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어떤 상처 앞에서,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상처와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절박한 것이 된다. 그리고 치유의 어려움 혹은 불가능함 때문에 이는 더욱 간절해진다. 여성 감독 린 램지가 만든 <케빈에 대하여>(2012)와 남성 감독 케네스 로너건의 <맨체스터 바이 더 씨>(2016)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오가면서 상처의 주변을 기웃거리는 것이 예술의 속성이자 본령”이라는 말에 응답하면서 “상처의 얼굴을 조금 더 응시”(왕은철, 『트라우마와 문학, 그 침묵의 소리들』)한다. 더없이 가슴 아프지만, 달리 무언가 더 필요하지 않을 만큼 충실하게.

“지옥에나 떨어져버려. 이 마귀 같은 년아!” 길 가다가 느닷없이 주먹세례를 받아도, 집의 벽과 차량 유리창이 번번이 빨간색 페인트로 뒤덮여도 에바(틸다 스윈튼)는 동요하지 않는다. 묵묵히 가던 길을 가고, 열심히 페인트를 지울 뿐이다. 2005년 오렌지상 수상작인 미국의 여성작가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소설을 영화화한 린 램지의 <케빈에 대하여>는 피곤한 낯빛의 중년 여성 에바가 당하는 박해와 고초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 경계가 모두 사라져버린 혼돈의 삶을 버텨가는 에바의 사정은 끔찍하고 경악스러운 학살 사건이라는 최종 목표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교차편집을 통해 관객들에게 알려진다.

37살까지 ‘전설적인 모험가’로 삶의 희열을 만끽했던 자유로운 여성 에바는 프랭클린(존 C. 라일리)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아들 케빈(에즈라 밀러)을 낳는다.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한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렇듯 에바에게도 엄마로서의 삶이 주어진다. 하지만 에바는 엄마-되기의 난제에 흔쾌히 혹은 주저하며 도전해서 결국은 어찌어찌 과업을 수행하는 대부분의 여성에 속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임신은 당혹스러웠고, 출산은 고통 그 자체였으며, 자신 앞에 주어진 낯설고도 막무가내의 생명체 앞에서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리하여 결국 에바는 모성의 담지자라는 엄마의 자리에 연착륙하지 못한다. 이는 에바와 프랭클린이 함께 한 가족-만들기의 총체적인 실패로 귀결된다. 사랑하는 아내의 고통에 끝내 둔감했던 남편 프랭클린은 사랑받지 못하는 아들의 고통과, 치열한 모자간의 쟁투의 희생양이 된 어린 딸 실리아(에슐리 게라시모비치)의 슬픔에 끝내 무지한 채로 그 또한 아버지-되기에 실패한다. 무엇보다도 비극적인 것은, 죄 없는 숱한 피해자들을 배경으로 자신의 불행과 가족의 불운을 전시하거나 고발, 혹은 복수하려는 아들 케빈의 악마적 의지를 누구도 견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엄마는 네가 태어나기 전에 더 행복했어.”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을 에바가 어린 케빈에게 했다고는 해도, <케빈에 대하여>는 케빈이라는 문제적 인물을 모성의 부재가 만든 괴물로 단정 짓지 않는다. 끔찍한 참극의 책임을 제 때 제 자리에 도착하지 못한 모성에 섣불리 묻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신중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어긋나기만 한 자신과 케빈, 엄마와 아들-되기의 실패가 남편과 딸, 그리고 죄 없이 불려온 많은 피해자들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에바는 끈질기게 곱씹는다. 그래서 에바는 케빈의 16살 생일을 며칠 앞둔 악몽의 월요일로 되풀이해 돌아가고, 꼬박꼬박 소년범인 아들을 면회 간다.

사랑했던 남편과 사랑하는 딸을 잃고, 자신으로 살아온 역사마저 훼손된 상처투성이의 삶을 에바는 묵묵히 견딘다. 여전히 그녀는 모른다. 자신이 괴물을 낳은 건지, 자신이 괴물로 키운 건지. 왜 자신에게 이런 고난이 주어지는 것인지. 대체 이 모멸이 끝나는 순간이 있기는 한 건지. 열심히 빨간 색 페인트를 지우고 아들의 방을 파란 색으로 페인트칠하며, 아들의 냄새가 밴 티셔츠를 다려 가지런히 서랍에 정돈하는 그녀가 아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이제는 말해 봐…왜 그랬니?”라는 질문에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라고 마침내 답한 아들처럼, 자신도 잘 모르는 이 삶을 그래도 버텨내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을. 

 

스턴에서 잡다한 아파트 관리 일을 맡은 리(케이시 애플렉)는 심장병을 앓던 형 조(카일 챈들러)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고향인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향한다. 형이 발병할 때마다 잠깐씩 들렀던 고향이었지만 이번엔 당초 예정했던 일주일보다 더 오랜 시간 머물게 된다. 병원에 도착하기 전 형이 숨을 거두었으니 장례 등 뒷수습을 해야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의사도 묻지 않고 혼자 남은 열여섯 살 조카 패트릭(루카스 헤지스)의 후견인으로 지명한 형의 유언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스턴에서 맨체스터로 떠나기 전의 도입부에서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표정 없는 얼굴의 남자 리의 팍팍한 일상을 꼼꼼하게 보여준다. 꽤 유능한 일꾼임에도 무뚝뚝하고 무례해서 주민들로부터 민원이 끊이지 않으며 가끔씩 주먹다짐도 하는 이 사내에게는 무언가 사연이 있음직해 보인다. 눈발 흩뿌리는 보스턴에서 1시간 반 거리의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향하는 공간의 이동은 현재의 불행의 원인을 과거로부터 탐색하는 시간 구조와 조응한다. 그러니 운이 좋다면, 불행 이전의 시간을 탐색하는 수고의 끝에 비로소 상처를 털고 화해를 도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저 사람이 그 유명한 리 챈들러야?” 작은 고향 마을에서 그는 묘한 경계와 조심스러운 관찰의 대상이 된다. 누구도 그를 모르기 힘들다. 나이 어린 패트릭을 태우고 형 조와 함께 바다낚시를 즐기던 그때, 리는 비염으로 고생하는 아내 랜디(미셸 윌리엄즈)와 예쁜 두 딸, 갓난쟁이 아들을 둔 평범한 가장이었다. 새벽 2시 넘도록 친구들과 떠들썩한 맥주파티를 즐기던 그날, 그는 단 한 번의 끔찍한 부주의를 저질렀다. 그리고 끝이었다. 시뻘건 불길에 모든 것을 빼앗긴 그날, 급하게 훔친 경찰의 총으로 자신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는데 실패한 그날, 모든 것은 얼어붙었고 그는 스스로를 지옥 속에 유폐시켰다.

“누구나 실수는 해.” 사람들은 말한다. 아마 그도 남의 일이었다면 그렇게 온 정성을 다해 상대를 위로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두가 용서해도 단 한 사람, 자신만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기에 감옥과도 같은 원룸에서 고행과도 같은 일상을 버티던 그에게 조카 패트릭은 감당하기 버겁다. 하키부 주전선수이자 록 밴드 리더, 두 명의 여자 친구를 동시에 사귀는 활달한 10대지만 패트릭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무서워하는 어린 아이일 뿐. 하지만 리는 도저히 맨체스터에 살 수 없고, 패트릭은 맨체스터를 떠날 생각이 없다. 삼촌과 조카는 냉동고에 보관중인 조의 시체를 묻을 수 있는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자신의 상처에 갇혀 살던 이들이, 자신의 돌봄을 요청하는 더 취약한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상처를 딛고 성장하게 된다는 감동의 대단원은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 없다. 리는 결국 패트릭을 형 친구에게 입양시키는 서류에 사인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패트릭 소원대로 조의 보트를 팔지 않고 고장 난 모터를 바꿔주는 것. 그리고 곧 성인이 될 패트릭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보스턴에 방이 두 개인 집을 구하거나, 최소한 소파 겸 베드를 하나 들여야겠다는 결심 정도이다. 봄은 왔다지만, 아직 겨울바람의 매서움이 다 잦아들지는 않은 시간인 것이다.

 

<케빈에 대하여>와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 에바와 리의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케빈이 다니던 고등학교 체육관과 자신의 집 정원이 붉은 색 선혈로 물든 그 시간으로부터 꽤 먼 시간을 지나왔지만 에바의 시간은 뒤로만 달려간다. 케빈이 처음 장난감 활을 선물 받았던 시간,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의 목소리를 공사장 소음으로 뒤덮던 시간, 자신의 얼굴이 괴물처럼 일그러지던 출산의 시간, 그리고 더 멀리 광란의 토마토축제의 시간까지.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패트릭, 리, 조가 함께 하는 바다낚시 장면으로 시작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과거로부터의 소환, 호출에만 반응할 뿐인 에바와 리에게 미래는 상상하는 것조차 금지된 그 무엇이다.

하지만 죽음보다 더한 고통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고 에바와 리는 살인마 소년범의 엄마로서, 어린 조카 패트릭의 삼촌으로서 주어진 과제를 수행할 것을 요구받는다. 미처 준비하지도 못한 채 생명을 떠안은 운명을 에바가 감당해야 했듯, 전혀 의도하지도 않은 채 사랑하는 자식들을 떠나보내는 끔찍한 악역을 리가 떠맡아야했듯 또 다시 새로운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이 모든 건 고작 인간일 뿐인 그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 그러니 감히 신의 영역에 내던져진 두 인물이 안식을 구하지 못하는 건 논리적 귀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도 원치 않은 비극의 당사자가 되어 피해자이되 가해자의 중첩된 위치에서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그저 버티는 운명만을 부여받은 에바와 리를 바라보며 그래서 우리는 깊은 두려움과 고통에 압도된다. 모성과 비극의 인과관계 혹은 선후를 따지거나, 상처의 극복을 채근하는 어떤 말도 쉽게 꺼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만 깨닫게 된다. 세상의 모든 상처가 다 치유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어떤 상처는 고통스러울 만큼 느린 속도로 치유되고, 어떤 상처는 결코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런데다 채 치유되지 못한 상처를 떠안은 채로도 또 누군가에 대한 헌신의 책무를 떠맡기도 한다는 것을.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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