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멸에 대하여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 
육신의 낡은 옷을 벗고
훌훌 떠나는 고승, 대덕들.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도 중요합니다―

 

1960년대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청담(淸潭1902~1971) 큰스님이 어느 날 속리산 법주사에서 열린 법회에 참석했습니다.

스님은 현대 한국 불교의 중추인 조계종 종단의 기초를 닦고 주춧돌을 놓은 분이었기에 법회는 많은 불자들이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큰 스님의 말씀이 끝나자 한 불자가 손을 들었습니다. “스님, 사람의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일순 장내에 긴장감이 돌았습니다. 불교계의 상징적 어른으로 대중의 존경을 받고 있던 큰 스님이었기에 장내의 모든 시선이 스님을 향했습니다.

잠시의 정적을 깨고 스님이 입을 열었습니다.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노.” 순간 장내에 폭소가 쏟아졌습니다. 심오한 답변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던 참석자들은 큰 스님의 싱거운 대답에 긴장이 풀려 “와~!” 웃음을 터뜨렸던 것입니다.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는가”라는 이 한 마디는 사실은 2500년 전 공자가 처음 한 말입니다. 어느 때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가 “스승이시여, 죽음이란 무엇입니까?”하고 묻습니다. 공자 가라사대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未知生 焉知死)”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오늘 날 ‘논어’에 전해 옵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전에는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이라고 간단히 나와 있습니다. 인간이건, 동물이건 살아있는 것의 생명이 끊어지는 상태를 죽음이라 일컫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물학적 측면에서의 정의이지 종교적, 철학적 의미에서의 답으로서는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죽음은 누구나 언젠가 맞이해야 하는 자연현상으로 삶의 마지막 종착점입니다. 죽음은 생명뿐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삶의 단절이라는 점에서 개인에게 두 번 있을 수 없는 일생일대 중대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두 글자는 산 사람에게 공포를 안겨줍니다. 그것은 미답(未踏))의 세계로 가야하는 태생적인 숙명이기에 두려움을 갖게 되는 건 당연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사람이 죽음을 선고 받고 인지하기까지 5단계의 과정을 거친다고 분석합니다.

사람이 큰 병에 걸렸을 경우 제일 먼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검사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하고 의심하고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1단계가 지나면 ‘분노’의 2단계로 들어갑니다. “다른 사람은 다 멀쩡한데 왜, 나만 이렇게 된 거야”하며 분노합니다. 그러고 나면 세 번째 ‘협상’이라는 타협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익숙한 예로 “이번 한번만 살려 주시면 앞으로 정말 착하게 살겠다”고 하느님이든, 신이든 미지의 대상을 향해 호소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하듯 애원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도 확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곧 ‘우울증’에 빠집니다. 이때는 모든 일에 초연해 지고 멍한 채 시간을 보내거나 울음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을 겪고 나면 마지막 단계로 급기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때는 우울증을 벗어나 차분하게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입니다. 그런 다음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결국 죽음이 앞에 와있다는 사실을 ‘수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에서는 내세(來世)를 확언합니다. 천당이 있다고도 하고 극락이 있다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미망을 헤매는 사바세계의 보통사람들로서는 그곳을 가보지 않았으니 반신반의합니다.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나 사찰에서는 착한 일을 하면 천당이나 극락에 간다고 하지만 기실(其實)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면 천당이나 극락에 갈 일보다 지옥에 갈 죄업을 더 많이 쌓았기에 공포는 더 커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두려움 보다는 모든 고뇌를 훌훌 털고 기쁨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속인들은 죽기 전 유서를 남겨 재물을 나누어 주고 사랑하는 이와의 작별을 고하지만 수행으로 일생을 산 선사(禪師)들은 절절한 삶의 체험이나 치열한 구도 끝에 깨우친 ‘진리의 글’을 남깁니다. 임종게(臨終偈)입니다.

승려 시인 정휴(正休)스님이 지난 2000년에 펴낸 ‘적멸의 즐거움’에 보면 역대 대덕 고승들의 마지막 행동과 말씀들이 마른 땅을 적시는 촉촉한 가을비처럼 주옥같이 적혀있습니다. 그들 역대 선사들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마치 여행을 떠나듯 홀연히 적멸(寂滅)의 세계로 유유히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적멸이란 불교에서 죽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평생을 무소유의 청빈한 삶을 산 법정스님(1932~2010)의 다비식이 열린 순천의 송광사. 불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NEWSIS

당(唐)나라의 혜안국사는 입적(入寂)에 이르러 모든 소장품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내가 열반에 들면 시신을 숲속에 놓아 들불에 타도록 하라”고 일렀고 청활스님은 “내가 입적하거든 시신을 풀밭 에 갖다 놓아라. 탑이나 부도(浮屠)를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반석위에 앉은 채로 열반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앉아서 입적한 이가 있고 서서 열반을 한 경우도 있습니다. 물구나무를 서서 거꾸로 입적한 선사가 있었는가 하면 뜰 앞을 거닐다가 “나 오늘 가야겠다”고 독백을 하며 몇 발짝을 내딛은 뒤 입적한 선사도 있습니다. 스승에게 관을 선물 받고는 덩실덩실 춤을 춘 선사, 스스로 장작더미 위에 올라가 소신공양(燒身供養)한 선사, 황제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서둘러 입적한 선사도 있습니다.

이 땅 고승들의 입적과정과 임종게도 눈을 끕니다. 조선조 고한희언선사는 임종에 이르러 “헛되이 세상에 와서 지옥의 찌꺼기만 남기고 가나니 이 몸은 저 숲에 버려 산짐승의 먹이가 되도록 하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고 야반(夜半) 삼경(三更)에 “문빗장을 잠그라”고 한 경봉스님, “일생동안 남녀 무리들을 속여서 그 죄업이 하늘을 넘친다”고 읊었던 성철스님, 모시던 스님이 입적하자 다비식에서 “스님, 스님, 얼마나 좋으십니까!”라고 외쳐 주위를 깜짝 놀라게 한 사연…등등 많은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또 생전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괴팍한 기행을 일삼아 ‘걸레스님’으로 불린 중광(1934~2002)은 “괜히 왔다 간다”고 한마디를 남기고 이승을 떠났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두렵기만 한 고통이 아니라 ‘기쁨의 잔치’였던 것입니다.

육신이라는 낡은 옷을 벗어 버리고 죽음 앞에서 조차 초연한 선사들의 자유는 소유와 집착으로 가득 찬 오늘 우리 현대인들에게 한줄기 번개처럼 충격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죽음학 학자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2,3일 가벼운 여행을 갈 경우에도 하루 전 소지품을 준비하곤 하는 게 관행인데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영원한 길을 떠나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다”고 우리국민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바세계의 미혹한 중생들이 어찌 생사를 초월한 선사들의 그것을 따라 갈 수 있을까 마는 마치 먹기 위해 사는 사람들처럼 실컷 배를 불리고 노래하고 춤추고 왁자지껄 몰려다니는 분위기에 죽음을 생각하고 사후세계를 생각한다? 과한 기대가 분명합니다. 어느 날 쫓기듯 다른 세상으로 황망히 떠나가는 오늘 우리 사회의 풍조에 분명 문제가 있는건 사실입니다.

구글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아침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다”며 날마다 죽음을 생각하면서 구글을 세계 제일의 기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갔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6년 국내 사망자는 28만 1000명이라고 합니다. 날마다 770명이 세상을 떠난 셈입니다. 사망자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2016년 총 13,092 명(2011년 15,906명)이 었습니다. 하루에 40명이 자살을 한 것입니다. 자살률 전 세계 1위입니다. 오호라.

대설(大雪)이 지나면서 시절은 어김없이 한 겨울로 접어들었습니다. 잿빛 하늘에서는 연일 눈이 오다, 비가오다를 거듭합니다. 잘 먹고 잘 사는 행복한 삶, 웰빙(well-being))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 중요한 것은 사람답게 죽는 웰다잉(well-dying)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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