어있는 형 칼(프란츠-오토 크뤼거)까지 네 식구를 감당하기에 배급카드 세 장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무덤에서 삽질을 하든, 집 주인 라데마허씨네 체중계를 들고 거리로 나가든, 어두운 밤 감자 운송 차량에서 감자를 슬쩍하든, 에드문트는 뭐라도 해야 한다. 함께 사는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는 라데마허씨는 에드문트를 자꾸 도둑,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인다.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의 거장 로베르토 로셀리니가 2차 대전 종전 직후 베를린에서 만든 <독일 영년>에서 에드문트에게 세상은 자꾸 도둑과 거짓말쟁이, ‘미친 괴물’이 되라 한다. 아버지는 “저항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며 과거의 ‘잘못’을 토로하지만 그 ‘대가’를 어린 아들이 치러내는 현실 앞에서 철저히 무능력하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약자를 희생시킬 수 있는 용기’ 운운하는 전 학교 교사 엔닝에게서 죽은 히틀러는 여전히 살아있는 독재자로 현신한다. 기성세대는 처참하게 무능하거나, 여전히 사악하다. 고작 열두 살짜리 소년에게 놓인 혼돈의 선택지는 가혹하기만 하다.

결국 ‘병들고 나약한 존재를 도태시키는 세상의 이치’는 에드문트로 하여금 나치의 악몽을 고스란히 재연하는 살부(殺父)의 패륜을 행하게 만든다. 병원서 몰래 빼온 약을 탄 차를 마시고 아버지가 죽은 다음 날, 언제나 그랬듯 거리를 배회하던 에드문트는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헨델의 음악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반쯤 부서진 건물로 올라간다. 누군가의 짐을 뒤지고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 숱하게 배회했던 그 길에서 아버지의 관이 빠져나가고 있다. 누나 에바가 장례식에 가자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만, 아버지가 주신 그 이름 ‘에드문트’에 소년은 차마 답할 수 없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한다. 총모양의 장난감으로 이마를 겨누고, 그림자를 향해 총 쏘기 흉내를 하는 것 말고 가차 없이, 두려움 없이, 주저 없이,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폐허더미에 자신을 던질 것! 참회해야 할 기성세대와, 그 부정한 유산을 승계하거나 거부해야 할 다음 세대 모두의 죽음을 선고하는 <독일영년>은 날카로운 칼날로 보는 이의 심장 한 끝을 예리하게 베어낸다. 생존을 허락받지 못할 폐허 속에 잘못 떨어진 천사의 날갯짓이 허망하게 마무리되는 소년의 추락은 다른 어떤 영화 속 그것보다 서늘하고 무섭다.

 

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국민군이 바르셀로나에 이어 마드리드마저 점령한 1939년 3월 28일 스페인 내전은 끝났다. 그런데도 1944년 곳곳에서 전투는 계속된다. 반란군 소탕을 지휘하는 새 아버지 비달 대위(세르기 로페즈)와 함께 살기 위해 만삭의 엄마 카르멘(아리아드나 길)과 오필리아(이바나 바쿠에로)는 산 밑에 임시로 마련된 정부군 부대를 찾아간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깨진 시계를 끔찍이 아끼는 새 아버지는 잔인하고 냉혹해서 오필리아도 카르멘도 편치가 않다. 그래도 예쁘고 맘씨 좋은 가정부 메르세데스(마리벨 베르두)가 있어 숲속 생활이 때로는 즐겁다.

‘다크 판타지의 대가’로 불리는 멕시코 출신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는 어린 영혼에게도 어김없이 닥칠 불행을 향해 달려간다. 냉혈한 폭군 비달대위를 제거하기 위해 은밀하게 진행된 반란군 조직의 작전은 발각되고 전면적인 소탕전이 펼쳐진다. 연약한 몸으로 겨우 버티던 엄마가 남동생을 낳은 후 세상을 떠난 뒤, 메르세데스마저 반란군에 합류한다. 의지할 누구도 없이 홀로 남은 오필리아도 살아남기 위한 전투를 펼친다. 어린 남동생을 안고 탈출하기 위해 숲속으로 달리는 것. 하지만 무자비한 새아버지의 총을 맞고 쓰러진다.

개봉 당시 아동을 위한 판타지 영화로 홍보돼 원성을 자초했던 <판의 미로>는 동전의 양면처럼 다른 두 개의 이야기를 품는다. 전쟁의 시간, 차디찬 산꼭대기에서 홀로 시들었던 장미꽃처럼 죽어가야 했던 오필리아와, 내전의 와중에 스러져간 많은 아이들을 애도하는 판타지의 서사를 살풍경의 비극 맞은편에 배치한 것. 반인반수 형상의 숲의 정령 판(Pan)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오필리아는 인간 세상을 동경하던 지하 왕국 국왕의 딸 모아나 공주로, 왼쪽 어깨 달 모양의 흉터는 그 표식이었다. 보름달이 뜨기 전 세 가지 과제를 마친다면 딸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아버지에게로 오필리아는 돌아갈 수 있다.

두 눈이 질끈 감기는 끔찍한 현실과, 두 눈이 번쩍 뜨이는 환상의 모험이 뒤엉킨 <판의 미로>는 그러니 슬픈 비극이면서 감동의 해피엔딩이 된다. 무화과나무를 말려 죽이는 괴물 두꺼비에게 환약을 먹여 죽이고 황금 열쇠를 찾거나, 식인귀로부터 황금 칼을 훔치며 용기와 인내의 덕목을 깨우치며 성장의 서사를 써나가던 오필리아는 자신 대신 남동생을 구하는 숭고한 희생으로 과제를 완수한다. 냉혹하고 잔인했던 나쁜 아버지 비달 대위로부터 벗어나 ‘거짓과 고통 없는’ 왕국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해후하는 탈출 서사는, 핏덩이 남동생이 반란군의 품에 안기는 결말과 함께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오필리아는 다시 돌아간 자신의 나라에서 ‘정의와 온화함으로 오래오래 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려 백성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숲속에서 대나무벌레를 만나기 전 기억을 잃어버린 채 그녀가 살았던 세상은 아이들의 뼈와 신발, 옷가지가 산처럼 쌓여있는 곳이었고, 오필리아의 몸은 차디차게 식어갔다. 무자비한 살상이 펼쳐지는 전쟁터에서 어린 영혼들이 살아갈 세상은 어디에도 없으며, 죽음으로부터 어떻게든 탈출하려는 절박한 생존투쟁은 실패할 뿐이다. <판의 미로>는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로부터 꽃이 피는 마지막 이미지를 통해 해피엔딩이 허락되지 않았던 어둡고 야만적이었던 시대를 애도한다.

쟁을 말하는 영화는 소년소녀의 불행을 선호한다. 순수와 타락이 엇갈리는 열 살 즈음의 얼굴만큼 인간의 슬픔과 삶의 부조리를 증거하는 강력한 이미지는 많지 않기에 그렇다. “미셸”을 부르며 달려가는 어린 폴레트의 뒷모습에 깔리던 ‘로망스’의 기타 선율로 기억되는 <금지된 장난>(르네 클레망, 1952)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화적 서사들이 입증하는 바다. 미성숙과 결핍의 지평으로부터 진보 혹은 성취로 이동하는 성장서사 속 아이들의 반대편에서, 성장이라는 운 좋은 선택지 자체를 박탈당한 아이들의 이야기는 늘 어른들을 부끄럽게, 참담하게 만든다.

안타깝게도 인류 역사상 도처의 국면에서 아이들은 성장을 허락받지 못했고 차디찬 몸으로 폐허 더미에 쓰러져야 했다. 그럴 때 그들의 부모 혹은 기성세대는 한없이 무능력했거나 부도덕하고 혹은 비열했다. 눈앞에 닥쳐온 ‘재앙’을 뻔히 보면서도 막으려고도 하지 않고 저항하지 못했던 에드문트의 아버지-세대는 패배 뒤 황량한 폐허와 같은 현실에서도 끔찍할 정도로 무기력하다. 혹은 히틀러의 망령에 붙들려 어린 에드문트를 죄악과 파멸의 길로 이끈다. 세상을 떠나버린 친부의 뒤를 이은 오필리아의 계부는 냉혈한이었으며, 비달대위의 폭력성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남동생을 가진 착한 엄마는 몸도 마음도 무기력했다.

단호하고도 결단력 있게 행해진 에드문트의 추락과 창백하게 내뱉던 오필리아의 마지막 숨이 부정한 유산의 승계를 거부하는 단호한 선택으로, 역사에 대한 준열한 질문으로 기억되는 건 그 때문이다. 나치 정권에 대한 순응과 패배의 유산을 남겼던 기성세대에 대한 청산은 아버지를 독살한 에드문트 자신마저 단죄함으로써 마무리된다. 오필리아는 ‘나쁜 아버지’의 딸이 되기를 거부하고 죽음의 탈주를 시도한다. 그리고 장렬한 패배를 통해 내전과 그 이후 오랫동안 이어진 죽음과 상처의 시간을 위로한다. 그럼으로써 문명사회가 반드시 지켜내야 할 최종적인 마지노선을 명료하게 제시한다. 그 아이들에게 ‘성장’을 허락할 것!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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