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해서 세상은 바뀌었다!

맨 손으로 떨쳐 일어나 남들이 가지 않은 거친 길을 달음박질친 사람들이 있었다. 공포와 두려움에 맞서는 그들의 거친 호흡을 따라잡고, 열정과 의지로 반짝이는 두 눈과 피땀 범벅의 얼굴을 클로즈업할 때 영화는 역사를 기록하는 매체의 소명을 떠맡는다. 1910년대 영국의 여성 참정권 투쟁가들의 이야기를 다룬 사라 가브론의 <서프러제트>(2015)와, 1987년 한국의 6월 항쟁을 재현한 장준환의 <1987>(2017)은 좀 더 나은 세상, 인간으로 존중받는 세상을 위해 힘차게 내디뎠던 많은 이들의 걸음걸음을 카메라에 담는다.

“여성은 침착하지도 조화롭지도 못해서 정치적 판단이 어렵습니다.”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면 사회구조가 무너집니다.” “남자들이 여성을 대변하는데 투표권이 왜 필요합니까? 투표권을 주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1912년, 런던’ 자막과 함께 웅장하고 박력 있는 남성들의 목소리로 영화 <서프러제트>는 시작된다. 남성보다 3배 더 일하고도 3분의 1밖에 월급을 받지 못하는 삶, 성추행과 폭력의 위협에 노출되면서도 항변하지 못하는 삶, 엄마와 아내로서 의무만 있고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던 삶. 앞치마를 두른 채 자욱한 연기 속에서 일하는 세탁공장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목소리’가 없다.

세탁공장에서 태어난 모드(캐리 멀리건)는 네 살 때 대형 통이 쏟아져 화상 입은 엄마를 잃고 열네 살 때부터 일했다. “여성에게 투표권을!” 구호와 함께 눈앞에서 유리창이 와장창 깨져나가던 그날 이전까지 그의 삶은 평범했다. 스물네 살에 감독관이 될 만큼 성실했고, 다섯 살 아들 조지, 다정한 남편 소니(벤 위쇼)의 엄마이자 아내로서 의문 없이 헌신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며 돌을 던지는 동료 바이올렛(앤 마리 더프),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이디스(헬레나 본햄 카터) 등의 동참요구를 외면하지 못한다. ‘참정권’ 혹은 ‘서프러제트’가 무언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자신에게도 ‘또 다른 인생’이 있을 거란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서프러제트 일원으로 새로 합류한 모드를 주시하던 특수부 감시전문가 스티드 수사관(브렌단 글리슨)은 모드에게 “난 당신을 안다”고 말한다. 에멀린 팽크허스트(1858~1928, 메릴 스트립) 같은 명망 있거나 부유한 운동가들이 “당신처럼 가진 것도 없는 사람들을 이용한다”면서 ‘인부’, ‘총알받이’, ‘소모품’으로 이용될 뿐이라고 경고한다.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니오”, 구금하는 대신 모드를 훈방조치하면서 이중첩자 제의를 하는 그는 “당신은 이길 수 없어요. 내가 구해주리다” 단언한다. 하지만, 그는 틀렸다. 친절하고 정중한 목소리로 아는 척했지만 그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녀를 구원하는 건 오로지 그녀 자신과, 그녀와 뜻을 함께 하는 여성/운동가들의 연대뿐이라는 것도 몰랐다.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주도하는 무력투쟁에 회의적이었던 모드를 강철 같은 투사로 단련시킨 것은 여성을 잘 안다고, 여성의 삶은 이러해야 한다고 단정했던 남성들의 말이었다. “아들이 아닌 딸을 낳았으면 그 애는 어떻게 살았을까?” 묻던 아내에게 남편 소니는 “어떻게 살긴, 당신처럼 살았겠지” 답하고 “투표권? 당신이 투표권을 가져서 뭘 하려고?” 되물었다. “당신은 엄마이자 아내야. 그게 당신의 삶이야. 참아주는 데도 한계가 있지!” 냉정한 판관처럼 내뱉었던 그는 사랑하는 조지의 엄마로서의 권리를 모두 박탈하고 입양시켜버림으로써 모드를 얽매고 있던 ‘모성’이라는 마지막 사슬마저 끊어버린다. 모드는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자유로운 투사가 된다.

서프러제트 운동을 다룬 최초의 장편 상업영화 <서프러제트>는 1913년 6월 4일,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며 더비 경마대회에서 숨진 에밀리 와일딩 데이비슨(1872~1913, 나탈리 프레스)의 장례식 장면으로 끝난다. 장례식 준비를 마치고 밝은 햇살 속으로 나서 수많은 인파와 합류하는 모드의 모습 뒤로 그녀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이성이 그녀에게 물었다. 침묵 속에서 무엇이 들리는가? 그녀가 대답하길, 발소리가 들려요. 천 개 아니 만 개, 그 이상의 발소리가 이쪽으로 와요. 바로 당신을 따르는 발소리입니다. 앞장서세요.”(올리브 슈레이너, 『Dreams』 중) ‘목소리’는 이제 그녀/들의 것이다.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던 서울대학생 박종철(여진구)이 숨진다. 급보는 대공수사처 박처장(김윤석)에게 전해진다. “태우라우.” 더없이 간명한 지시를 받은 이들이 급하게 달려가 최검사(하정우)에게 시신 화장을 요청한다. 하지만 잇단 압력에 굴하지 않고 부검은 강행되고, ‘서울대학생 쇼크사’ 기사가 최초 타전된다. 경찰은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며 단순 쇼크사로 발표하지만 현장에 남은 흔적들과 부검 소견을 주목하던 윤기자(이희준)는 ‘물고문 도중 질식사’를 보도한다. 박처장은 조반장(박희순) 등을 구속하는 걸로 사건을 덮으려고 하지만 그들이 수감된 영등포 교도소 교도관 한병용(유해진) 등에 의해 사건의 은폐 및 축소 사실이 알려진다.

안타까운 죽음으로 시작된 <1987>의 끝에 또 다른 죽음이 있다. 한병용의 조카인 연희(김태리)는 대학 입학 후 첫 미팅에 나섰다가 박종철 사망 49재 시위 현장에 휩쓸린다. 백골단에게 잡히려는 급박한 순간, 그의 손목을 잡고 달린 사람은 연세대 만화사랑 동아리 회원이었던 2학년생 이한열(강동원). 광주 항쟁의 참상을 기록한 비디오 상영회장과, 연희의 가게 앞에서 한열과 연희는 민주화시위를 놓고 충돌한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로 인해 상처받고 세상을 뜬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연희는 강하게 회의한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돼. 마음이 아파서...” 아픈 마음으로 시위의 선두에 섰던 한열의 뒤통수를 최루탄이 가격한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발생일인 1월 14일에 시작돼서 이한열 추모 시위에 참석한 인파들이 광장을 가득 메운 6월 10일로 끝나는 <1987>의 영화적 형상은 실재했던 역사적 격동을 고스란히 닮았다. 김윤석이 분한 박처장은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숱한 이들의 생명을 유린한 군부독재정권의 하수인이자 그 자체를 표상하는 강력한 안타고니스트로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우뚝 서있다. 반면 부패한 권력에 항거하는 모든 목소리를 ‘빨갱이’로 탄압하는 레드 콤플렉스의 화신인 그에 맞서 극적 갈등을 이끌고 문제를 해결하는 프로타고니스트는 영화에 없다. 하지만 프로타고니스트의 자리가 비어있지는 않다. 특정 국면에서 자신의 임무를 마친 인물들이 또 다른 인물에게 바통 넘기듯 역할을 인계하기 때문이다.

“박종철을 살려내라”와 “이한열을 살려내라”의 분노 가득한 슬픔의 절규를 잇는 거대한 역사적 연쇄는 끝내 ‘아픈 마음’을 외면하지 못하는 가녀린 양심들의 릴레이였다. 고문과 죽음에 대한 공포, 강력한 권력에 대한 내면화된 두려움, 가족에 대한 사랑...인간이어서 갖는 그 모든 것 앞에 취약할 뿐인 인물들은 그럼에도, 안 되는 걸 안 되게 하고 돼야 하는 걸 되게 하는 결정적 선택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벽을 허물고, 강물의 흐름을 바꾸는 역사적 변혁은 그렇게, 강력한 악을 해소하는 특정한 영웅의 형상 없이 만들어진다. 삼촌을 도와 민주화 도정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면서도 자신의 위치를 회의했던 연희도 한열의 죽음을 애도하는 거리의 수많은 시민들 앞에 서 외친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영화 <1987>은 30년 전 뜨거웠던 광장의 승리를, 그 희열의 기억을 환기시킨다. 속절없이 스러졌던 박종철, 이한열의 아름다웠던 청춘의 시간을 되돌려 놓음으로써 뒤늦게나마 절절한 애도의 장을 펼친다. 무법천지에서 ‘법대로’를 관철한 검사, 작은 단서를 놓치지 않은 기자, 침묵하기를 거부한 의사, 진실 전달에 목숨 건 교도관, 필사적 도주로 독재정권 시스템을 우롱했던 운동가, 거리와 시장에서 목청 높였던 익명의 시민 등 살아온 역사와 각자의 위치는 다르더라도 ‘그날’의 꿈을 공유했던 수많은 얼굴들에서 낯익은 얼굴을 찾게 만든다. 엄혹한 시간을 견뎌냈던 이 땅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따스한 위로와 뜨거운 감사다.

드의 이야기는 1913년에서 끝났지만, ‘모드들’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실제 에밀리 와일딩 데이비슨의 장례식 화면을 보여주는 에필로그와 함께 영화는 여성 참정권 투쟁의 길고 긴 역사를 자막으로 소개한다. 영국은 그로부터 15년 뒤인 1928년 모든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고, 스위스는 1971년에서야 암흑의 역사에서 벗어났다.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이 부분적이나마 투표권을 갖게 된 건 2015년이었다. “끝나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어요”, 모드를 회유하던 스티드 수사관의 말처럼 또 다른 ‘모드들’ 중 적잖은 이들은 승리를 맛보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을 지도 모른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고양되는 모드의 변혁적 에너지를 바탕으로 한 <서프러제트>의 승리 서사는 그처럼 수많은 현실의 패배와 굴종의 시간을 품고 만들어졌다.

스크린을 가득 메운 광장의 인파 위에 ‘1987’의 숫자가 크게 새겨지던 <1987> 엔딩의 감동도 메케한 최루탄 냄새와 땀 냄새를 즉각 소환하는 당시의 다큐멘터리 장면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날 이후 현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직선제 개헌’이라는 6.29 선언의 과실은 결코 목숨 걸고 뛰었던 ‘아픈 마음’들의 것이 되지 못했다. 참혹한 패배의 기억이 광장의 환희를 잠식한 건 순간이었다. 그 후로 기나긴 침묵과 외면의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1987>은 <서프러제트>와 함께 그 모든 걸 승리의 역사라 선언한다. 죽은 이 대신 울고, 고문에 못 이겨 동료를 배신한 이 대신 분노하며 어깨를 겯고 만들어냈던 1987년 6월, 민주공동체의 거대한 함성은 회의와 부끄러움의 시간을 넘어 오늘에 공명한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 회의하던 <1987> 속 연희의 질문에 “그래도 우린 이기겠죠”, <서프러제트>의 모드는 나직하지만 단단하게 답한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순응했던 인물에서 환경을 변혁하는 인물로 거듭났던 모드의 예언은 현실이 됐다. 그렇게 목소리와 발걸음들이 모이고 함께 할 때, 그렇게 할 때에야 비로소 세상이 바뀐다는 것을 <서프러제트>와 <1987>은 일깨운다. ‘야만의 과거를 낭만적으로 회고하는 시대극’이라는 안정적 지위를 두 영화가 거부하는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한 세기 혹은 한 세대라는 시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금/이곳의 현실과 겹쳐지는 시대성으로 인해 미래를 상상하는 치열한 현재형의 영화가 되는 것이다.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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