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해서, 나는 내가 되었다”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걸작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1965)에서 폰 트랩 대령의 큰 딸 리즐은 열여섯의 나이에 첫 사랑에 빠진다. 집안 식구들 몰래 빗속에서 춤추며 “나는 열여섯, 곧 열일곱”을 부르는 소녀의 뺨은 발그레하고, 두 눈은 미래에 대한 기대로 별처럼 반짝인다. 하지만 정작 열일곱의 실제 삶은 어떨까. 번역 제목마저도 과격한 켈리 프레몬의 <지랄발광 17세>(2016)와 매력적인 여배우에서 출중한 감독으로 변신한 그레타 거윅의 연출 데뷔작 <레이디 버드>(2017)는 많은 이들의 기억 어디쯤엔가 남아있는 열일곱 살의 시간을 신랄하게, 익숙하게 증언한다.

“난 왜 이 모양이지? 나도 내가 싫어!” 매일 아침 거울 속에서 확인하게 되는 그 얼굴로 평생 살아야 하는 게 끔찍한 네이딘(헤일리 스테인펠드)은 열일곱 살. 기억에 따르면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삶은 끔찍했었다. 잘난 척 대마왕이지만 실제 잘난 게 사실인 오빠 대리언(블레이크 제너)의 그늘 밑에서 자라며 고약한 애들에게 괴롭힘 당했던 어린 시절은 쓰레기통 같았다. 넓은 가슴으로 품어주며 격려해주던 아빠의 갑작스런 죽음을 고작 열세 살 나이에, 그것도 혼자 지켜봐야 했던 건 그중 최악이었다. 의사로부터 우울증 약을 처방받은 그 때로부터 어김없이 시간은 흘렀지만, ‘완전히 망한 인생’인 건 변함이 없다.

“저 자살할 거예요. 육교에서 떨어져 트럭에 치일 생각이에요...한 방에 끝나는 거죠.” 오죽하면 담임교사 브루너(우디 해럴슨)의 점심시간 32분을 뺏어가며 폭탄선언을 하게 됐겠는가. 죽으란 법은 없어 ‘천사’처럼 찾아왔던 베프 크리스타(헤일리 루 리차드슨)와 10년 동안 쌓아온 우정이 박살났다. 몸매만 신경 쓰는 운동 중독자 대리언에게 크리스타를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그 충격으로 오랫동안 망설이기만 했던 메시지를 학교 킹카 닉에게 보낸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하필 그 내용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으로 야한 것이었다! 네이딘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네이딘은 자신의 하찮은 삶이 견딜 수 없다. “인생이 공평하진 않아. 그냥 인정해” 같은 재수 없는 소리를 면전에 날리는 인간이 하필 하나밖에 없는 오빠라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쾌하다. “네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이제 널 이해할 생각은 하지도 않을 거야”라는 말을 엄마(카이라 세드윅)에게서 듣는 건 더 안 좋다. 하지만 “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학생이란다”라는 말을 담임에게 듣는 삶이라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물론 “기분 좋아졌어?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아서”라는 말을 무시할 수 있다면 말이다. 혹은 “넌 완전히 정상이야”라 말해주는 친구, “모든 건 다 지나갈 거야”라며 다독이는 누군가마저 없는 이들에 비한다면 더욱 그렇다.

열일곱 살은 그 간단하고도 명백한 사실을 알아차리기에 아직 충분하지 않은 나이이긴 하다. 다정하고 사려 깊은데다 예술적 감각도 뛰어나고 게다가 부잣집 아들이기도 한 어윈(헤이든 제토)의 매력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더욱 시간이 필요하다. 시나리오 작가로 감독 데뷔한 켈리 프레몬의 <지랄발광 17세>는 그럴 때 제대로 ‘지랄발광’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음을 설득시킨다. 불가피한데다 효과적이기도 한 ‘지랄발광’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필요할 때, 가령 도와달라고 구조신호를 보내올 때 선뜻 손을 내밀되, 꼰대처럼 캐묻거나 훈계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내려라” 한 마디만 하는 브루노 같은 어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도.

그렇게 될 때 ‘우울한 대머리 노총각’ 선생님이 아름다운 아내, 귀여운 아이의 ‘희망’이며, ‘현명하고 점잖지만 휠체어에 탄 노신사’ 같은 어윈에게서 섹시한 매력을 찾게 되는 순간이 온다. 다행스럽게도 네이딘은 너무 늦지 않게 그 순간을 맞는다. 어처구니없는 소동극 끝에, 자신이 그랬듯이 갑작스레 닥친 불행을 각자의 방식으로 버텨내고 있던 나머지 가족들을 연민하게 된다. 이제 네이딘은 ”나는 괜찮아요“ 간단하게 적어 보낸 문자에 두 번이나 답을 지웠다가 겨우 ”알았어“라고만 보낸 엄마의 떨리는 마음을 이해하는 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파란만장했던 열일곱의 시간이었다.

 

상의 많은 질문들에는 꼭 맞는 대답이 준비돼 있기도 하지만, 어떤 질문들은 그렇지 않다. 가령 ”왜 나는, 하필이면 나인 거야?“ 같은 질문이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질문이 썩 쓸모 있지 못하다는 것을 수긍하고 진작 입을 다물지만 어떤 이들은 지치지도 않고 묻고 또 묻는다. 가령 새크라멘토에 살고 있는 열일곱 살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이 그렇다. ”내가 새크라멘토 사람처럼 생겼어?“, ”나는 왜 모델처럼 생기지 않은 거야?“ 결코 마음에 드는 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도 크리스틴은 묻는다. 그리고 요구한다. ”이제부터 나를 ‘레이디 버드’라고 불러. 난 ‘크리스틴’이 아니야.“

크리스틴 혹은 레이디 버드에게 모든 것은 다 부정되고 회의의 대상이 된다. 당장 저 하늘로 날아가고 싶은데 가톨릭 학교에 다니는 처지며, 가까운 시립대에 가라는 엄마(로리 멧칼프)의 요구는 숨을 막히게 한다. 아니 그 때문만이 아니라도 엄마라는 존재의 억압은 너무나 부당하다.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 역할 속에서 굳어져버린 현실적인 가치관과, 그 안에 딸의 미래마저 가두려는 시도 앞에서 ‘레이디 버드’는 격렬한 분노를 터뜨린다.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릴 정도로. 그러니 역동적이고 예술적 활기가 넘치는 뉴욕 같은 대도시에 가서 살리라, 진부하고 지루하고 너무나 익숙한 새크라멘토처럼 살지 않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리라.

평범함을 증오하고, 진부한 걸 죄악시하는 열일곱 살이 ‘주어진 나’를 부정하고 온전한 자신의 의지로, 자신이 수긍할 수 있을 ‘진짜 나’를 만들어가려는 모든 노력들은 좌충우돌의 해프닝, 보아 넘기기 고역인 ‘지랄발광’이 된다. 하지만 때로는 위악을 부리거나, 교묘한 거짓으로 삶을 위장하면서까지 맨땅에 헤딩하듯 부딪쳐 나가는 에너지를 바탕으로 결국 ‘레이디 버드’는 떠나감의 로망을 실현한다. 이 점에서 그는 <프란시스 하>(2012), <미스트리스 아메리카>(2015)에서 그레타 거윅이 직접 쓰고 인상적으로 형상화했던 여성인물들의 전사(前史)로 다가오며, 동시에 열일곱의 요란스런 분투를 거쳐 온 많은 여성들의 기억으로 공감된다.

하지만 그레타 거윅의 <레이디 버드>는 둥지탈출의 로망을 실현하는 지점에서 다시 출발점으로 시선을 돌린다. 비로소 자유로워진 ‘레이디 버드’는 새크라멘토에서 뉴욕이라는 공간의 변화를 민감하게 곱씹으면서 자신이 놓고 온 많은 것들을 다른 눈으로 돌아본다. 그리고 진작 알고 있었으나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것들을 비로소 받아들인다. ‘크리스틴’ 대신 ‘레이디 버드’라고 바꿔 부르는 것처럼 어떤 존재로부터 전혀 다른 존재로 훌쩍 뛰어넘는 건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현명한 것이 못 된다는 점을. ‘크리스틴’의 좌절과 ‘레이디 버드’의 열망을 모두 거쳐 온 17년의 시간이 있어 그는 그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멀리 떠나온 자리에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명백한 성장의 증거라고 할 그러한 인식의 변화는 엄마에게 띄우는 러브레터에 담긴다. 판박이처럼 닮았기에 서로를 수용하기 힘들었던 크리스틴과 엄마 매리언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좋아하기’ 미션에는 번번이 실패했었고, 그만큼 피로가 누적된다. 엄마와 딸의 ‘아름다우면서도 복잡하고 어딘지 이상하면서도 재미있는 관계’(그레타 거윅)는 통상적으로 성장서사를 끌어가던 이성애적 파토스의 자리를 대체한다. ”내 이름은 크리스틴이야“, 엄마와, 고향 새크라멘토에 보내는 그의 사랑 고백은 ‘세상에 더없는 연인이자 원수’로 애증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현실의 많은 엄마와 딸들에게 화해의 용기를 선사한다.

많은 성장영화들이 그렇듯 <레이디 버드>의 크리스틴과 <지랄발광 17세>에서 네이딘은 남다를 것 없는 로맨스의 실패를 경험하거나 혹은 믿음직한 짝을 찾는다. 하지만 로맨스 플롯은 이들의 성장을 견인하는 많은 것 중 하나일 뿐이며, 좀 더 결정적인 변화는 누군가의 고통을 들여다보게 된 순간 찾아온다. 쓰라린 배신의 경험을 안겨준 대니(루카스 헤지스)가 아우팅의 공포로 떨고 있음을 알게 된 크리스틴은 따뜻하게 대니를 안아주고, 어린 나이부터 믿음직한 장남 역할을 감당했던 오빠 대리언의 무게와 외로움을 네이딘은 포옹으로 위로한다. 그렇게 자신만의 우물에서 시선을 돌리게 된 소녀들은 한 발짝씩 세상 속으로 나아가며 비로소 ‘나’의 자리를 찾는다.

여성성장을 바라보는 여성적 시선의 차별성이 두드러지는 <레이디 버드>와 <지랄발광 17세>는 이불 킥으로 귀결될 좌충우돌의 소동극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진하는 용감한 10대 여성을 만나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성장’을 테마로 하는 영화 세상에 공고했던 일련의 전통들, 아버지와 아들로 이어지는 세대간 화해 혹은 결별의 서사들과 확연히 다른 여성적 지평에서 두 영화 속 인물들이 ‘나’를 찾아가는 여정은 화려하게 윤색되지 않으며, 손쉽게 가부장적 질서에 투항하지도 않는다. 그 점에서 풍요로운 남성 성장서사의 걸작 리스트들 옆에서 앞으로 새롭게 만들어질 여성 성장서사의 리스트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게 만든다.

자신의 고통, 자신의 두려움에만 사로잡혀 미처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던 크리스틴과 네이딘은 미처 몰랐겠지만, <레이디 버드>와 <지랄발광 17세>의 세상은 여성의 성장을 인내와 관대함으로 수긍하고 승인한다는 점에서 부러울 만큼 안전한 공동체이다. 요란스런 좌충우돌과 시끄럽기 그지없는 지랄발광은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억압되거나 위험에 빠지지도, 관습과 전통의 이름으로 매도되거나 응징되지도 않는다. ‘애정’과 ‘관심’이 동의어임을 알려주고, 다 큰 어른도 슬픔을 추스르지 못할 수 있음을 솔직하게 보여주며, 상황이 복잡해질 때 연락할 누군가 있다는 확신을 안겨주는 세상이라면, 열일곱의 좌충우돌은 계속돼도 좋을 것이다.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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