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로는 없다…오직 앞으로 나아갈 뿐!

세상은 여자, 남자 어울리며 살아가는데, 그 세상을 근사치에 가깝게 담아내는 영화세상에서는 왜 여자들을 보기 힘드냐는 불만이 끊이지 않는다. 남자 배우(들)의 얼굴로만 꽉 채운 포스터들 앞에서 여성의 부재를 한탄하거나, 여성인물들을 얄팍하게 소모하는 영화들에 일일이 분노하기도 지쳤다고? 그렇다면 윌리엄 올드로이드 감독의 <레이디 맥베스>(2016)와 존 매든 감독의 <미스 슬로운>(2016)을 만날 시간이겠다. 좀처럼 스크린에서 보기 힘들었던 여자들, 어안이 벙벙할 만큼 압도적으로 강력한 그녀들을 만날 수 있다.

혼식의 신부, 캐서린(플로렌스 퓨)의 옆모습을 뒤에서 보여주는 장면으로 <레이디 맥베스>는 시작된다. 오른쪽에 선 신랑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17살 어린 신부의 얼굴로 결혼식 장면이 끝날 때, 이 결혼이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임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과연, 첫날 밤 아버지뻘은 됨직한 소녀의 남편 알렉산더(폴 힐턴)가 들어와 대뜸 “벗으라”고 명령하고 벌거벗은 신부를 세워둔 채 혼자 침대에 누워버릴 때 예상이 틀리지 않음을 확신하게 된다. 이 드라마가 파국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갈 것임을.

쉽게 말해 씨받이로 돈에 팔려온 어린 신부는 딱히 할 일이 없다. 아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아내의 젊은 육체를 관음하며 손으로 욕망을 해소하는 남편과 아이를 만들 일도 없고,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집안의 최고 권력자 시아버지 보리스(크리스토퍼 페어뱅크)는 남편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잠드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코르셋과 스커트를 부풀리는 크리놀린 위에 푸른 색 벨벳 드레스를 입고 브로치를 목 끝까지 올려 단 채 침실 창문턱에 올라앉아 하염없이 밖을 내다볼 뿐이다. 혹은 저택의 안주인다운 품격을 과시하며 소파에 품위 있게 앉아 꾸벅꾸벅 졸거나.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원작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1865)은 끓는 납을 귀에 부어 70살의 시아버지를 살해한 엽기적 범죄로 마을 광장에서 처형된 젊은 여성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다. 원작에서 내뿜던 여주인공의 강렬한 인상은 19세기 영국으로 배경을 옮긴 윌리엄 올드로이드 감독의 영화에서 더욱 과감하게 강화된다. 엄숙한 결혼식장에서도 맹랑한 호기심을 드러내고, 강력한 가부장적 권력을 행사하는 남자들 앞에서도 말대꾸하거나 키득거리던 캐서린은 시아버지와 남편이 사업차 집을 비우자 아예 맨발로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하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광활한 벌판을 산책한다. 두려움에 압도되거나 부당한 권력에 위축되는 일 따위는 원래부터 그녀의 천성에 없던 것이다.

그러니 아침 잠깨는 것조차 하녀 안나(나오미 아키에)에 의해 통제받던 이 집에서 드디어 자신이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낸 캐서린은 거리낌이 없다. 하인 세바스찬(코스모 자비스)과 낮밤을 가리지 않고 정을 통하며 급기야 자신의 침대에까지 끌어들인다. 그러다가 시아버지에게 발각되자 시아버지를 독살하고, 남편이 돌아와 자신과 세바스찬을 겁박하자 그를 죽여 암매장한다. 비로소 행복을 만끽할 즈음 남편의 정부가 낳은 테디(앤톤 팔머)가 찾아오지만, 집안의 상속권자 자리를 차지한 그 소년으로 인해 자신의 입지는 물론 세바스찬과의 관계가 불안해지자 아픈 소년의 얼굴마저 베개로 눌러버린다.

“수치스러울 일 없어요.” 캐서린은 부정을 추궁하는 시아버지 앞에서 눈 동그랗게 뜨고 반박했었다.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희대의 악녀는 이 순간 거짓을 말한 게 아니었다. 한 발짝이라도 뒤로 물러서면 죽음과도 같은 복종과 모욕만이 기다리는 현실에서 캐서린은 오로지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난 죄가 없어요,” 죽을 때까지 함께 하겠다던 약속마저 깨뜨리며 세바스찬을 지옥의 불구덩이로 밀어 넣으며 했던 결백주장도 그러니 그녀에게만큼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영화는 뱃속에 자신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세바스찬의 아이를 가진 캐서린이 늘 그렇듯 소파에 반듯하게 앉아있는 모습으로 끝난다.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없지만, 어찌됐든 그녀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싱턴 정가에서는 별별 이야기들이 떠돈다. 가령 워싱턴의 고위 공직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인생을 손가락 하나로 끝낼 수 있는 한 사람을 두려워한다고도 하고, 그 엄청난 영향력의 로비스트에게는 ‘사실은 얼음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한다. 그는 ‘워싱턴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 ‘승률 100%의 로비스트’ 엘리자베스 매들린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이다. 그는 곧잘 말한다. “로비의 핵심은 통찰력이에요. 상대 움직임을 예측한 후 대책을 강구해야 하죠. 승자는 상대보다 한 발자국 앞서서 회심의 한 방을 상대보다 먼저 날려야 해요. 상대를 놀라게 만들되 상대에게 놀라선 안돼요.”

거대기업에서 근무하며 명성과 악명을 동시에 쌓아온 슬로운은 총기 구입시 신원조사를 규정한 히튼-해리스 법안 통과를 위해 11년간 몸담았던 회사를 떠나 피터슨 와이트의 브래디 캠페인에 가담한다. 유능한 팀원들을 데리고 이직한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그녀가 늘 이겨왔던 방법으로 전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들 거대한 로비전쟁에 몰두한다. “내 임무는 이기는 거고 난 어떤 수단이든 사용할 책임이 있으니까.” 진심으로 헌신했던 팀원 에스미(구구 바샤-로)가 끝내 드러내기 꺼렸던 트라우마마저 전략적으로 활용하면서 승리를 향해 나아간다.

팀원들과 정보를 공유하지만 전부 공유하지는 않으며 항상 무언가 다른 일을 꾸미는 이 냉철한 기획가에게 도덕적 질책은 인간적 외로움과 함께 영수증처럼 청구된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 “정상이었던 적은 있었나?” 같은 질문은 아군으로부터 제기된다. 하지만 “이 바닥이 너희 내장을 도려내고 숨통을 조여도 나한테 징징대지 마,” 이직을 통고하며 일갈했던 것처럼 그녀는 결코 ‘징징대지 않는다’. 만성 불면증에 시달리며 하루 평균 16시간씩 일하고, 30분 동안 세 번이나 화장실에 들러 벤조디아제핀을 입에 털어 넣으며 버틴다. 매일 같은 식당에서 같은 음식을 먹으며 식욕을 통제하고, ‘경력을 쌓기 위해 포기한 (평범한) 삶’을 체험하기 위해 남자의 육체를 돈으로 산다.

변호사 출신인 조나단 페레라가 시나리오를 쓴 <미스 슬로운>은 전광석화 같은 슬로운의 한판 뒤집기 반전 쇼를 마지막으로 현실에서 충족되지 못할 정치 환경 개선의 이슈를 제기하며 끝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끝난 뒤에도 슬로운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확신하기는 어렵다. ‘거물 고객의 제안을 자신의 신념 때문에 거절한 로비스트’였을 수도, ‘로비스트 중에서 도덕적으로 가장 타락한 사람’일 수도 있다. 혹은 최종 승리를 이끌어낸 반전 쇼마저 정말 ‘모든 준비를 하고 스스로를 무기 삼은 후 미 의회를 산산조각 낸’ 환호 받을 일이었는지도 모호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슬로운은 진정 보기 드문, 싸울 줄 아는 승부사였다는 점. 이기는 방법을 알고,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유일한 ‘기준’이었다는 점이다. 단호하게 판단하며, 누구보다도 앞서 해결책을 제시하고, 결단력 있게 실행에 옮기는 슬로운은 백전백승의 전투경험으로 군졸들의 절대적 신뢰를 얻고 있는 명장의 카리스마와 아우라를 유감없이 풍긴다. 슬로운의 마지막 선택이 ‘자신의 경력을 스스로 죽이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여성이라는, 익숙하지 않은 얼굴을 한 이 승부사의 야심만만함은 최종적으로 제 덩치를 드러낸다.

 스물이 된 신예 플로렌스 퓨와 39살의 제시카 차스테인의 얼굴로 시작돼서 얼굴로 끝나는 두 편의 영화는 종전까지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캐릭터를 선보인다. ‘악녀’로 불렸던 많은 인물들의 욕망 충족이 모성애나 인간적 트라우마, 혹은 도덕적 규범 등등의 벽에 부딪쳐 번번이 좌절됐던 내러티브들과 달리, 이들은 ‘불문곡직’, ‘이유 불문’, ‘닥치고 직진’의 가공할 힘을 과시한다. 세상의 규범과 구속에 구애받지 않는 이들의 욕망 충족이 내러티브상 응징되지 않고 최종적으로 승인된다는 점에서도 단연 새롭다. 원작의 결말과 달리 캐서린은 대저택을 쟁취하며, 슬로운 또한 법적 구속을 대가로 승리를 이끌어낸다.

여성의 얼굴을 한 이 강렬한 캐릭터들은, 이전까지 여성 프로타고니스트를 내세운 많은 영화들이 왜 여성/관객들의 최종적 지지를 얻는 데 종종 실패했는지에 대한 반면교사가 된다. 캐서린은 핍박받는 여성으로서의 연대를 박살내며 안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성별에는 관심 없는” 슬로운도 끝내 에스미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하지만 “자신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살기등등한 방법으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여성”(윌리엄 올드로이드),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감수할 수 있는 한 여자”(제시카 차스테인)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마음을 관통”(나오미 아키에)한다. “순진한 소녀가 괴물로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여전히 그녀가 성공하기를 원하게”(플로렌스 퓨) 되고, 순수와 타락의 경계에서 비틀거리다가 맥없이 넘어지지 않는 슬로운의 판단에 매료되는 것이다.

<레이디 맥베스>에서 하인인 안나는 캐서린의 불우한 운명을 고스란히 표상하는 ‘더블’인 동시에 캐서린을 억압하는 가부장적 권력체계를 대리하다가 결국 계급과 젠더, 인종적 억압에 질식당하는 인물로서, 캐서린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드는데 기여한다. <미스 슬로운>에서 두 여성 캐릭터, 에스미와 제인(알리슨 필) 또한 슬로운과 밀도 높은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극적 긴장과 몰입을 돕는다. 주춤거리지 않고 끝까지 가는 여자들과 그 여자들 주변의 다양한 여자들이 만들어내는 흥미로운 화학작용과 신선하기 그지없는 영화적 쾌감은 새삼 케케묵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도대체 왜, 이렇게 역동적인 여성 인물들을 내세운 근사한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인가...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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