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뽑힘과 뿌리 찾기...상처와 ‘희망’

5월 11일은 ‘입양의 날’이다. 오랜 ‘해외입양’이라는 역사를 극복하고 국내입양을 활성화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10월 5일은 세계한인의 날이다. 720만 재외동포의 한민족 정체성을 정립시키고 긍지와 자부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2007년부터 지정됐다. 1975년 아홉 살 나이로 프랑스로 입양됐던 우니 르콩트와, 1987년 부산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입양된 사만다 푸터먼은 ‘입양아/해외한인’인 자신들의 이야기를 극영화 <여행자>(2009)와 다큐멘터리 <트윈스터즈>(2015)를 통해 들려준다.

빠(설경구)와 함께 시장에 들른 진희(김새론)는 한껏 신났다. 예쁜 새 옷도 사고, 근사한 구두도 사고, 큼직한 케이크도 샀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리다 중간에 내려 소변을 보았고, 그러다 발이 진창에 빠져 새 구두가 엉망이 됐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낯선 보육원에 자신만 남겨두고 아빠가 가버린 걸 알게 되었을 때도 진희는 울지 않는다. 보모 아줌마(박영신)는 아빠가 거짓말을 한 거라지만 진희는 도리질 친다. 아빠는 돌아올 것이다, 함께 여행을 간다고 했으니까. 나도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여기는 내 집이 아니니까. 집도 없고 아빠도 없는 아이들만 사는 곳이니까.

아홉 살 진희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힘을 다 내서 거부하고 저항한다. 밥도 먹지 않고, 이야기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럴 때 보모아줌마와 수녀들, 원장선생님은 진희를 강력하게 제지하지 않는다. 먹지 않으면 주린 배 잡고 어두운 부엌을 찾아 들어올 때까지 기다린다. 정 가고 싶다면 마음껏 가보라고 보육원 문을 열어준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 아무리 아홉 살 어린이가 입을 앙다물어도,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으로 되돌아가려는 본능이 아무리 정당하다 해도 어차피 그들은 이미 뿌리가 뽑혔다는 것을.

오래 지나지 않아 진희도 알게 된다. 자신은 이곳 아이들과 함께 밤에 화투 점도 치고, 다친 새도 보살피고, 일요일 성당에도 다니며 지내야한다는 것을. 사진 찍고 ‘석별’과 ‘고향의 봄’을 부르며 친구들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도. 그러는 동안 진희는 원래 예뻤던 웃음을 되찾기도 한다. 이미 생리를 시작한 열두 살이면서 해외입양을 위해 열한 살이라고 거짓말하는 숙희 언니(박도연)가 손가락 걸어 약속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파더’를 만나 입양 갈 때 반드시 진희를 데리고 가겠다고. 진희에게 ‘F’ 발음은 너무 어렵지만, 숙희 언니와 함께 갈 수 있다면 더 열심히 연습할 수 있다.

하지만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주사 놓을 때 말해주겠다고 해놓고 말도 없이 찔러버린 간호사처럼, 그러나 그들과 달리 “정말 미안해”란 말은 남기고 숙희 언니도 떠나버렸다. 불편한 몸으로 아이들을 살뜰하게 챙기던 예신(고아성)이 별로 선량해 보이지 않는 어른들을 쭈뼛거리며 따라가던 날, 보모 아줌마는 내다보지도 않은 채 방망이로 빨래를 연신 두들겼었다. 진희가 금발머리 인형을 갈가리 찢던 날 그 빨래방망이를 손에 쥐어주고 힘껏 두드리라고 한다. 그리고 원장선생님도 말한다. “너네 식구들 어디로 이사했는지 모른대. 이제 너도 다 잊어버려야 돼. 아빠 절대 안 오실 거야. 넌 여기서 새 부모 새 가족을 만날 거야, 알았지?”

한국계 프랑스인 감독 우니 르콩트의 반자전적인 영화 <여행자>는 동정 없는 세상에 내팽개쳐진 가녀린 어린 소녀의 상실을 집요하도록 담담하게 그린다. 아빠와 가족, 고국으로부터 외면당한 소녀는 조금씩 상실과 배신에 적응되고 단련된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검은 흙 속에 묻어버리는 매장의 의식을 치른 후 빈 손으로 프랑스행 비행기에 올라탄다. 영화는 낯선 피부색의 부모가 기다리는 공항에 홀로 내린 진희가 주변을 분주히 살피는 클로즈업으로 끝난다. 화면을 가득 채운 채 멈춰버린 진희의 얼굴은 말한다. 모든 삶이 뿌리 뽑히고 떠나는 숙명을 떠안고 내딛는 여행임을 이미 알고 있다고. 아홉 살 어린 ‘여행자’의 새로운 삶(영어 원제 ‘A Brand New Life’)이 그렇게 시작됐다고.

 

국에서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사만다 푸터만은 2013년 2월 ‘말도 안 되는 일’을 경험한다. 런던에서 패션을 공부하고 있다는 프랑스인 아나이스 보르디에라는 여성으로부터 페이스북 메시지를 받았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사만다와 얼굴이 똑같았다. “잠깐, 이건 나잖아! 내 사진이잖아!” 더 놀라운 건 1987년 11월 19일 생일마저 같았다. 우연히 유투브를 통해 사만다를 알게 됐다는 아나이스는 입양 관련 영상을 보고 사만다도 입양됐다는 걸 알게 됐다면서 출생지를 물었다. 더더욱 놀랍게도, 둘은 부산에서 태어났다.

와우! 둘은 당장 트위터 메시지로 연락한다. “샘, 어떻게 지내? 잘 지내길 바래.” “충격에서 못 헤어났지만 잘 지내.”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문자가 LA와 런던을 오가고, 화상 채팅을 통해 둘은 처음 만난다. “정말 이상한 경험이다.”(아나이스) “맞아, 정말 이상해.”(사만다) 컴퓨터 화면 양쪽을 차지한 둘의 얼굴은 데칼코마니처럼 똑같다. “어느 화면을 봐야 할지 모르겠어.”(아나이스) “정말 신기하다. 우리 진짜 쌍둥이 같아.”(사만다) 동그란 얼굴에 긴 생머리, 뺨이 발그레 상기된 둘은 빠른 속도로 이야기하며 까르륵 웃음을 터뜨린다. 매끈하고 작은 자갈돌 구르는 것 같은 웃음소리마저 똑같다.

비교적 합리적이고 온화한 가정환경 속에서 좋은 성장의 기회를 얻었던 점에서 둘은 행운아였다. 입양아였던 두 오빠들과 떠들썩한 성장기를 보내며 외향적으로 자라난 사만다와 달리 조용하고 예민한 성격의 아나이스는 어린 시절 따돌림의 상처와 함께 버림 받았다는 슬픔을 안고 자랐다. 하지만 둘은 입양가족들의 넉넉한 사랑에 힘입어 내면의 ‘깊고 어두운 감정들’과 타인의 고통을 수긍하는 어른이 됐다. “우리는 서로 만났고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만난 적은 없지만 사랑해요. 우리에게 준 모든 것에 감사해요. 원망은 하지 않아요...행복하기를 바라요.” 여전히 생모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미지의 여성에게 보내는 그들의 메시지는 따스하다.

<여행자>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상실의 정서를 통해 관객들을 무거운 죄책감에 빠뜨리는 것과 달리, 사만다 푸터만과 라이언 미야모토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트윈스터즈>는 시종일관 경쾌하고 밝다. 영화는 둘이 영국에서 처음 만나고, 아나이스가 LA를 방문하며, 세계한인입양아협회 서울 개최에 맞춰 함께 한국을 찾는 모든 과정을 기록한다. ‘SNS 시대’가 만든 영화라고 할 수 있을 <트윈스터즈>는 시대적 변화, 혹은 새로운 세대의 도착을 체감케 한다.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의식보다는 자신의 환경에 적응하고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낸 성숙한 두 입양아로부터 정작 한국의 관객들이 위로받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입양아로서 살아온 삶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입양아든 누구든 자신의 삶 안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낳아준 엄마, 두 명의 위탁모, 두 명의 양부모까지 엄마가 다섯 분이라는 이들 ‘엄마부자’는 “유전자보다 더 깊고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25년 만에 돌아온 사만다와 아나이스를 보며 우리는 어김없이 부끄럽다. 한때 ‘고아 수출 1위 국가’였다는 과거 때문이 아니라, 반세기 걸쳐 무려 17만 명 가까운 핏덩이들을 이역만리로 내쳤으면서도 여전히 입양에 대해 충분히 열리지 못한 마음 때문이다.

 

리 주변에서 사라졌고 기억되지 못한 채 망각된 입양아들의 이야기는 ‘억압된 것의 귀환’으로 우리의 마음을 건드린다. 다행스럽게도, 고맙게도 그 귀환은 불편하거나 고통스럽지만은 않다. 뿌리 뽑히고 공동체로부터 배척당했던 어린 소녀와 핏덩이들은 그 상실의 경험조차 예술적 자원으로 승화하는 성숙한 창작자로 성장했다. 하지만 감정적 격발을 제어하는 <여행자>의 담담함과 <트윈스터즈>의 생기발랄함을 핑계로 죄책감을 벗어던지거나 그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는 것은 차마 바라기도 죄스러운, 허무맹랑한 소망이 될 것이다.

<트윈스터즈>는 잔향처럼 남긴 자매의 해맑은 웃음소리보다, 끝까지 진실을 밝히기를 거부했던 친모의 침묵의 의미와, 그 침묵마저도 이해할 수 있다는 자매의 성숙함이 전하는 슬픔으로 기억돼야 한다. <여행자> 또한 엔딩의 클로즈업을 더 오래, 아프게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사랑했던 아빠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던 이유도, 친구들과 헤어져야 하는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이국으로 떠나야했던 진희에게 태어난 고향, 대한민국이란 곳은 검은 흙으로 만든 무덤으로 남았다. 스스로 땅을 파고 제 얼굴을 흙으로 덮던 소녀는 그렇게 스스로의 장례를 통해 애도의 절차를 마치고 비행기에 올랐었다.

그렇다면 ‘무덤’이었던 고국은 어떻게 다시 생명의 땅이 될 수 있을까. 진희는 약속을 신뢰하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여행자>는 어린 딸을 버린 아버지의 얼굴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 배우 설경구가 맡은 아버지 얼굴은 마지막 헤어지기 전 단 한차례 정면으로 보일 뿐, 화면 밖으로 나가거나 등만 보일 뿐이다. ‘무덤’인 고국과 ‘얼굴 없는 아버지’, 그리고 생모의 침묵은 ‘입양아들의 귀환’이 더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 이야기들에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귀 기울여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뿌리 뽑힘과 안타까우면서도 벅찬 뿌리 찾기의 여정을 그린 두 영화에 대한 제목의 ‘희망’에는 유보적 의미의 작은 따옴표가 붙는다.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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