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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영의 매치컷] 15. ‘미녀와 야수’-<펀치 드렁크 러브>와 <버팔로 ‘66>
박인영 | 승인 2017.10.10 13:57

 

“이런 사랑, 꿈꿔도 될까요…”

점점 사랑을 믿기 어려워지는 세상에서 사랑의 판타지를 설득시키기란 더욱 힘들어진다. 진부하고, 지루하고, 하나도 궁금하지 않을 뻔한 이야기들만을 반복해서는 좀처럼 관객들의 마음을 파고들기 어렵다. 하지만 어떤 영화들, 가령 폴 토마스 앤더슨의 <펀치 드렁크 러브>(2002)나 빈센트 갈로의 <버팔로 ‘66>(1998) 같은 영화는 마치 고난도 허들 경기와도 같은 ‘달콤한 사랑영화 만들기’의 미션을 가뿐하게 수행한다. 거칠고 난폭하고 불쾌하고 때로는 위험하기까지 한 남자-‘야수’들이 천사와도 같은 여자-‘미녀’를 만나 비로소 어른-인간이 되는 이야기를 통해 사랑의 마술적 효용을 매혹적으로 설파하는 것이다.

은 회사를 운영하는 베리 이건(애담 샌들러)에게 사랑은 마치 ‘재앙’처럼, 혹은 ‘천재지변’처럼 찾아온다. 새로 산 푸른 색 정장을 입고 출근한 아침, 멀쩡하게 잘 달리던 차량이 느닷없이 전복되더니 사무실 앞을 지나던 트럭은 낡은 풍금을 내려놓고 사라진다. 그리고 붉은 옷을 입은 여자 레나(에밀리 왓슨)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울리며 다가온다. 옆의 카센터에 차를 맡겨달라며 그녀가 건넨 자동차 키를 받아든 때부터 베리의 마음속에서는 깡통더미들이 시멘트 바닥을 구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나비처럼 하늘하늘 날아와 벌처럼 냅다 쏘아버린 사랑의 침을 맞고 그는 그로기 상태(punch-drunk)가 된다.

“저랑 내일 저녁 같이 하실래요?” 거침없이 다가와 데이트를 청했던 그녀는 깊은 호수와도 같은 초록색 눈동자를 빛내며 말한다. “동생 집에 있던 가족사진을 보곤 정말 만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차를 놔두러 간 거였어요.” 이보다 더 일사천리일 수는 없다. 데이트 후 뺨에 작별인사를 하고 막 아파트 현관을 나서기 직전 베리는 관리실로 걸려온 레나의 전화를 받는다. “알려줄 게 있어서요. 아까 헤어질 때 나 당신한테 정말 키스하고 싶었어요.” 바람을 가를 듯 날래게 다시 달려간 베리는 꿈결 같은 키스를 나눈다. “정말 좋군요.” 정말이지,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무려 일곱 명이나 되는 누이들 속에서 억눌린 채 살아온 베리는 이상한 행동을 곧잘 하는 문제적 소년이었고, 여전히 그렇다. 개집을 만들려던 망치를 던져 유리창을 깨던 어린 소년은 수염이 거뭇해진 지금도 ‘게이 보이’라 놀림 받던 그때와 다를 바 없다. 발로 유리창 몇 장을 박살내는 걸로 말 많은 누이들의 수다를 종결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분노와 두려움이 엄습할 때 애꿎은 화장실을 부수거나, 정확히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채 가끔, 아주 많이, 아무 이유 없이 울던 그는, 차가 전복되고 풍금이 느닷없이 떨어진 그날 이후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폴 토마스 앤더슨에게 칸영화제 감독상을 안겨 준 영화 <펀치 드렁크 러브>는 에두르거나 눈치 보지 않는다. 일말의 주저도 없이 과격하고 터프하게 직진하며 사랑의 마술적 효용을 소리 높여 외친다. 이제 그에게는 자신의 비밀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는 여자가 생겼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 사랑이 자신에게로 왔는지 알 수 없으나, 그건 상관없다. 중요한 건, 그녀에게는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세상 누구에게도 할 수 없던 말들을 레나에게는 두려움 없이 할 수 있다. “식당 화장실, 내가 부쉈어요, 미안해요.” “(하와이에)일 없어요, 당신 때문에 온 거예요.”

이제 그는 사랑으로 ‘슈퍼맨’이 된다. 외로운 밤, 그저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인 한 통의 전화로 5백 달러를 빼앗기고, 레나 또한 상처를 입었으니 그는 단호하게 응징에 나서 깔끔하게 악당들을 해치운다. “나한텐 당신이 모르는 힘이 있어. 내가 가진 사랑. 당신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몰라!” 레나를 만나기 위해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탔던 베리는 이제 더 많은 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 “당신 가는 어디든, 나도 갈 수 있어요. 여행이든 출장이든 당신 없인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어두운 동굴 속 혼자 울던 야수 소년은 미녀의 손을 잡고 세상으로 나온다. 꿈결 같은 풍금소리, 일렁이는 빛의 잔치가 펼쳐지는 어른들의 세상으로.

 

아지 빙고를 안은 동그란 눈의 귀여웠던 일곱 살 소년 빌리는 척 보기에도 눈살 찌푸려지는 인상 험악한 어른이 됐다. 진눈깨비 날리는 추운 날, 5년 만에 감옥에서 나와서도 소변 볼 곳을 찾지 못해 허둥대며 헤매고 엉뚱한 사람에게 주먹다짐을 하는 걸로 보아, 인상만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위험한 남자인 것 같다. 과연 짐작은 틀리지 않아서, 탭댄스 수업을 마치고 화장실에 들르다가 빌리(빈센트 갈로)를 만난 레일라(크리스티나 리치)는 동전 한 개를 건네는 친절을 베풀고도 입막음을 당한 채 강제로 끌려가 차와 함께 납치된다!

빈센트 갈로의 감독 데뷔작 <버팔로 ‘66>의 시작은 스산하고, 낯설다. 하지만 불편함과 불쾌함은 오래 가지 않는다. 백주대낮에 대담한 범죄를 저지른 납치범치고 빌리의 행동은 영 어설프기만 하다. 스틱 운전은 못한다며 납치한 여자에게 운전대를 맡기더니, 소변보는 동안 꼼짝도 하지 말라며 맨 입으로만 협박하는 품이 허술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몇 시간 동안 참았던 소변을 보고 온 다음에는 세상 다시없을 순하고 선한 눈으로 사과를 하더니 공손하게 부탁 한다. “나랑 같이 집에 가주면 좋겠어. 내 아내인 것처럼 연기를 해주면 돼.”

졸지에 인질이 됐던 레일라는 그렇게 생전 처음 보는 남자의 아내 역으로 ’화려한 데뷔‘를 한다. 그녀의 상대역은 버팔로 미식축구팀의 열광적 팬인 엄마(안젤리카 휴스턴)와 한때 클럽의 가수였던 아버지(벤 가자라). 초콜릿 알레르기를 가진 아들을 5년 만에 만나 초콜릿을 접시 가득 내오는 엄마는 단 한 번 버팔로팀이 미식축구 슈퍼볼 우승컵을 안았던 1966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 ’하필‘ 태어난 빌리 때문에 경기를 놓쳤다며 여전히 아들을 원망한다. 어린 아들의 눈앞에서 강아지 빙고의 목을 비틀던 냉정하고 인색했던 아버지는 아무에게나 마그마 분출하는 화산처럼 화를 터뜨린다.

“제 눈엔 빌리가 세상에서 최고로 잘 생겼는걸요. 빌리는 너무 좋은 남편이에요. 정말로 이런 사람을 만나다니, 전 복도 많죠. 전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졌어요.” 그냥 대충 하는 연기가 아니라 영혼을 갈아 넣는 레일라의 혼신의 열연은 빌리의 오랜 짝사랑 웬디(로잔나 아퀘트)를 만났을 때도 이어진다. “저 여잔 정말 후졌어. 저 여자에 비하면 네가 훨씬 나아. 저런 여자한테는 네가 아까워.” 그리고 결코 빌리가 청하지 않았던, 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연기까지 펼쳐 보인다. “넌 세상에서 제일착하고 제일 잘 생긴 남자야. 널 사랑해”

결국 ’나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아끼고, 나 없이는 못 사는 그런 아내와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아들‘로 부모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자신을 불행의 나락으로 이끈 사람의 머리를 권총으로 날린 뒤 자살하려던 빌리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살고 싶지 않아, 죽어버리고 싶어…” 혼자 화장실에서 오열하던 빌리는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누구보다 행복한 얼굴로 하트 모양 쿠키와 핫 초콜릿을 싸들고 밤거리를 달린다. “나, 네가 정말 좋은데 돌아오지 않으면 너무 슬플 거야. 오겠다고 약속한 거 잊지 마.” 깊은 갈색 눈동자의 레일라가 모텔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부모가 여전히 냉정하고 무심하고 냉혹하거나 말거나 상관없다.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배불뚝이 남자도 관심 없다. 이제 그는 ’내 여자가 기다리는 남자‘가 된 것이다.

 

물아홉의 나이에 <매그놀리아>로 베를린 황금곰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 유수의 영화제를 싹쓸이한 천재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과, 배우·모델·사진작가·인디밴드 뮤지션·화가 등의 다채로운 예술적 역량을 과시하는 팔방미인형 천재 빈센트 갈로가 <펀치 드렁크 러브>와 <버팔로 ’66>에서 보여주는 전략의 유사성은 신기할 정도다. ’기적으로서의 사랑‘, ’사랑만세!‘를 외치는 가장 진부하고 단순한 이야기를, 구구절절 이유를 늘어놓거나, 극적인 장치를 경유하는 등의 번거로움을 일체 생략한 채 세상 어떤 러브스토리와도 닮지 않은 기이하고 삐딱하고 낯선 영화로 만들어낸 것이다.

세상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심지어 부모로부터도 외면당했기에 ’야수‘가 되어야했던 외로운 소년들에게 하늘에서 동아줄 내려오듯, 날개만 안 달린 천사-’미녀‘들이 다가온다. 말하지 않아도, 거짓말을 해도, 혹은 겁박을 해도 그녀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화내지 않으며,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사랑스러운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며, 따스하게 가슴에 품는다. 삶의 벼랑 끝에서 절박하게 띄웠던 구원의 신호에 너무 늦지 않게 응답하는 그녀들이 있어, 소년은 비로소 어른-남성이 되고 삶의 기나긴 여정에 나설 용기를 갖는다.

두 영화에서 레나와 레일라에게는 일체의 극적 배경도, 내면에 관한 설명도 배제된다는 점에서 이들은 철저한 남성의 판타지, 남성 로망의 끝판왕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신기한 것은, 영화 바깥의 관객 여성들마저 소외감과 불편함보다는 그 로망에 살짝 마음을 얹고 싶어진다는 점이다. 전형적인 미인으로 분류되지 않을 독특한 매력의 두 배우 에밀리 왓슨과 크리스티나 리치는 이 진부하면서도 현실을 초월한 듯한 사랑의 판타지에 입체적 양감과 묵직한 무게를 부여한다. 그들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 찾기‘의 로망마저 없어서야 이 힘든 세상을 어떻게 버텨내겠느냐는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여전히 울고 있는 세상의 많은 소년, 소녀들을 성숙하게 위로한다. /영화 칼럼니스트

 

박인영  cuulm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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