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집은 어디인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영화는 이미 넘칠 만큼 많다. 그런데도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어서, 가난을 말하고 가난 속에서 어떻게든 힘겹게 버텨내는 사람들의 얼굴을 또렷이 각인시키는 영화들도 계속 만들어진다. ‘N포세대’, ‘헬조선’ 등 살벌한 어휘들로 포위된 지금 한국의 현실을 담아낸 전고운의 영화 <소공녀>(2017)와, 우리에게는 다소 낯설지만 ‘미국 독립영화계의 여제’라 불리는 켈리 라이차트의 <웬디와 루시>(2008)는 아무래도 답답하고 암울하다. 그렇지만 끝내 걸음을 멈추지 않는 그들이 있어 우리로 하여금 삶의 의지를 재점검하게 만든다.

레기를 담은 커다란 비닐봉지를 부스럭거리며 나타나 지저분한 것들을 날랜 손길로 치우는 큰 키의 가사 도우미 미소(이솜). <소공녀>라는 제목이 떠오르기까지 3분 남짓한 오프닝은 친구의 집을 살뜰하게 치우며 덤으로 쌀까지 얻어가는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구멍 난 쌀 봉지 때문에 기껏 구한 쌀을 길바닥에 쏟아버리는 운 나쁜 그녀는 한 잔의 위스키, 한 개비의 담배를 사랑한다. 웹툰 작가 지망생인 한솔(안재홍)과도 좋다. 함께 손등 때리기 게임을 하다가 불꽃이 튈 때 잽싸게 옷을 벗어젖혀도 좋은 작은 방도 있다. 다만 난방이 안 되는 한겨울에는 동사(凍死)하기 전, “봄에 하자”며 잽싸게 다시 패딩을 챙겨 입어야 하지만.

그래도 4만5천원 일당으로 밥과 위스키, 담배를 사고 알뜰하게 저축도 하고, 머리가 하얗게 세는 것을 막아주는 한약도 꼬박꼬박 먹으며 살아가던 그녀의 삶에 위기가 닥친다. 5년 만에 월세 5만원이 오르고, 위스키도 올랐다. 무엇보다도 새해 들어 2천원이나 올라버린 담뱃값 인상은 치명적이다. 고민하던 미소는 ‘유니크한 언니’답게 ‘유니크한’ 계산을 한다. 월세 1만원을 지출항목에서 지우면 다시 4천원 흑자로 돌아설 수 있다! 과감히 집을 포기한 미소는 캐리어에 짐을 가득 싣고 중퇴한 대학 시절 함께 했던 밴드 ‘크루즈’ 멤버들의 집을 찾는다. 물론 인생의 목표가 ‘빚 없이 사는 것’인 만큼 공짜로 먹고 자겠다는 건 아니어서 계란 한 판과 가사노동을 빠짐없이 제공한다.

영화 시작 16분 만에 주인공이 길 위에 나선 전고운의 영화 <소공녀>는 지극히 ‘유니크한’ 삶의 방식을 선택한 인물이 발 딛고 선 삶의 지평을 세밀하게 세공한다. 한때 젊음의 열정을 나누었던 밴드 멤버들은 고급 주택에서 마나님으로 살고, 빌딩숲을 헤치며 달리는 커리어 우먼으로 살거나, 능력도 없는 가사노동에 짓눌리며 살고 있다. 누군가는 이혼을 했고, 아직도 부모와 함께 살기도 한다. 집의 크기, 형태, 사는 방식도 제각각이지만 공통점은 있다. 음악을 사랑하고 담배를 친애하며 함께 함의 열락을 향유하던 그때 그들은 모두 사라졌다. 취향과 기호, 삶의 역사가 거의 혹은 완전히 지워진 자리에서 유령처럼, 허깨비처럼 사는 것이다.

<소공녀>의 영어제목은 ‘Microhabitat’. ‘미생물, 곤충 등의 서식에 적합한 곳’의 뜻을 갖는 ‘미소(微小)서식환경’으로 번역된다. 그러니 ‘애타게 미소서식지를 찾아서’ 쯤의 부제가 어울릴 영화에서 ‘크루즈’ 멤버들은 미소와 추억은 나누지만, 현재는 공유하지 못한다. 그래서 “난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라는 미소의 말을 부러워하거나 반신반의하고, 혹은 경멸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소는 텅 빈 아파트를 떠안고 빚에 허덕이거나, 화려한 살림살이 속에서 격렬하게 흔들리는 눈빛을 조용히 바라보고 따뜻한 밥 한 끼, 정성껏 만든 반찬 등을 차려주고 다시 길을 떠난다. 그리고 고층 아파트가 마주보이는 한강변에 텐트를 치고 불을 밝힌다.

껑충하게 크고 마른 몸에 긴 머리를 늘어뜨린 배우 이솜이 도시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만드는 미장센마저 인상적인 <소공녀>는 오랜만에 동시대 삶의 공간과 감각을 고스란히, 신랄하게 깨우치는 한국영화와의 만남이라는 기쁨을 선사한다. 집 대신 위스키와 담배를! 세상의 모든 시선에 맞서 자신의 취향과 기호에 복무하기를 선택한 단단한 여성의 현존이라는 영화적 감흥과 충격 또한 놀랍고 반갑다. 물론 <소공녀>의 현실은 생생하게 척박해서 미소의 유유자적이 주는 비현실성을 외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때문에라도 더욱 간절하게, 그녀의 서식지 찾기, 기호와 취향에 복무하며 생존하기의 미션을 응원하게 만든다.

 

직한 허밍 소리와 함께 영화가 시작되면 사내아이처럼 머리를 짧게 자른 웬디(미셸 윌리엄스)가 사냥개와 리트리버 잡종인 개 루시와 숲길을 걷고 있다. 바쁠 것 없어 보이는 걸음이지만 알래스카로 일자리를 찾으러 가는 중이니 사실 한가한 산책길은 아니다. 지도를 보며 알래스카로 가는 길을 점검하고, 여객선 시간표며 양식장 주소 등을 적고, 남은 돈 525달러를 확인하며 차 안에서 잠을 청한 웬디는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깬다. 사유지라서 주차가 안 되니 차를 빼달라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주차장 경비원 도움을 받아 겨우 차를 도로변으로 옮긴 웬디는 자동차 정비소로 가지만 문이 닫혀 있어 다시 돌아온다.

무슨 사연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함께 살던 인디애나의 언니 집을 떠나 혼자 차를 몰고 알래스카로 가던 웬디의 여정은 북서부 오리건 주의 작은 마을에서 중단된다. 마침 떨어진 루시의 사료를 사기 위해 식료품점에 들르지만, 부족한 돈 때문에 음식을 훔쳤던 웬디는 점원에게 적발된다. 경찰에서 50달러 벌금을 낸 뒤 버스를 타고 돌아온 웬디는 식료품점 앞에 묶어두었던 루시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다. 이후 영화는 ‘애타게 루시를 찾아서’ 쯤의 부제가 어울릴 법한 이야기로 진행된다. 그저 지나가던 길이었을 뿐인 작고 평범한 마을에서 유기견 보호소를 전전하거나 포스터를 만들어 붙이고, 산 속이나 차에서 쪽잠을 자고, 차를 고치러 가고 하는 일들이 며칠 반복된다.

알래스카로 떠나지 못하고 발이 묶인 웬디의 일상을 보여주는 <웬디와 루시>는 돈도 집도 없는 가난한 젊은 여성이 어떻게 버텨내는가의 생존기를 관찰한다. 동네를 돌며 빈 캔을 주워 푼돈을 모으는 웬디는 공중 화장실에서 이를 닦고 속옷을 갈아입는다. 심지어 기계마저 가난한 자를 외면하듯, 경찰서에서 지문 찍는 기계는 망가지고 시동이 걸리지 않던 차는 아예 폐차를 해야 할 지경이다. 숲에서 밤을 보내던 중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무서운 경험을 하기도 한다. 12시간 동안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직업인 이름도 모르는 경비원의 작은 친절이 없었다면, 어쩌면 한 번쯤 목 놓아 울음을 터뜨렸을 혹독하고 가혹한 생존이 아닐 수 없다.

북서부 오리건주라는 변방의 풍경에 미국의 정치 사회적 테마를 묵직하게 담아낸다는 평을 받는 켈리 레이차트 감독의 작고 조용한 영화 <웬디와 루시>는 겹쳐진 불운으로 발이 묶인 웬디를 통해 빈곤의 민낯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할리우드 주류 영화들이 보여주었던 거대하고 화려하고 번쩍이는 이미지들 대신 가득한 것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구조로서의 가난에 지쳐 활력을 잃은 사람들과 황량한 공간이다. 다들 먹고 사는 게 힘겨운 사람들 속에서 가느다란 발목으로 홀로 버티는 웬디의 처지는 보호소에서 하나하나 클로즈업되는 유기견들과 다를 바 없다.

루시는 누군가의 집에서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었다. 웬디가 그토록 간절하게 찾았던 만큼 애타게 웬디를 기다렸을 루시도 반갑게 웬디의 얼굴을 핥는다. 이제는 중단됐던 여정이 계속돼야 할 시간. 일정을 다시 점검하고 처음보다 절반으로 줄어든 돈을 확인하는 웬디의 입에서는 다시 처음의 허밍 소리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웬디의 곁에 루시는 없다. 루시가 묶여있던 낯선 사람의 앞마당이 자신과 함께 하는 어떤 곳보다 안전하리라는 것을, ‘웬디와 루시’의 여행은 불가능하다는 걸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배낭을 메고 쿠션과 짐이 든 비닐봉지를 든 웬디는 지나가는 화물열차에 올라탄다. 무표정한 얼굴로 웅크린 웬디를 싣고 열차는 알래스카를 향해 달린다.

사도우미라는, 세상이 잘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지만 미소의 내면은 누구 못지않게 풍요롭다. 비록 꼬깃꼬깃 접힌 5달러 지폐 한 장과 1달러 지폐 두 장을 받으면서도 늙은 경비원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내는 웬디는 결코 비굴하지 않다. 여성감독들이 인상적으로 창조해낸 두 여성 인물들은 류승완의 영화 <베테랑>에서 황정민의 대사,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말을 대뜸 떠올리게 한다. 혹은 “쓰러질지언정 무릎 꿇지 않는다”의 결기라고 할까. 그녀들은 집도, 돈도 없지만 자신을 자신으로 살아가게 하는 단단한 내면의 소유자들이다. ‘가도 가도 황톳길’의 시구를 연상시킬 만큼 팍팍하고 암담한 현실임에도 진득한 우울에 잠식되지 않는 힘과 활기로 그녀들은 기억된다.

“미소는 (그럼에도) 살아있다, 어딘가에...” <소공녀>의 엔딩 타이틀을 보는 순간 떠오른 문구가 그것이었던 것, 차도 루시도 없이 혈혈단신 남은 웬디의 마지막 장면이 주는 암담함을 떨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리라. 하지만 정말 그럴까...말끔하게 내칠 수 없는 근심스런 우려가 점차 덩치를 키울 때 암담한 전망에 압도되는 건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지상의 방 한 칸을 찾지 못한 미소는 불 밝힌 천변의 텐트 속 그림자로 남았다. 그 작은 텐트마저 사라지고 불빛마저 꺼지면, 미소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압도적인 위용의 빈곤이 여성의 얼굴을 할 때 삶의 대지에 단단히 뿌리박는 활착에 대한 현실적 전망은 자꾸만 부정적 방향을 향한다.

집을 포기할지언정 위스키와 담배를 여전히 사랑하는 미소가 “염치없다”는 말을 들었던 것처럼 웬디도 “개 먹이도 못 사는 사람이 개를 키우면 안 되죠”라는 말을 들었었다. 그 말에 뒤늦게 수긍했는지, 사랑하는 루시를 남겨놓고 떠나며 웬디는 “돈을 좀 벌어서 돌아올게” 약속했다. 힘들었던 며칠, 유일한 의지처가 됐던 늙은 경비원에게도 “다시 들르겠다”고 말했었다. 오로지 진심이었을 그 약속들을, 웬디는 과연 지킬 수 있을까. 아니 과연 알래스카에 닿을 수나 있을까. 길 위를 떠도는 여자들에게, 지상의 방 한 칸을 간절히 찾는 그들에게 세상은 어떤 대답을 내어줄 것인가.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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