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지 않다고 말해도 괜찮아”

‘애늙은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있다. 분명 아이인데 어른만큼 아니 어른보다 더 속이 깊다. 혹은 어른도 감당하기 벅찬 과제를 떠안고 분투한다. 영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닉 혼비 원작을 영화화한 폴 웨이츠, 크리스 웨이츠의 유쾌한 영화 <어바웃 어 보이>(2002)와, 패트릭 네스의 소설을 스페인 출신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이 연출한 판타지 영화 <몬스터 콜>(2016)의 소년들도 그렇다. 그들에게는 아이지만 어른 같은, 아이도 어른도 아닌 어중간한 자리에서 펼치는 외로운 투쟁을 응원하고 함께 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보는 순간 느낌이 온다. 무리 속에 끼어있어도 유독 눈에 띄게 만드는 그 무엇이 마커스(니콜라스 헌트)에게는 있다. 또래 아이들 누구도 입지 않는 이상한 색깔의 조합과 현란한 디자인, 할머니 옷장에서나 찾을 법한 재질 등 우선 옷차림새부터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다. 가끔 수업시간에 혼자 노래 부르는 엉뚱함까지, 그 ‘약간의 이상함’만으로도 또래집단에서 마커스는 ‘비참한 신세’가 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왕따 쯤은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다지만 엄마는 그렇지 않다는 것. 우울증 걸린 이혼녀 피요나(토니 콜렛)의 아들 마커스는 말한다. “부모들에게 교육을 받는 애들도 있다고 들었지만 엄마는 날 가르칠 처지가 아니다.”

어쩌면 자신의 삶을 제어하지 못하는 엄마와, 위태롭기 그지없는 엄마를 안타까워하는 아들이 서로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게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12살 아들을 학교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서며 굳이 “사랑한다” 목청을 높인다. “저도 사랑해요”, 사냥감을 노리는 밀림의 포식자들처럼 둘러싼 학교 친구들 앞에서 12살짜리가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었지만, 마커스는 그래도 한다. 엄마가 듣고 싶어 하니까. 대체 어딘지 모를 우울의 수렁으로부터 엄마를 끌어낼 수 있다면, 수시로 먹구름 끼는 엄마의 얼굴에 한 줄기 미소를 떠오르게 할 수만 있다면 마커스는 다 한다. 그게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안겨주는지 모르지 않으면서.

<어바웃 어 보이>에서 몸은 다 컸지만 마음은 여전히 소년인 남자 윌(휴 그랜트)과, 아이의 몸에 성급히 들어선 어른의 마음을 가진 마커스의 첫 만남은 그저 우연이었다. 하지만 ‘둘만으론 충분치 않’아 ‘셋’을 만들려는 마커스의 계산으로 교류는 지속된다. 몸에 좋기만 할 뿐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빵을 만들며, 아이들은 절대 입지 않는 옷을 입히는 ‘정신이 이상한’ 엄마가 약을 먹고 소파에 쓰러져있는 걸 발견하던 그 순간부터 마커스의 ‘인생은 바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너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야. 엄마가 이렇게 된 건 네 탓이 아냐.” 수지 아줌마의 말처럼 그 모든 게 자신 탓은 아닐지 몰라도, 엄마가 다시 약을 먹지 못하게 하는 건 바로 자신의 몫이라고 마커스는 생각한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해야 한다고 작정한 어린 마커스로 인해 ‘꼬이는’ 건 윌의 인생이다. ‘모든 사람은 섬’이며, 바야흐로 ‘섬의 시대’에 ‘천국의 섬’에 살고 있다고 자족하던 윌의 1인극 ‘윌 쇼’는 무턱대고 쳐들어오는 마커스 덕분에 엉망이 된다. 대체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남의 일인데, 우울한 이혼녀의 삶과 우울한 이혼녀로 인해 두려움에 잠식된 소년의 삶 모두에 얽혀들다가 무대에서 사과 세례를 받는 절정의 망신마저 당한다. 2001년 교내 록 콘서트에 1971년 곡 ‘Killing me softly’를 부르는 마커스의 위험한 시대착오에 동참하면서 그 모든 야유를 온 몸으로 받아낸다. 하지만 생각보다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서로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떤 노래가 ‘햇빛과 행복을 맘속으로 들어오게’ 만들기도 하는 마법을 비로소 알게 된 덕분일 것이다.

그리고 아들의 취향을 존중한다던 피요나 또한 알게 된다. 마커스가 ‘Killing me sofly’를 즐겨 부르는 건 자신이 그 노래를 좋아하기 때문이고, 마커스가 채식주의자인 건 자신이 고기 요리를 만들기 싫어하기 때문이며, 아들과 자신이 커플룩처럼 입고 다니는 건 자신이 그렇게 입기를 원했기 때문이라는 걸. 취향과 기호, 욕망마저 엄마에게 의탁하는 아들의 절대적 복종과 헌신이, 엄마를 잃을 지도 모른다는 아들의 공포로부터 나온다는 걸 깨달은 피요나는 “다시는 자살 따윈 안 할게” 약속한다. 이제 엄마의 다짐을 받았으니 마커스는 당장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지 않아도 괜찮다. 비로소 12살 아이로 살 수 있게 된 그에게 시간은 충분할 테니까.

 

침 햇살에 눈을 뜬 아이가 혼자 교복을 차려 입고 침대 위 이불을 정리한다. 식빵을 토스터기에 넣고 세탁기에는 빨래를 넣는다. 윙윙 소리를 내며 세탁기가 돌아갈 때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는다. 12살 소년 코너(루이스 맥더겔)의 아침을 소개하는 <몬스터 콜>의 도입부는 그가 혼자서도 모든 것들을 척척 해치우는 착하고 성실한 소년임을 보여준다. 아침 식사를 챙겨주고 학교 가는 걸 도와줄 이가 없다는 것도. 그런데 엄마(펠리시티 존스)가 없지는 않다. 학교 가기 전 마지막으로 하는 것이 엄마 방의 문을 살짝 열고 잠들어있는 엄마를 숨죽인 채 지켜보는 일이니까.

코너도 같은 반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하지만 학교 가는 길이거나 집으로 돌아올 때 주변의 쓰레기에 발길질을 해대거나 부서진 물건에 화풀이를 하는 건 그 때문만은 아니다. 엄마가 아프다. 그것도 많이.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은 ‘대머리엄마’라는 놀림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 결코 해서는 안 될 가혹한 말인지 절대 모를 것이다. 머리가 자라지 못할 만큼 독한 항암치료 때문에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는 엄마를 바라보는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도. 그래서 코너는 악몽을 꾼다. 오래된 주목나무가 있는 언덕 위 교회가 무너지고 공동묘지가 밑으로 꺼질 때 벼랑 끝에 매달린 엄마를 붙잡고 ‘엄마’를 외치다가 손을 놓치는 꿈을.

<몬스터 콜>에서 지저분한 걸 싫어해서 종종 잔소리를 하는 할머니(시고니 위버)는 병마와 씨름하는 딸 때문에 눈물짓고, 아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손자 코너를 애틋해한다. 하지만 코너는 할머니가 싫다. 할머니가 집에 오는 건 어른의 도움이 필요할 만큼 엄마의 병이 심해졌기 때문이고 자신이 엄마와 헤어져 할머니와 지내야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재혼해 의붓 여동생을 낳은 아빠는 잠시 다녀갈 뿐. 그러니 매일 밤 비명 소리와 함께 깨어나는 12살짜리의 고통을 나눌 그 누구도 없다. 그렇게 천지사방이 절벽인 현실에서 주목나무 괴물(리암 니슨)이 나타난다.

판타지 장르임을 분명히 표명하지만 <몬스터 콜>에서 지축을 흔들며 요란스럽게 등장한 몬스터가 하는 일은 그저 이야기를 들려주고 들어주는 것뿐이다. 채 기억하지 못할 어린 시절 함께 색연필을 붙잡고 그림을 그리던 젊고 예쁜 엄마, <킹콩>을 함께 보며 잠들곤 하던 다정한 엄마, 언제까지라도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은 엄마가 코너의 곁을 떠날 시각이 가까워오고 있다. 그렇지만 요란한 덩치와 신령한 힘을 갖고 있는 주목나무 괴물은 엄마를 낫게 해달라는 코너의 소원을 외면한다. 대신 눈앞에 닥친 엄마와의 이별이라는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죽을 만큼 괴롭겠지만 그래도 견딜 수 있을 만한 것이 되도록 도와주기 위해 온다.

주목나무 괴물이 들려주는 세 가지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코너는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랑하는 엄마를 영원히 떠나보내야 하는 공포가 너무나 힘겨웠기에, ‘차라리 이 모든 것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그래서 잡고 있던 엄마의 손을 먼저 놓아버렸다고. “넌 네 고통이 끝나길 바란 것뿐이야. 그건 너무 당연한 거야.” 도저히 혼자 감당할 수 없었던 공포와 고통, 비틀린 죄책감을 털어놓은 코너는 비로소 아이다운 얼굴로 진심을 말한다. “엄마가 떠나지 않으면 좋겠어. 떠나지 마요...” 12살 아이답게 울며 품을 파고드는 아들을 따스하게 안아 토닥이며 엄마는 눈을 감는다. 코너와 손을 꼭 맞잡은 채로.

“인생이 맘대로 되진 않죠. 나로선 어쩔 수가 없어요”, 머릿결 희끗한 초로의 남자가 할 법한 말을 천연덕스레 하거나, “치료 후엔 항상 아파요. 내일은 괜찮아질 거예요. 곧 좋아질 거니까 그때 가세요”, 할머니에게 어른스럽게 말하는 아이 모두 12살이다. 이 아이들은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엄마에게는 입도 뻥긋하지 않는다. 안 그래도 힘들어 하는 엄마를 더 괴롭힐 수는 없다. 그러니 그 모든 걸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덩치도 꽤 커지고 목소리도 걸걸해졌으니 ‘어른스럽게 굴어야한다’고 생각할 법한 나이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우울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엄마를 바라보며 그 슬픔의 기운에 함께 사로잡히는 일, 언제까지고 함께 하고 싶은 엄마와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 찢어지는 슬픔마저 견딜 수 있을 만큼 어른스러울 수는 없다. 그건 진짜 어른들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일이니까. 게다가 12살이면 어른의 상처를 돌보고 부모의 고통을 배려하는 희생적 대처보다는 울고, 부수고, 소리 지르고, 애원하며 자신의 고통을 돌보아달라고 요구하는 권리를 행사해도 좋을 나이. 그래서 <어바웃 어 보이>는 철들지 않은 어른아이를 친구로 보내주고 <몬스터 콜>에서는 저 옛날부터 모든 것들을 지켜보았던 주목나무 괴물이 소년을 찾아온다.

<어바웃 어 보이>와 <몬스터 콜>의 엄마들은 잘 알지 못하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사랑하는 아들이 ‘매일 학교에서 갈가리 찢기고 있’음을 엄마는 알지 못했다. 입을 꾹 다문 아들의 마음을 알 순 있지만, 그 아들과 눈을 맞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절망할 건 없다. 각자 ‘섬’인 우리는 ‘대륙’으로 연결돼있으니, 누군가 “제발 다시는 자살 시도하지 말아요. 마커스가 당신을 걱정하고 있으니까요. 걱정하는 마커스가 난 걱정돼요”라며 12살 소년의 두려움을 대신 알려주기도 한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순간을 함께 하는 몬스터 친구가 찾아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일찍 철 들어버린 아이들은 말해도 괜찮다.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대신 “괜찮지 않아요. 도와주세요”라고.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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