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정체성의 탐구, 그 호방함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자신의 영화 초반 잠깐 모습을 드러내는 카메오 출연으로도 유명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우디 앨런, 멜 깁슨 등등부터 최근 안젤리나 졸리까지 오랜 배우로서의 연륜을 바탕으로 출중한 연출역량을 과시하는 경우는 적지 않다. 하정우, 정우성, 유지태, 양익준, 구혜선 등 한국영화계에서도 이른바 ‘투잡’을 뛰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문소리의 <여배우는 오늘도>(2017)와 정가영의 <비치온더비치>(2016)는 여기에 다른 면을 더한다. 연출자 문소리와 정가영이 각각 ‘문소리’와 ‘정가영’이라는 극중 인물을 연기할 때 실제와 가상은 경계를 나누다가도 교묘하게 뒤섞인다.

“안 바빠요. 집에서 애 키우고 시나리오 기다리고…” 18년차 배우 문소리(문소리)는 우연히 등산길에서 만난 영화사 대표에게 앓는 소리를 한다. 하지만 대학생 아들을 둔, ‘쎄고 죽이는’ 정육점 여자역할이란 말에 웃음기가 사라진다. 안 그래도 고대하던 작품의 출연 무산 소식에 저조해진 기분이 더욱 곤두박질친다. 게다가 ‘문소리가 딱인 역할’이라니. “문소리 나름 매력 있지,” 혹은 ‘천하의 문소리’라는,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헷갈리는 말들만큼이나 속을 긁는다. 격려한답시고 엄한 메릴 스트립까지 끌고 와 ‘한국의 메릴 스트립이 돼라’며 부추기는 친구까지, 모두 다 짜증난다.

문소리는 1999년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으로 인상적으로 데뷔했다. <오아시스>(2002)로 베니스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후 다양한 작품들에서 독보적인 개성을 드러냈으며, 2016년 제73회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으로 참가하는 등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하지만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과 2006년 결혼, 2011년 출산 등을 거치며 작품 의뢰가 들어오지 않아 많이 의기소침했었다고 한다. 그때 임순례 감독의 권유로 대학원 석사과정에 들어갔고, 졸업을 위한 작품으로 만든 단편 3편을 묶어 개봉한 것이 <여배우는 오늘도>이다.

문소리 감독이 만든 문소리 주연의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의 1부 ‘여배우’에서 주인공 ‘문소리’는 대중들이 알고 있거나 기억하는 배우 문소리의 많은 것들과 겹쳐진다. 누구나 인정하는 연기파 배우지만, ‘연기력’보다 ‘매력’을 더 쳐주는 영화산업에서 기회는 점점 줄어든다. 더 젊고 ‘지나치게 예쁜’ 배우들과의 경쟁에서 18년이란 관록은 차라리 짐이 될 뿐이다. 비록 영화적 상상력이 덧붙여진 허구라지만, 경쾌한 리듬과 깔끔한 연출력의 신예 감독 문소리와 만나게 된 기쁨을 오롯이 만끽하기에는 입맛이 영 쓰다.

2부 ‘여배우는 오늘도’는 배우뿐만 아니라 딸, 며느리, 아내, 엄마로서의 고군분투가 더해지는 치열한 일상을 코미디로 그려낸다. 미장원에서 풀 메이크업한 문소리는 남들 시사회 갈 때 친정 엄마의 임플란트 치료 할인을 위해 치과를 방문해 사진을 찍는다. 치매인 시어머니 문병에, 마이너스 통장 대출을 위한 은행 방문에서 수없이 많은 사인도 해야 한다. 맘에 들지 않는 특별출연 제안을 뒤탈 없게, 요령껏 거절하느라 마신 술 때문에 녹초가 된 그녀는 늦은 밤 거실바닥에 쓰러져 “정말 힘들다”고 토로한다. 그때 가만히 그녀를 토닥이던 남편이 건네는 위로의 말이 걸작이다. “...정 힘들면, 술이라도 좀 줄여요.”

2부 ‘여배우는 오늘도’가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고충을 담아낸다면, 3부 ‘최고의 감독’은 영화하는 사람으로서 예술 혹은 예술가에 대한 정의를 질문한다. 아무도 찾지 않는 감독의 쓸쓸한 장례식장에서 펼쳐지는 블랙 코미디는 여배우를 소모하거나, 자의식 과잉의 영화계 풍토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아름다움이라는 이상을 좇아 살아가는 영화감독, 예술인들에 대한 따뜻한 연민과 동지의식이 쓸쓸한 뒤끝을 감싼다. 그렇게 <여배우는 오늘도>는 한국사회에서 여배우로 살아가는 위태로운 자의식, 여성이라는 분열적 정체성, 그리고 예술가 여성의 예민한 감각 등을 골고루 담아낸다.

 

운 겨울날, 가영(정가영)은 헤어진 전 남자친구 정훈(김최용준)에게 전화를 걸지만 ‘받지마’라는 이름으로 등록된 가영의 전화벨소리를 정훈은 외면한다. 그렇다고 물러설 가영이 아닌지라, 다른 주민을 따라 아파트 출입구를 통과한 가영은 결국 집에 혼자 있던 정훈과 만난다. ‘가영’과 ‘정훈’이란 인물 이름이 화면에 큼직하게 나타나는 <비치온더비치>의 이 도입부는 우리가 익숙하게 접하던 영화 속 남녀의 만남과 적잖이 다르다. 여자는 막무가내로 들이대는데, 남자는 필사적으로 방어한다.

육체의 밀어를 나누기 전 연인들의 밀고 당김, 지루한 공성전과도 같은 에피소드는 로맨스를 다룬 영화에서 익히 보아왔다. 하지만 “그냥 이렇게 아름다울 수는 없는 거냐?”, “니가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내치고 구박하는 남자에게 “야, 우리 자면 안 돼? 자자!” 끈질기게 조르고, “안 한 지도 오래됐고, 그래서 색기도 안 흐르는 것 같고...그럼 키스도 안 돼?” 달라붙는 여자는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정훈은 지금 잘 만나는 여자 친구도 있고, 가영에게도 조만간 ‘내꺼’ 하고 싶은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

유튜브 채널에 <혀의 미래>(2014), <내가 어때섷ㅎㅎ>(2015), <처음>(2016) 등 단편영화들을 올린 영화감독 정가영의 장편 데뷔작 <비치온더비치>는 여러모로 독보적이다. “내 남친들은 나한테 먼저 안 덮친다(가영)/그 전에 니가 먼저 덮치니까 그렇지(정훈)/그건 어떻게 아는데? 그냥 기다리면 돼?(가영)/ 그냥 먼저 다가오게 만들면 되지(정훈)/어떻게?(가영)/그냥...(정훈)”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익숙하게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 속 성적 욕망은 어떠한 첨가물도 추가되지 않은 것처럼 투명하고 그 자체로 순수하다. “다시 만나자. 잘해줄게,” 관계의 지속과 함께 “너 지금까지 여친이랑 잔 거는 눈 감아줄게” 협상을 제안하는 쪽이 가영이라는 것도 익숙한 통념과의 이별을 재촉한다.

정가영 감독의 단편들과 데뷔작에서 여성 주인공 ‘가영’은 성적 욕망을 거리낌 없이 말하고, 어떠한 죄책감 없이 추구하며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감독 자신이 관심 있었던 연애와 짝 짓기, 그리고 ‘재미있는 것’에 대한 집중적 추구의 결과로 설명하는 이 여성 캐릭터의 출현은 한국영화 지평에서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가영에게 내내 휘둘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영과 함께 했던 시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관계의 지속 가능성을 탐색하는 정훈이라는 남성 캐릭터 또한 젠더간의 권력 행사가 배제된 새로운 로맨스에 대한 기대를 높인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결국 가영은 ‘섹스로 실수하고 섹스로 사과하는 그다운 방식’으로 정훈과의 지나간 연애에 대해 화해를 시도한다. 정훈은 늘 그랬던 것처럼 그 사과를 받아들이면서 가영과의 또 다른 추억을 남긴다. <비치온더비치>는 그런 점에서 짧지 않은 여운을 남기는 인상적인 로맨스영화로 귀결된다.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 젊은 욕망으로 인해 때로는 실수도 하고 상처도 입히지만, 자신들의 욕망을 두려워하거나 에두르지 않는 생생함으로 소통하는 그들만의 관계는 분명 어떤 억압으로부터도 자유롭다. 발칙하거나 때로는 당혹스러운 이들의 관계 맺기 혹은 사랑법은 낯설지언정 그 강력한 솔직함과 투명함으로 보는 이를 매료시킨다.

제 막 영화인으로서 경력을 쌓아가기 시작한 20대 감독 정가영과, 어엿한 영화계 중견으로서 위치를 갖는 40대 배우 문소리는 <비치온더비치>와 <여배우는 오늘도>에서 자연인으로서 정가영/문소리와 영화인 정가영/문소리를 자유롭게 뒤섞는다. “옛날에 문소리 진짜 장난 아니었는데요”라는 대사에 샐쭉해하는 반응을 연기하는 영화 속 문소리가, 자신의 연기를 꼼꼼하게 모니터하는 감독 문소리와 얼마만큼 겹쳐지는지 혹은 분리되는지 알 수 없을 때 영화적 재미는 배가된다. ‘몸 막 굴리는 가영이’를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는 정가영감독이 차분하게 영화에 대한 생각을 밝힐 때 가영이라는 사랑스러운 캐릭터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맹렬해진다.

<여배우는 오늘도>는 ‘칸의 여왕’ 전도연조차 다음 작품을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이 길어지는 한국영화의 현실을 환기시키고 문제제기한다. 포스터에서 높은 킬 힐에 어깨를 시원하게 드러낸 빨간 드레스를 입은 문소리가 정작 레드카펫이 아닌 운동장 육상 트랙 위에 서 있는 이유이다.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직접 밥상을 차리겠다고 나선 18년차 여배우의 작심은, ‘선생님/간호사/작가/운전기사...는 오늘도’처럼 어떤 직종의 삶이라도 대체 가능한 보편타당함을 날카롭게 포착함으로써 이 시대 여성들의 삶을 대변하고 목소리를 응축한다.

<비치온더비치>는 종전까지 성적 욕망을 발화하는 여성들에게 에누리 없이 과감한 응징과 처벌이 주어졌던 한국영화에 던지는 발칙한 도전장이다. 부분적으로 본인의 연애경험으로부터 비롯된 영화 속 ‘가영’이 실제보다 ‘더 똑똑하고, 재미있고, 사랑스러운 인물’이기를 바란다는 정가영 감독은 극중 인물과의 동일시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고 말한다. ‘가영’이 그렇듯 한국사회의 억압적 섹슈얼리티를 내면화하지 않는 감독 정가영의 호기로움과 담대함은, 그가 만들어갈 미래의 한국 영화, 생생한 현실의 민낯을 드러낼 많은 여성들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를 한껏 높인다./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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