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제주도의 신기한 길, 도깨비도로에 캔이나 공을 내려놓으면 낮은 쪽에서 높은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보기에는 멀쩡한 것 같지만 실제 길은 높낮이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언뜻 두루두루 공평해 보이지만 누군가, 어떤 범주에 속한 사람들은 잘 안보이기도 하고 그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기도 한다. 헤이토르 달리아의 <로스트>(2012)와 로만 폴란스키의 1994년 영화 <시고니 위버의 진실>에서 아물지 않는 상처와 두려움을 안고 버텨가는 여성들의 경우도 그렇다. 두 영화에서 폭력의 피해자였던 여성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그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도록 하기 위해서 총을 든다. (두 영화의 주요 결말을 밝히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토랑에서 일하고 새벽에 집에 돌아온 질(아만다 사이프리드)은 기말고사 준비에 한창이던 동생 몰리(에밀리 위커샴)의 침대가 비어있는 걸 발견한다. 잠옷과 반바지 차림인 채로, 스탠드가 켜진 책상에 읽던 책을 그대로 둔 채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당장 경찰서로 달려간 질은 확신에 차서 말한다. “놈이 돌아왔어요. 전 알아요...우리 집에 들어와서 내가 없으니까 동생을 데러갔어요...몰리를 오늘 밤에 죽일 거예요.” 간절하게 구조를 청하는 질의 눈은 동생 몰리에 대한 걱정과 또 다른 어떤 두려움으로 빨개진다.

하지만 정작 신고를 접수하는 경찰서장과 파워스 경사(다니엘 선자타) 등의 태도에서 긴장이라고는 찾을 수 없다. “왜 동생이 납치됐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게 묻기는 해도, ‘또 시작이군, 젠장!’이라는 마음의 소리가 묻어나온다. 1년 전 질은 온 몸이 진흙투성이에 얼어 죽기 직전 등산객에게 발견됐다. 자신이 침대에서 납치돼 숲 속 구덩이에 던져졌으며, 주변에 사람 유해가 있었다고 증언했지만 수사 결과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 대신 2년 전쯤 몇 달 간격으로 부모님을 여읜 정신적 충격을 감당하지 못해 정신병동에 갇혔었던 질은 사건 이후에도 몇 달 동안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했다.

<로스트>에서 질은 동생의 실종에 대해 탐문, 추적하며 해결하는 탐정 역할을 맡지만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경찰에 의해 질은 ‘없는 사람’을 ‘상상’해내는 피해망상증 환자로 규정된다. 사라졌다는 몰리의 안위보다,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깊이 몰입된 환자’로 몰린 질이 갖고 다니는 38구경 총이 경찰에게는 더 위험하다. 질의 납득하기 어렵거나 다소 지나쳐 보이는 행동들에 대해 주변 사람들도 ‘미쳤다’는 반응으로 일관하지만 질의 확신은 단단하다. “내 판단력은 멀쩡해요.” 다들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리지만 혼자서 할 수밖에 없다. 누구도 자신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 한, 주저할수록 몰리의 생명이 위험해질 테니까.

결국 <로스트>를 끌고 가는 근본 갈등은 주인공을 위협하는 악인/안타고니스트와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주인공을 신뢰하지 못하는 경찰 등 환경과의 관계로부터 비롯된다. 이는 탐정역할 주인공에 신뢰를 부여하면서 플롯을 따라가는 스릴러 장르 보기의 체험으로부터 <로스트>를 차별화시킨다. 알 수 없는 곳에 묶여 있다가 혼자서 집으로 돌아온 몰리는 자신이 미끼가 돼 질을 위험에 빠뜨렸음을 알게 되자 경찰에게 항의한다. “언니 말을 안 믿었죠? 어떻게 일을 이렇게 만들죠?” 세상이 외면하는 ‘진실’을 공유하는 질과 범인이 어두운 숲 속에서 최종적 담판을 벌이는 장면은 ‘진실’로부터 배제된 경찰들의 멍한 표정의 클로즈업과 교차된다. 별 개성 없어 보이는 스릴러 <로스트>는 바로 이러한 대목에서 의미심장해진다.

<로스트>에서 질은 1년 전 사건의 트라우마를 생각할 때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빠르게 판단하고 단호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범인의 말처럼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 불쌍’하거나 ‘미친 여자’라는 세상의 판단 때문에 위험에 빠지고, 외로운 진실게임을 이끌어간다. 범인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도록 영원히 침묵하게 만들고 집에 돌아온 질은 ”아무도 없었어요...(그 남자는) 존재하지 않았어요...다 제 상상이었어요”라고 말하며 입을 닫아버린다. 범인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났지만, 피해자-여성으로서 자신의 말을 공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소모적 투쟁을 그만두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미의 어느 가상 국가, 한적한 바닷가에 위치한 집에서 폴리나(시고니 위버)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폭풍우와 함께 전기가 끊기기 직전, 라디오에서 인권변호사인 남편 제라르도(스튜어트 윌슨)가 1975~80년 사이 군부정권의 고문 및 살해를 조사하는 대통령 인권 조사위원회 위원장에 내정됐다는 뉴스를 듣는다. 저녁 무렵 귀갓길에 차의 타이어가 펑크 났던 남편을 태워주었던 의사 로베르토 미란다(벤 킹슬리)가 늦은 밤 다시 집을 찾아온다. 자는 척하던 폴리나는 지갑 등을 챙겨 로베르토의 차를 끌고 나갔다가 절벽 끝에서 바다로 밀어버리고 몰래 집으로 돌아온다. 자동차가 없어져버려 낭패에 빠진 로베르토는 제라르도와 술을 마시고 취해 잠이 든다.

로만 폴란스키가 연출한 <시고니 위버의 진실>의 원작은 쿠데타로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켰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1915~2006)가 실각한 1990년,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칠레로 돌아온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곡 『죽음과 소녀』(1991년 초연)이다. 도입부에서 폴리나의 행동들은 보는 이를 긴장시키고 몰입케 한다. 낯선 차가 집으로 다가오자 대뜸 권총부터 꺼내든 날카롭고도 불안한 표정의 그녀는 멀쩡한 손님의 차를 바다에 밀어 넣은 것도 부족한지, 자고 있던 로베르토를 깨워 얼굴을 가격해서 기절시킨다. 그리고 팔과 다리를 의자에 꽁꽁 묶고 입에 재갈을 물린다.

“나는 로베르토 미란다 의사를 폴리나 로카를 전기 고문한 죄명으로 고발하는 바입니다...난 미란다 박사를 14회에 걸쳐 폴리나 로카를 성폭행한 죄로 고발합니다.” 비로소, 도무지 요령부득이었던 그녀의 행동들이 설명된다. 왜 그녀가 로베르토를 ‘심문’하는 자리에서 슈베르트의 현악 사중주곡 <죽음과 소녀>를 틀어놓았는지도. 그런데 14년 만에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우연히 맞닥뜨린 고문과 성폭행 가해자는 강력하게 부인한다. “난 모르는 여자요. 난 그때 바르셀로나에 있었어요!” 폴리나의 총 앞에서 졸지에 로베르토의 변호인이 된 제라르도는 흔들린다. 지하신문 편집장이었던 자신의 거처를 대라며 가혹한 고문을 받을 때 눈이 가려졌던 폴리나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가해자는 환하게 켜진 형광등 불빛 아래 진열대에 폴리나를 나체로 눕힌 뒤 <죽음과 소녀>를 틀고 고문과 성폭행을 자행했다. 14번의 반복된 고통은 그의 목소리, 냄새, 킁킁거리는 듯한 호흡, 니체를 인용하던 말투까지 폴리나의 뼛속에 새겨놓았다. 그리고 그의 차에서 발견한 <죽음과 소녀>의 테이프까지, ‘그가 그 의사’임을 확신하기 위해 그녀에게 더 필요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제라르도에게 폴리나는 ‘믿을 만한 증인’이 되지 못한다. 총의 위협 아래 진행되는 ‘재판’으로 가뜩이나 바람 앞의 등불 같은 과도정부와 자신의 위원회가 받게 될 정치적 불이익도 걱정스럽다. 무엇보다도 그는 14년 만에 알게 된 폴리나의 성폭행 피해 사실 자체로 이미 충분히 혼란스럽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원작을 충실히 옮긴 <시고니 위버의 진실>은 총을 든 피해자와 무고함을 호소하는 가해 용의자의 ‘진실 혹은 거짓’ 게임으로 진행되며 관객 다수는 제라르도의 혼돈과 동일시된다. 하지만 로만 폴란스키 버전은 원작과 달리 폴리나의 말이 진실이었음을 최종적으로 확정한다. 용의주도하게 알리바이를 만들었던 로베르토는 까마득한 바닷가 절벽 앞에서 마지막 순간 말한다. “...내게 권력이 있었으니까 맘대로 할 수 있었지...당신은 내 소유물이었어...난 그런 걸 즐겼지. 끝난 것이 아쉬워. 정말 아쉽다구.” 이것이 지난 14년 동안 간절히 원했던 ‘고백’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폴리나는 묶은 손을 풀어주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 뒤를 제라르도가 따라간다.

<로스트>와 <시고니 위버의 진실>에서 질과 폴리나는 자신의 진실을 믿어주는 단 한 명의 지지자도 없는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고군분투한다. 그들이 진실을 확신할수록, 그 진실에 따른 문제해결의 의지를 다질수록 두 사람은 위기에 처하고 상황은 꼬인다.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행동의 신뢰성을 침해받는 그들에게는 “미쳤다”는 비난과 질책이 쏟아진다. 그래서 질과 폴리나는 총을 놓지 못한다. 경찰의 추격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심각한 정치적 파장을 불러오는 한이 있더라도 총을 들고 있어야만 자신들이 말할 수 있고, 억지로라도 자신들의 말을 듣게 할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두 영화에서 질과 폴리나가 겪은 물리적 폭력이나 성폭행 등의 피해경험은 피해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 특히 법을 집행하거나 관여하는 이들-주로 남성-에게 제대로 전달되기 어려우며 진실로 수용되지 못한다. 질이 발견했던 유해들의 진실은 다시 어둠속에 묻혀야했고 예민한 감각의 촉수로 감지했던 또 다른 범죄는 합리적이거나 객관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방치된다. 피해자와 가해자 둘만의 공간에서 발생했던 성폭력 피해 경험을 누군가에게-그것이 비록 신뢰했던 운동 동지였고 깊이 사랑하는 남편일지라도-인정받는다는 것의 어려움을 <시고니 위버의 진실>은 효과적으로 이야기한다.

두 영화의 도입부는 긴장을 고조시키고 관객들의 몰입을 이끌어내기 위해 질과 폴리나의 피해자적 정체성을 부각한다. 그들은 불안해보이고, 민감하게 과잉 대응하며, 과거의 사건에 잠식돼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이 불가능한 인물들로 그려진다. 하지만 자신들의 말에 정당한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외로운 투쟁 끝에 질과 폴리나는 과거의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난다. 1년 전 사건 후 꾸준한 운동으로 몸을 단련했던 질은 범인이 기획한 재연극에 뛰어들어 결말을 바꿔버린다. 가해자를 알아채자마자 몰래 도망쳤던 폴리나는 다시 돌아가 어둠 속의 심문을 펼친다. 피해자-여성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는 세상과 맞서 수행한 ‘차이의 반복’으로 질은 스스로 입을 닫기를 선택했고, 폴리나는 그토록 사랑했던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를 되찾았다.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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