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쁨, 나의 자랑...사랑하며 떠나며

그레타 거윅의 영화 <레이디 버드>에서 시얼샤 로넌이 분한 17세의 크리스틴은 소원하던 뉴욕에 도착하고 나서야 진저리치며 떠나온 고향 새크라멘토에 대한 사랑을 확인한다. 많은 이들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가족이 그런 것처럼 고향도 정작 함께하거나 가까이 있을 때는 소중함을 알기 어렵다. 하지만 용케도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의 가치와 의미를 곱씹으며 일상을 벅찬 희열과 기쁨으로 이어가는 이들도 있다. 짐 자무쉬의 <패터슨>(2016)과 코고나다의 <콜럼버스>(2017)가 소개하는 인물들이 바로 그 흔치 않은 행운의 주인공들이다.

국 뉴저지 주의 소도시 패터슨에서 사는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은 패터슨 시내를 가로지르는 23번 시내버스를 운전한다. 오전 여섯 시 즈음 굳이 알람이 깨우지 않아도 눈을 뜨는 그는 도시락을 챙겨 회사로 출근하고 하루 종일 패터슨 시내를 돈다. 점심에는 폭포 앞에서 혼자 도시락을 먹는다. 퇴근 후에는 늘 무언가를 만들고 궁리하는 아내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와 저녁을 먹고 애완견을 산책시키러 나서 동네 바에서 맥주 한 잔을 청하곤 한다. 미국 독립영화계의 독보적 거장 짐 자무쉬 감독의 <패터슨>이 보여주는 건 이렇다 할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남자 패터슨의 일주일이다.

패터슨에게 살짝 특별한 것이 있다면 그가 시를 쓴다는 점이다. 패터슨 출신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를 사랑하는 그는 차고에서 버스를 출발시키기 전, 도시락을 먹거나 벤치에서 잠시 바람을 만끽할 때, 아님 그냥 아무 때라도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적고 적은 걸 집에서 정리한다. 그의 시는 시집 출간을 독려하는 유일한 독자이자 열광적인 팬인 아내 로라의 일상을 윤택하게, 더욱 로맨틱하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때로는 애완견 마빈이 심술을 부릴라치면 갈가리 찢긴 종잇조각만 남긴 채 공기가 되어 허무하게 날아가 버리기도 한다.

그는 세상이 알아주는 정식 시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시인이다. 로라가 몰두하는 흑백의 다양한 패턴들,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 폭포수가 만들어내는 굉음과 푸른 나뭇잎들이 부딪치며 바스락거리는 소리, 언제나처럼 그 자리를 지키는 이웃의 가게, 무심하게 지나는 자동차, 다양한 버스 승객들이 만들어내는 어수선한 높낮이의 소음까지, 패터슨의 삶을 이루는 모든 것들은 시적 소재가 되어 시적 영감으로 다가온다. 그러니 선택받은 천재적 자질이나 운명과도 같은 결정적 사건 등과는 상관없이 지극히 범상해서 지루하기까지 한 일상의 꾸준한 반복에서 쓰일 수도 있는 것이 시임을 영화는 말한다.

시를 사랑하는 남자의 일상을 묵묵히 따라다니다가 그 자체로 시가 되고 만 영화 <패터슨>을 보는 경험은 낯설고도 모호하다. 아침에 일어나고 먹고 일하고 다시 잠드는 인물들의 일주일은 마치 반복되는 시간의 주술에 걸린 것 같다. 하지만 영화는 지루한 반복이 날렵한 운율을 만들어내고, 섬광처럼 스쳐가며 차이를 빚어내는 순간들을 포착한다. 주변을 둘러싼 익숙하고 나른한 공기가 갑자기 얼어붙은 듯한 정지, 혹은 다른 차원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비약의 아찔한 감흥을 만나게 된다면 아마 영화를 본 관객 스스로도 패터슨을 좇아 시인이라 자처해도 좋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패터슨>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에 보낼 수 있는 가장 절절하고도 흠잡을 데 없이 정돈된 러브레터이다. 패터슨의 시(詩)는 『패터슨』이라는 시집을 낸 작가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를 통해 세상을 감각하며 삶의 터전인 패터슨시(市)와 함께 성장하는 그의 역사이다. 패터슨에 살았던 시인 프랭크 오하라, 패터슨에서 공연 한 이기 팝의 기억은 물론 길가의 돌멩이, 무심한 풀포기 하나하나의 시간마저 오롯이 담긴 그 역사에는 내일 이후의 시간 또한 기록될 것이다. 패터슨에서 살아가며 패터슨의 모든 것을 사랑하기를 꾸준히 실천하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의 러브레터에서는 상큼 달콤한 향기가 난다. 패터슨, 그는 시인일 뿐만 아니라 아주 행복한 시인이다.

 

인들의 만남은 그 어떤 곳도 특별하게 만들겠지만, 영화는 특히 연인들의 만남을 빛내줄 특별한 곳을 찾는다. <냉정과 열정사이>(2001)의 피렌체, <순애보>(2000)의 알래스카, 오래 전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에서 아프리카는 만남의 운명성과 끌림의 낭만성을 충족시키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비디오 에세이스트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한국계 코고나다가 각본, 편집까지 맡은 장편 데뷔작 <콜럼버스>에서 두 주인공 진(존 조)과 케이시(헤일리 루 리처드슨)가 만나는 곳은 미국 인디애나주의 소도시 콜럼버스다.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는 아무 상관없는 이곳은 ‘미국 모더니즘 건축 박물관’으로서의 도시적 위상을 갖고 있다.

한국에서 번역가로 살아가던 진은 저명한 건축가 아버지가 콜럼버스 건축물 답사 중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온다. 하지만 딱히 할 수 있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던 중 고등학교 졸업 후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케이시를 만난다. 케이시는 투어 가이드처럼 진에게 건축물들을 소개한다. 케이시의 사랑을 받는 순서대로 소개되는 엘리엘 사리넨이 설계한 퍼스트 크리스천 교회, 그의 아들 에로 사리넨이 만든 어윈 컨퍼런스 센터, 데보라 버크의 어윈 유니언 뱅크, 제임스 폴셱의 콜럼버스 지역병원 정신과 병동들이 그것. 그 밖에 클레오 로저스 기념 도서관, 어윈 가든, 밀러 하우스, 스튜어트 브릿지 등 아름답고 품격 있는 모더니즘 건축물들이 ‘건축의 메카’다운 매력을 과시한다.

알코올 중독으로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 엄마(미쉘 포브스)를 지켜보며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의식에 짓눌리던 케이시를 구원한 건 건축물들이었다. 늘 그 자리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건축물 앞에서 길게 호흡을 고르다보면 마치 ‘딴 세상에 온 것처럼’, ‘모든 게 엉망인 순간’이 달라지곤 했다. 그렇게 케이시를 버티게 했던 건축물들은 진에게서 아버지를 빼앗아갔다. 평생 건축만 사랑한 아버지는 그의 곁을 맴돌던 아들을 외면했고, 아들은 아버지의 회복을 소망하며 굳이 매일 병상을 찾을 만큼의 감정을 쌓지 못했다. 케이시의 건축에 대한 사랑에 공감하면서 비로소 진은 아버지에 대한 오래된 원망을 내려놓을 실마리를 찾는 느낌이다.

하지만 조심스레 가까워지면서도 진과 케이시의 관계는 우정과 연민 사이에서 진동할 뿐 로맨스에 가닿지 못한다. 넓거나 높은 규모의 건축물을 온전히 감상하려면 일정한 거리가 필요한 것처럼 진과 케이시 사이의 거리는 좁혀질 듯 좁혀지지 않는다. 이는 진과 케이시, 그리고 건축물이 있는 풍경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영화 <콜럼버스>가 믿는 때문이기도 하다. 진과 케이시는 서로의 눈을 맞추는 대신 나란히 서서 아름답고도 단아한 건축물들을 함께 바라본다. 때로는 건축물들이 두 남녀를 고즈넉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럴 때, 남과 여, 인간과 건축물 사이에는 따스한 위로와 격려의 연대가 구축된다.

콜럼버스에서 나고 자란 케이시가 낯선 도시를 찾아온 진을 맞는 이야기로 시작된 <콜럼버스>는 케이시가 떠나고 진이 남는 이야기로 끝난다. 엄마에 대한 책임과 헌신으로 건축에 대한 열망을 억누르던 케이시는 또 다시 ‘모든 게 엉망인 순간’을 맞을 수도 있을 진짜 ‘딴 세상’을 찾아 나선다. 사랑했던 모든 것들과 헤어지는 발걸음을 무겁게 뗄 때, 그녀와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건축물들과 고향 콜럼버스는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등을 떠미는 것 같다. 어서 날아가라고.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마주하게 될 날을 기쁘게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말라고. 이제 그 도시에는 아버지와 나누지 못했던 건축에 대한 사랑을 막 시작한 남자가 아버지와의 마지막 시간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화 <패터슨>과 <콜럼버스>의 거리는 자동차로 11시간쯤 달려야 하는 뉴저지주의 패터슨과 인디애나주 콜럼버스의 거리만큼 혹은 그보다 더 멀다. 하지만 인물들의 감정을 설명하고 행동을 뒷받침하는 배경으로서 부차적 역할을 부여받던 공간이 인물들만큼 혹은 인물들보다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는 점에서 유전자가 같다. 목표 달성을 위한 인물들의 욕망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익숙한 방식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두 영화는 극적인 사건이 배치되던 자리에 인물들이 살아가는 집, 골목, 거리, 시냇물과 나무, 뺨을 스치는 바람, 떨어지는 빗방울 같은 것을 배치하고 이를 관찰하는 것에 집중한다.

그래서 유감스럽게도, 두 영화를 보는 건 간단하지 않은 지루함과의 싸움이 될 수 있다. 느린 속도감과 정적인 분위기는 인간 아닌 무생물, 건물과 도로, 풍경 자체가 주인공이 되는 영화를 보는데 익숙하지 않은 ‘인물/인간 중심적’ 관람 습관에서 비롯된 어려움을 안긴다. 그러니 주인공인 패터슨이 시를 써서 얼마나, 어떻게 성공하는가의 플롯에 집중하는 대신 매일 지나는 도로, 골목, 공원을 패터슨과 함께 즐기고 패터슨 시내의 공기를 느낄 때 비로소 영화 <패터슨>은 이해된다. 스크린에서 인물들이 손가락 크기만큼 작아지는데도 거대한 건축물이 주인인 것처럼 잡은 <콜럼버스>의 촬영을 수긍할 때 <콜럼버스>라는 낯선 영화는 아름다운 치유의 관람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두 영화는 우리들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애써서 찾아볼 것을 조곤조곤 권한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명산 자락, 깊은 계곡이 아니어도 아파트 단지 주변 영산홍만으로도 충분히 반갑고 고맙다. 늘 지나는 출근길, 통학길의 감흥이 중세가 머무는 듯한 유럽 고도(古都)의 골목들을 배회하는 것보다 못할 바 없다고 속삭인다. 똑같은 노선을 달리는 패터슨시 버스 운전기사 패터슨의 입가에 머무는 미소, 건축물과의 마주봄 속에서 평화를 찾는 케이시의 물기어린 눈빛과 공감한다면 여느 날처럼 눈뜨는 아침의 풍경은 어제와 같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내일도 오늘과 다른 날이 될 것이다.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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